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1월 경성 을지로 서촌(西村)인쇄소에서 발간된 '조선기계총람(朝鮮棋界總覽)'은 당시 조선바둑계의 전체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4백 쪽에 달하는 두툼한 책자 속에 무려 4천여 명의 조선바둑계의 회원들을 전국의 행정단위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를 제외한 13도(道)를 분류해 보면 경성이 614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경남(부산) 408명으로 결코 경성 못지 않았던 바둑붐을 보여준다(3위는 평안남도 257명이고, 최하위는 강원도 57명이다) 

경남의 바둑인의 분포는 항도 부산을 중심으로 밀양 창녕 김해 등에 집중되어 있는데 1877년 조일간의 '부산구조계조약(釜山口租界條約)'으로 부산 '초량'이 신도심으로 발전하면서 초량으로 몰리는 조선물류의 일차 집결지인 '물상객주'들의 거점지역과 무관치 않다.

초량을 중심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1895년 4천 명을 시작으로 1904년 1만여 명으로 늘어나더니 45년에는 7만여 명으로(자료. 부산상업회의소) 급격하게 늘어난다. 부산으로  일본인들이 몰려들면서 그들의 문화도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된다. 1902년 훗날 본인방에 오른 '암본훈'(岩本薰)'이 부친을 따라 부산에 와 살다가 13살때 돌아간 것도 이때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에 기원(棋院)이 생겨난 것은 사건이 아니다. 1883년 부산에 들어와 '주조업'으로 성공을 한 '금서봉삼랑(今西峰三郞)'은 1902년 일기에서 '정기원'을 기록하고 있다.

- 정(町)기원에 나와 기로회 사람 다섯 명이 모였다. 회원들의 안부와 '참사회'일을 논의하고 바둑을 두었다.

'참사회'는 당시 부산에 들어와 있던 일본거류민단의 자치기구다. 일본은 조일간의 조약을 빌미로 이미 1891년 '거류지 규칙'을 만들어 자치를 하면서 부산 안에 작은 일본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정기원에는 일본인들만 출입한 것이 아니다. 당시 일본 못지 않은 바둑의 붐이 조성되어 있던 조선인지라 바둑은 조일간의 간격을 좁히는 좋은 문화적 재료였다. 예로부터 부산은 바둑으로도 유명했다. 일찍이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이 조선제일의 바둑돌 생산지 '기장'을 자신의 문집에 이렇게 기록했다.

[검은돌은 기장고을의 십리포에서 나오고 흰돌은 동래 수영포구에서 나온다. 관아에서 부리는 아이들이 이일을 하는데 밥을 싸들고 가서 돌을 주워모아 단단한 돌에 간다. 익숙한 아이라도 하루에 수십 개를 만들 정도로 어렵다. 흑백돌이 각각 2백 알이 한 벌인데 기장관아에서만 한해 바치는 것이 1천 벌이다.

관아의 아이 20명이 1년 내내 바둑돌을 갈지 않는 날이 없다. 한 아이가 흰바둑돌 수십 개를 순백의 옥처럼 다듬는데 본(本)이 되는 돌에 맞지 않으면 버려진다. 본은 뿔을 깎아 만든 것으로 마치 주조(주물)한 것과 같다. 바둑돌 모양은 딱 이것과 같아야 한다.

一官童手待白碁數十 如削玉戴肪 猶不中本見黜 所謂本者 削角本如鑄範 色狀一祝此少違不用也.]

전국 제일의 바둑알을 생산하던 '기장'은 '이학규'나 정현덕' 등이 기록한 부산해안가의 바둑붐의 근거가 된다. 이런 역사적 기반아래 부산개항기 통영의 유지이자 애기가였던 '탁한주' 등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부산주변의 바둑붐은 더욱 크게 조성되고 조직화 된다. 탁한주 외에 주목되는 함양의 '노사초'나 '신호열' 등의 활약은 조금 훗날의 이야기다.

1917년 삼천포바둑대회를 시작으로 37년까지 통영, 창녕, 김해, 밀양 등에서 수십 차례 바둑대회가 개최될 정도였다. '금서봉삼랑'은 1902년에 부산에 바둑을 두던 기원이 있었음을 기록한다. 이 기록은 1894년 기록에 보이는 '진고개박국'과 더불어 기록으로 확인되는 이 땅의 가장 오래된  현대적 개념의 '기원'이다. 기록의 시차는 조금 있으나 '진고개박국'과 '정기원'은 거의 비슷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부산지역의 바둑은 6.25전쟁 중에도 식지 않았다. 전쟁 중에도 바둑으로 도박을 하다 헌병대의 단속을 당한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내용없는 글쓰기는 유희에 불과하고 근원 없는 샘물은 바닥을 들어내기 마련이다. 이처럼 뿌리 없는 바둑붐의 조성도 공염불일 것이다. 지방바둑이 살아야 한국바둑도 있다. 요즘에 일부 애기가들의 헌신적 노력과 지방행정의 관심으로 모처럼 지방바둑이 호황(?)이다. 전국적으로 열리는 바둑대회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런 기회를 잘 살려야 한다. 우리가 '이와모토 가오루'라 부르는 '岩本薰'(필자의 생각으로는 부산이 고향인 듯하다)을 주제로 글 한 편을 준비하다 갑자기 부산바둑에 대한 글을 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