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태같던 청년 전영선의 프로기사의 삶이 술에 저당 잡혀  바스라진 것은  유감이다. 필자는 주신(酒神)에 포로가 되어 세상의 의미가 된 사람을 몇 명 기억한다. 이태백, 도연명, 담사동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주신의 저주에 녹아났을 뿐이다. 92년쯤 주독(酒毒)에 찌든 전영선은 반쯤은 사신(死神)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그는 아침부터 술을 청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인천에서 바둑도장을 하는 박상룡 원장의 기억은 생생하다.

"보살님, 소주 두 병만 사줄래요?"

박원장의 도장을 찾은 전영선이 도장 안살림을 하는 부인에게 술을 요구하는 모습이  천연덕스럽다. 그랬다. 전영선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소주 두 병을 외쳤다. 그리고 그 말을 외면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80년부터 시작된 그의 주독은 90년을 넘으면서 고질이 된다. 주변에서 한두 사람씩 거리감을 두기 시작한 것도 그때다. 바둑기자들이 이창호를 인터뷰하면서 전영선의 지도시절을 물으며 '술 냄새 안나더냐?"  질문을 던질 정도였다. 92년 전영선은 잠시 한가한 시간을 갖는다. 도신스님과 만나면서 그의 절에서 함께 생활을 하면서 술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

도신스님은 당시 노래하는 스님으로 음반을 여러 장 내면서 스타로 떠오를 때였다. 도신스님은 전영선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에게  바둑을 배우고 알코올 중독에 고통스러워 하는 그를 보면서 '승부사의 노래'라는 음반도 낸다.


괴로움의 한숨이 돌이 되어 우는데
최선의 수는 보이지 않고
어둠만 밀려오네.





94년 6월 서울 홍은사 경내에서.


전영선은 기력증진을 묻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하는 레퍼토리가 있었다. 도신스님에게도 항상 그랬다.

"먼저 미쳐라,  그리고 많이 둬라. 복기를 해라."

전영선은 도신스님과 4-5년을 지내면서 티격태격 많이도 싸웠다고 한다. 전영선은 승부심이 강한 도신스님의 저돌적 바둑탐(?)을 제어하려 싸웠고, 도신스님은 안보이면 술을 마시는 전영선을 만류하느라 다툰다.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내기가 아니면 프로와 바둑을 두기 힘든 시절 도신스님은 상당한 금액을 걸고 프로들에게 내기를 청한다.

결과는 불문가지였다. 승부에 패하고 돌아온 도신스님에게 전영선이 한마디 한다.
"바보탱이. 그 돈 나나 주지."
도신스님은 다음날 아침 밥을 먹다가 그 말을 따졌다고 한다.
"사부, 어제 저에게 바보라 하셨지요?"
전영선은 기다렸다는 듯 부인을 했다고 한다.
"아니."
"하셨잖아요."
"아냐."
절집에 살면서 바둑 스승과 제자의 티격태격이 선연하다.

전영선은 태생이 바둑인이었다. 그의 바둑사랑은 지독했다. 짜장면 한그릇 소주 한병에 바둑 백판을 배웠다는 사람도 있었다.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는데 두 시간 만에 수백리길을 버스를 타고 와 소주 두병을 요구하더라는 사람도 보았다. 그렇게 2002년 2월 초 풍운의 기객 전영선이 운명을 마감했다.

그의 승부인생은 탁발한 것은 아니다. 큰 성적도 내지 못했다. 전영선이 꼽은 자신의 바둑인생 중 가장 보람된 사건을 67년 한국바둑선수권전 우승으로 조남철과 두점 기념 바둑을 둔 것을 꼽을 정도였다. 누구를 키웠다느니 하는 자화자찬은 그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의 마지막을 지켜준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전영선이 세상과 결별한 후 그의 49제를 지낸 곳도 서광사다.

바둑인도 예인(藝人)이다.

예인은 도를 구하는 구도자는 아니다. 우리는 예인의 길을 가면서 정신적으로 무너진 수많은 예인들을 기억한다. 세상은 그런 예인들의 일탈을 보면서 호기심을 갖는다. 바둑 안에서 전영선이 그런 경우다. 사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고 재단한다는 것은 망종이다. 될 일도 아니다.  다만 바둑판 앞에서 아프게 살았던 외로운 영혼을 추억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런 후학도 없다면 선학은 너무 쓸쓸하다. 필자는 오늘 서광사 마당에서 전영선에게 술 한잔을 따른다. 부처님 계신 곳이기에 시 한줄로 가름했다.

술이여  삶이여
모두 비우고나니 술병만 외롭구나.
달빛이 절집 안으로 들어오면
주인 잃은 바둑판은 새벽을 향해 운다.

(酒生之兮  生酒之兮 盡盖壺自獨 棧月入寺室  忘局曉向鳴)



전영선 유품인 바둑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