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부. 전영선을 찾아가다
2부.  강호전류(江湖田流)
3부.  바둑을 넘어 저쪽
4부. 눈물의 사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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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강호전류(江湖田流)



시냇물 소리조차 장광설의 법문이거늘
산색이 어찌 청정법신 아니랴
밤을 새워 외는 팔만사천 대장경도
날새면 무슨 수로 이웃에게 전할꼬.

(溪聲便是長廣舌 / 山色豈非淸净身 / 夜來八萬四千喝 / 他日如何與似人)


술과 바둑 좋아하던 '소식' 은 어느날 노산(鷺山) 귀종사(歸終寺)를 다녀오던 중 시 한수를 짓는다. 이 시는 불가에서 말하는 한소식 깨달음의 오도송이나 다름없다. 필자는 전영선을 취재하는 내내  미친 듯 세상을 살다가 불식간에 세상을 떠난 전영선의 이미지가 중첩되는 느낌을 받았다. 선홍색의 바둑판에서 대면한 느낌 그대로였다. 온몸으로 살고 온몸으로 죽어야(生也全機現死也全機現) 한다지만 어찌 그 말이 쉬우랴. 온몸으로 살고 온몸으로 죽는다는 것이 치열한 삶, 치열한 정신을  말한다면 바둑인으로 그것을 실천한 사람은 '전영선'이 아닌가 싶다.

사실 전영선은 유명인이다. 많은 지면에 그의 에피소드가 차고 넘친다. '쌍권총의 기인' '바둑계의 이단아' '관철동의 디오게네스' '암수(暗手) 전류' 등 하나같이 술과 기행 그리고 소년 이창호를 발굴한 스토리로 점철된다. 스토리 간에 서로 교감(?)을 나누어 끝내 누가 누구 것을 베꼈는지조차 모를 지경이다.

                (1979년 승단전 대국. 우하귀에 전영선 사범의 수결이 선명하다)


필자는 전영선의 일면을 서울 홍은동의 '홍은사' 에서부터 더듬었다. 홍은사 법당은 홀처마에 맞배지붕이다. 골기와는 아담하고 평화롭다. 용마루 선은 버선코마냥 산뜻했다. 연꽃무늬 문살 앞에 앉으면 따뜻한 초여름의 햇살이 어머니의 품속 같았다.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사찰의 낮은 담장이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1995년 6월 어느날 47세의 전영선은법당앞에 앉아 바둑을 말했었다.

"바둑은 전쟁이다. 치열한 반상의 전투는 인간의 고통 바로 그것이다."

이 증언은 1995년 6월 전영선과 노래하는 스님 도신을 취재한 경향신문 박성수 기자가 한 것이다. '반상의 노래'라는 음반을 발표한 스님과 바둑계의 중견기사 전영선의 의기투합 속에 나온 발언이니 전영선의 면모로 부족하지 않다. 이미 30년 프로 생활을 거친 역전의 용사 전영선은 전류(田流)라는 상표를 달고 있었다.

전투로 일관하는 바둑, 암수와 함정수는 물론 때로는 꽁수(?)도 마다치 않는  그의 바둑은 실전바둑으로 바둑계에 정평이 나 있었다. 바둑계는 그를 일러 흑도, 암수의 대가로 인정하는 한편 다른 시각에서는 이단으로 치부, 폄하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 분위기에 전영선의 고질적인 주벽(酒癖)은 그를 바둑계의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는 결정적인 계기로 충분했다.

"전류라는 말을 무조건 암수로 보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전류'라 말하는 전영선사범의 수법은 언제라도 실전에서 전용할 수 있는 수를 말합니다."

박성균사범은 '전류' 라는 말에 약간의 오해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서고에서 기보 한편을 내보인다. 이창호가 둔 기보(출처 월간바둑)로 전영선의 수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한다.

 흑1은 쌍립의 맥점으로 이 수가 놓여진 다음의 백의 응수는  중앙 여섯점을 포기하고 흑석점을 잡는 수 외에는 없다고 한다. 전류는 실전에서 한수로 상대의 급소를 치는 수로 '대국수' 이창호도 둘 수 있다는 것이다. 결코 전류가 별종은 아니라는 말인 듯하다.

박성균사범은 전영선의 기보집을 출판하고 싶어했다. 한국기원의 창고에서 잠들어 있던 전영선의 기보 96국을 모두 모아놓고 있기도 했다. 필자는 그 기보 속에서 전영선 자술 기보 한점을 발견하고 놀랐다. 1979년 6월23일 장수영 4단과 둔 49회 갑조승단대회 기보였다. 기보에는 '장수영 2시간 30분, 전영선 50분을 사용했고 전영선의 흑 9집승'에 231수까지 기록이 되어 있었다. 기보 끝에는 달필의 田永善이란 수결이 선명했다. 전영선의 자필 기보 유일본이란 말이 된다.

필자는 다각도의 취재로 접근한 전영선의 '실전바둑'이란 말을 '거리의 싸움'이란 말로 대신하고 싶다. 뒷골목의 싸움꾼들도 '실전에 강하다'라는 말을 수긍한다. 수년전에 한 상가에 갔었다. 종로패라 불리던 과거의 주먹패였던 김동회 옹의 상가였다. 김동회 옹은 전설의 주먹 김두한의 친구이자 동지로 소공동의 한 커피숍을 사랑방 삼아 80살의  명을 접고  많은 주먹패들의 조문을 받으며 귀천을 했다. 나는 이 노협객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다. 그것은 김두한과 시라소니의 우미관의 조우였다.

알다시피 시라소니는 거리의 파이터다. 그는 조선을 벗어나 북만주 일대를 누비던 맹수였다. 시라소니가 해방된 서울로 들어와 김두한과 한판 승부를 내자고 종로패의 본거지로 들어온 거다. 이 자리서 김두한은 시라소니를 형님으로 모시고 모든이들의 기대를 싱겁게 끝내 버린다. 필자는 김동회 옹이 살아 계실 때 이 조우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김두한과 평생지기였던 김옹은 무엇인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김옹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단순하게 말했다

"그날 박치기를 했다면 두한이가 깨졌지. 허나 두서너 해 전이었다면 시라소니고 뭐고 안됐을 거야."

김옹은 싸움의 기술보다 정신력을 강조했다. 모든것을 이룬 김두한에게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시라소니는 벅찬 상대였다는 얘기다. 김두한이 아무것도 없을 때는 단 3명의 부하들로 일본 야쿠자 고로에로 패의 40명과 벌인 싸움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다.

나는 여기서 '당개' 윤봉선 옹도 말해야겠다. 윤옹 또한 종로패의 유명 주먹으로 중앙극장의 기도로 있을 때 명동패의 지류인 충무로패의 공격을 받고 40 대 1로 싸운 전설의 주먹이다. 작은 키에 덩치가 좋아 당개라고도 불리던 윤옹은 40 대 1의 싸움을 담대하게 설명한다.

"40명이 나를 찾아왔다면 그날이 나의 제삿날이지. 그들이 나를 찾아온 게 아니라 내가 찾아간 거야. 그들의 아지트로..."

윤옹은 단신으로 충무로의 한 아지트로 찾아가 수명의 상대를 때려눕히고 돌아온 것이 와전되었다고 정정을 해준다. 40여 명이 쉬고 있는 합숙소로 손도끼를 들고 들어가 미친 황소처럼 날뛰다가 당당히 돌아왔다는 거다.

"돌아오려고 등을 보일 때  싸아 하더라고. 거기서 뒤를 힐끔거렸다간 나는 골로 가는 거지. 깡이 한번 통한 거야."

윤옹의 말은 '싸움은 기세'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 말은 김동회 옹의 말과 상통한다. 상식을 뛰어넘는 액션과 그 액션을 감내할 수 있는 담대함, 그것이 바로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이란 것이다.

전영선은 반상에서 거리의 싸움꾼들의 생리를 터득했던 듯하다. 거리의 파이터들이 말하는 '독기' 그것은 기세라 할 것이다. 다음의 기보 하나를 보자 1970년 김희중과의 대국이다. 바둑의 초급자가 보아도 몸싸움이 가히 예술이다. 


                              (3부.  '바둑을 넘어 저쪽'에서 계속) ==> 바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