기로연은 고려 때부터 있었던 풍습이다. 문헌 '졸고천백'에 해동기로회가 나오는데 고려 문신 최정인이 벼슬에서 물러나 쌍명재를 짓고 사대부를 은퇴한 사람들을 모아 날마다 술마시고 시를 짓고 바둑으로 소일했다는 것이다. 연려실기술은 성종이 내삼청에 바둑 장기 쌍륙 기구를 내렸다 했다. 이 세가지 놀이는 조선의 3대 반상게임으로 승마 활쏘기 축국과 더불어 조선 체육의 전부(?)였다. 우리가 아는 일지매가 등장한 시기가 이 시기다.

중국의 이탁오는 '바람의 자객'을 일지매라 기록한다. 탐관오리의 징치를 위해 다녀간 자객의 흔적은 오직 바람 한 점이란 것이다. 이 일지매를 조금더 자세하게 부연한 사람이 조수삼이다. 조수삼은 조선 위항인의 한 사람으로 시, 바둑,.해학 삼절로 불리던 희대의 인물이다.

일지매는 협객이다. 탐관오리의 부정한 재물을 빼앗아 양생송사(먹고살기와 당장 장례를 치루기도 힘든)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는 처마와 처마 사이를 날아다니고 벽에 붙어다닐 정도로 몸이 빠르다. 도둑이 든 집에 매화 한가지를 표식으로 남긴 것은 다른 사람들이 의심을 사 곤혹을 치루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一枝梅盜之俠也.每盜貪官汚吏之財自來者. 散施於能養生送死者而飛詹徒壁捷若神鬼.被盜之家.固不知何盜也. 而及自作朱標刻一枝梅爲記羔不慾移怨於他也. 조수삼 추재집 )

탐관오리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탐관오리는 성군 세종 때도 영정조 임금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벼슬을 탐하고 재물을 탐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속하는 것이기에 어느 시대라도 그들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일지매는 이런 난망의 정치에 민중이 던지는 페이소스이자 골계다. 조수삼이 말한 일지매를 현실 속에서 찾아내어 기록한 사람이 조희룡이다. 조희룡은 호산외기에서 김수팽을 주목한다.

김수팽은 호조의 아전으로 남다른 협기가 있다고 했다. 같은 아전인 동생이 물감 들이는 일을 부업으로 하자 물감통을 모조리 부수어 버리고는 호구(虎口)를 연명할 수 있는 아전이 가난한 백성들의 일까지 탐한다는 이유로 질책을 퍼붓는다. 김수팽의 꼬장바리 근성은 상급자들에게도 예외가 없다. 김수팽이 하루는 급한 공무를 결재 받으러 상급자의 방에 가자, 한참 바둑판이 벌어져 경황(?)이 없었다. 김수팽은 조금 기다리다 바둑판을 들어 엎고는 죄를 청한다.

공무가 급해 죄를 지었습니다. 이 결재를 해 주시고 아전(나)을 파직하십시오.

상급자는 어이가 없어 하며 그를 문책하지 못한다. 김수팽은 한번은 대형사고를 친다. 호조의 금고를 지키는 자리에서 숙직을 서는 밤에 내관이 왕명이라며 금 1만냥을 내달라고 한 것이다. 김수팽은 금고 책임자의 결재가 없이는 죽어도 못내준다며 해가 뜰 때까지 버텨 내관을 곤혹스럽게 한다. 화가 난 왕이 연유를 알고는 오히려 김수팽을 기특해 한다.

조희룡은 김수팽의 사람됨이 그 어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했다. 김수팽의 노모가 남다르게 강직했던 모양이다. 조희룡은 김수팽을 생각하니 마치 바람이 불어오는 듯 들은 것과 같은 인물이다 평을 한다. 바람의 아들은 일지매뿐만은 아닌 것이다. 일지매는 언제 왔다 갔는지 모를 바람의 칼이란 이미지로 당대의 선과 악을 경계하고 경고한다.

바둑계에서 유창혁이 일지매란 별호를 얻은 이유는 바람의 수읽기(數讀)를 지칭한 것인 듯하다. 대국 상대자에게 언제 당했는지도 모르게 데미지를 주는 수, 바람의 수, 반상의 세계에서 한때 그런 바둑을 둔 기사가 있었다.



2.
나는 오래 칩거했다. 하도 오랜 날들을 혼자이다 보니 한때는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의 지반도 잊어버렸었다. 나는 시간이 가는지도 몰랐다. 한번은 아침을 먹고 나갔다가 3년 만에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은 적도 있었다.

그날 사임당 같은 나의 노모는 아무 말 없이 내가 좋아하는 누른밥을 내 놓으셨다. 요즘 나는 새벽을 틈타 글을 쓴다. 어제는 미친 듯 산자락을 헤메고 다녔다. 갈등이 없으랴. 요즘의 나의 화두는 답이 없는 작법과, 그에 엇박자인 보폭의 간격에 대한 고민이다.

과거의 문법은 유별나다. 과거는 과거형의 시제로 오늘과 내일을 말하지만 오늘에 충실한 사람들은 과거의 시침엔 관심이 없다. 따질것 없이 눈과 마음이 밝지 못한 사람은 과거에 무감각하다. 아니 스스로 자신의 지난날도 망각한다. 졸렬하다 말하지 마라. 거창하다 말하지 마라. 인생은 겨우 나의 지난날일 것이며  당신의 지난날일 것이다.

울진의 불영사를 다녀왔다. 하루를 동해바다에서 묵었다. 눈발이 날리다 못해 천둥이 쳤다. 우박이 내리더니 거친 바람과 대추알 같은 눈송이가 난분분을 넘어 폭탄 떨어지듯 왔다. 철천지 원한의 통곡이라도 이리 엄청난 눈물을 흘렸을까. 눈 위에 떨어지는 번개와 뇌성이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이 무섭다. 어느 예인이 눈을 보고 사랑의 노래를 지어 불렀던가. 나무가 꺾이는 소리가 단말마의 비명으로 들린다. 눈의 무게를 못이겨 수백년된 고목들이 땔나무꾼의 겁간을 당하는 새댁마냥 정신나간 꼴로 멋적게 뒷산에 서 있다. 나무가 주저앉고 산짐승들이 거처를 잃고 민가를 떠돈다. 차라리 산이 무너진다. 저 산이 생긴 이래 이리 많은 눈덩이를 짊어져 본 적이 있을까. 그 속에 숨 대고 사는 사람들이 온전 할 까닭이 없다. 

축사가 무너지고 하우스가 무너지고 지난 겨울 늙은 부부가 언 손을 부비며 가꾸어 온 채소며 토마토 등이 쑥대밭이 된다. 이 모양을 산중에 살다 바둑판 위를 잠시 산보한  나의 삶의 모습일진대 스스로 애고에 지친 나는 무덤덤하다. 

 
부디 다른 곳에서 찾지 마라. 까마득히 나와는 머니 내가 지금 혼자 가지만 곳곳에서 너를 만나니.


아!
일지매는 언제나 올 것인가.




                                         순천 유창혁도장 원장 전동규 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