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얼마전 한 고서경매장에 출품된 기보(碁譜)를 보고 느낀 점이 많다. 대략 120년에서 160년쯤 되어 보이는 기보가 경매에 나와 새주인을 기다리는 풍경이 너무도 쓸쓸하고 초라하여 마니아를 멋적게 했다. 기보는 표지부터 뒷장까지 24쪽이 온전한 상태로 내용파악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가품인데도 경매 시작가는 30만원대에 불과했고 그마저 낙찰이 쉽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채극문의 신정기보와 최남선의 기보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신정기보와 최남선 기보를 1백년 정도 앞서는 기보가 무관심 속에 경매를 통해 유통되고 있는 모습은 바둑사를 운운해 온 필자를 당혹케 했다. 더구나 고서경매에서 기보의 출현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관계자의 말은 충격이었다. 실제로 경매장에 최남선의 기보도 출품되어 호가 20만원에 경매되고 있었다. 

(경매장에 나온 기보 속페이지)

사실 국내에 현존하는 기보는 많다. 그동안 필자가 파악한 기보만도 20여 종 되는데 고서경매장에서 본 기보로 미루어 볼 때 이보다 훨씬 많은 기보들이 있다고 믿어진다. 아래는 필자가 파악한 국내 기보다.

1. 해남기보(전남 해남군 해남읍 조방훈 소장)
2. 민백흥기보(수원시 조성만 소장)
3. 무명씨기보(경매장 낙찰)
4. 장서각기보(3종 장서각 소장)
5. 장서각기보(2종 상희 장서각 소장)
6. 이동근기보(충남 부여군 은산면 박선생 소장)
7. 최남선기보 (조선광문회출판 국내 수십 권 산재)
8. 오세창기보 (경기도 이천시 윤형조 소장)
9. 신정기보(국내 다수 산재) 
10. 선기무고(수원시 조성만 소장)
11. 기감요설(대전중구 박세창 소장)

이의 기보들 중 1765년 민백흥 기보는 작자와 연도가 특정된 국내 최고본으로 신정기보와 최남선기보를 거의 2백년 앞선 것이다. 이동근 기보는 1826년 혹은 1888년 작으로 조선인들간에 두어진 사배자(중국식) 바둑 실전보로 한국바둑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순장바둑의 오해를 풀어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이동근 기보의 화제(畵題)가 재미있다.

- 얼마전 번개처럼 만나 두었던 바둑 한판이 꿈결마냥 떠오른다. 입으로 정기를 내어 품으며 흥얼흥얼 바둑을 두었는데 바둑을 두며 하늘을 나는 기러기를 본다는 옛말이 그런 경우다. 한손에 술잔을 들고 바둑판을 내려보다 헛수를 놓고 말았다.

극심한 가뭄에 주위를 살필 겨를 없고 백성들 농사 작파한 지 오래니 마음 조여 살피고 살아갈 방도 없다.

위의 기보들은 나름 중요한 자료들이다. 바둑에 무한한 사랑이 있고 의고(疑古)하고 의서(疑書)하는 바둑사 관심자가 나온다면 참으로 그 사람이 할일이 많다.

경매장에서 본 기보는 바둑을 대하는 조선인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한다. 바둑을 역법(歷法)의 어떤 것으로 보려한 점은 바둑을 단순 오락으로 치부하려 하지 않은 조선인의 인식의 반영이다. 우리의 바둑사는 이들 자료를 토대로 나아가야 한다. 찾아보면 자료는 많고 기보도 많다. 다만 의미를 두고 가치반영을 하지 못하는 풍토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