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과 절집의 의미를 담은 책자


가을부터 겨울까지 서산에 있는 부춘산(富春山)을 십여 회 넘게 다녀왔다. 이틀밤은 부춘산 아래에 있는 절집의 스님방에서 미친 척(?) 하고 잠까지 잤다. 바둑사에 관심을 갖다보니 뜻밖의 기회도 주어져 감히 '바둑과 절집'이는 작은 논문(?)까지 출간하는 행운도 누렸다.

바둑역사의 많은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역사 속에서 바둑이 온갖 곳에 투영되어 기능해 왔음도 실감한다. 바둑과 절집의 관계도 그런 경우의 하나다.  '서광사'는 서산 부춘산 아래 있는 절집이다. 사력(寺歷)이 신라시대까지 올라가는 전통 사찰로 눈속의 사찰의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어제는 눈이 많이 와 서광사 눈보기를 위해 다녀왔다. 사진도 찍고 저녁에는 서산, 당진, 태안 바둑인들의 모임인 '원석회'의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 바둑교실 원장님, 법무사, 새마을금고 이사장 등 아마 6~7단의 고수들로 구성된 면면이 화려하다. 지역의 라이온스클럽의 회장이 총무를 맡을 정도로 격의 없이 오직 바둑사랑만을 생각하는 분들이었다.

회원 중 한분이 "부춘산이 중국에도 있지요?"라고  묻는다. 필자는 부춘산은 은둔자가 사는 곳을 말한다고 답변한다. 은둔자가 사는 곳은 어디에도 있으니 특별히 중국 절강성의 부춘산을 특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며 부연설명도 함께 드린다.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의 '부춘산거도'를 떠올린다. 황공망은 부친이 90에 얻은 자식이란(黃公望子久矣) 의미에서 얻은 이름으로 말년을 부춘강가의 부춘산에 은거한 문인이자 화가다. 황공망은 중국의 은자의 대명사가 된 '서새(西塞)'와 '칠탄(七灘)' 중의 하나인 '칠탄'의 고사가 나온 배경지의 한곳을 고른 것이다.  


황공망작품 부춘산거도


서새(西塞)는 중국의 산이다. 당(唐)나라 사람 장지화(張志和)는 학문(學問)이 넓고 문장과 그림에 능했고  말술을 들이키는 호걸이었다. 벼슬을 버리고 스스로 연파조수(煙波釣叟)라 부르(號)며 배를 타고 낚시질하는 것으로 낙을 삼아 “어부사(漁父詞)”를 남긴다. 장지화는 삿갓을 즐겨 써 그때부터 은자의 전형으로 삿갓이 등장했다.

서새산 앞에 백로 나는데

복사꽃 흐르는 물에 쏘가리는 살쪘지

푸른 갈대 삿갓에 푸른 도롱이 입으니

바람에 날리는 가랑비속에 돌아갈 곳 없어라

(西塞山前白鷺飛  桃花流水鱖魚肥 靑篛笠綠簑衣 斜風細雨不須歸)

칠탄(七灘)은 칡으로 만든 갖옷의 배경지다. 삿갓을 쓰고 갖옷을 입는 은둔자의 모습이 등장한 것이 서새산과  절강성의 부춘산 때문이다. 외지고 아름다운 산수간에 은둔하여 한 세상을 있는 듯 없는 듯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로망이 만들어낸 에피소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