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북한판 조선실록을 이용한다. 10년 전 대훈서적에서 1백 질 한정판으로 수입해온 것으로 국역이 매우 정교하고 잘 되어 있고 원문이 한곳으로 모아져 있어 연구자들의 독서에 그만이다.

'민추'와 '국편위'의 국역으로 나와 있는 조선실록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 이번에 아예 새로 국역작업이 준비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 서적상이 들여온 북한판 실록은 30본 정도가 팔리고 아직도 창고에 보관되어 있으니 책을 만들고 파는 사람들의 고통이 이해된다.

필자는 조선실록에서 단서를 얻어 몇 권의 역사소설을 쓰고 '한국바둑사'라는 이름으로 바둑 기록도 정리를 한 바 있다. 실록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공부를 했고 또 놀란 적도 많다.

그 중에서 충격을 받은 대목도 있다. 그것은 연산실록에서 본 '정시열이염지'란 대목이다. 정씨를 죽여 찢어 젓을 담궜다는 말인데 진시왕도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듯하다. 그것도 자신의 양어머니를 그리했다는 것이다.

연산군 10년 3월 20일의 기록이다. 연산이 자신의 이복동생 항과 봉을 불러 먼저 잡아다 놓은 정씨를 능욕하는 장면으로 사관은 이 비 오던 날 밤의 사실을 감정 없이 기록하고 있다.

항과 봉은 정씨(鄭氏)의 소생이다.
왕이 말하길, 모비(母妃) 윤씨(尹氏)가 폐위되고 죽은 것이 엄씨(嚴氏)·정씨(鄭氏)의 참소 때문이라 하여, 밤에 엄씨·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구 때리고 짓밟다가, 항과 봉을 불러 엄씨와 정씨를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 하니 항은 어두워서 누군지 모르고 치고 봉은 마음속에 어머니임을 알고 차마 장을 대지 못하니, 왕이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마구 쳐 참혹하게 죽였다.

왕이 장검을 들고 자순 왕대비(慈順王大妃) 침전 밖에 서서 큰 소리로 연달아 외치되 ‘빨리 뜰 아래로 나오라.’ 하고 소리를 지르자, 시녀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대비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왕비 신씨(愼氏)가 뒤쫓아가 힘껏 구원하여 위태롭지 않게 되었다.

(鄭氏之出。 王以母妃尹氏廢死, 由於嚴、鄭之譖, 夜縛嚴、鄭于宮庭, 手自亂擊踐踏之, 召㤚、㦀, 指嚴、鄭曰: “撲此罪人。” 㤚暗不知爲誰撲之, 㤚心知其爲母, 不忍加杖。 王不之快, 令人亂撲, 備諸慘酷, 竟殺之。 王手劎立慈順王大妃寢殿外, 厲聲連叫曰: “速出庭下。” 甚迫。 侍女皆散走, 大妃猶不出, 賴王妃愼氏追到力救, 得不危。 王捽㤚、㦀髮, 至仁粹大妃寢殿, 開戶辱之曰: “此大妃愛孫, 所進觴可一嘗。” 督㤚進爵, 大妃不得已許之。 王又曰: “愛孫其無賜乎?” 大妃驚, 遽取布二匹賜之。 王曰: “大妃何殺我母?” 多有不遜之辭。 後令內需司取嚴、鄭屍, 裂而醢之, 散棄山野.)

언관이 불요불급한 관원들을 도태하자는 의견에 내린 비답이다. 불요불급한 관원이란 연산이 전국에 미모의 여자들을 골라 오라고 만든 조직에 있던 관원들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언관이 재변이 있다고 하여 필요하지 않은 관원을 도태하자고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갑자기 관원을 도태한다면 반드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을 것이니, 어찌 유능하지 못하다 하여 무죄한 사람을 도태시키겠는가?

누구든 죄가 있다면 삼공 육경(三公六卿)이라도 역시 용서하지는 못할 일이다. 지금 영우(靈雨) 등이 장기 바둑 두고 술에 취하여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진실로 고요(皐陶)·직(稷)·설(契)이 아니라면 누군들 과실이 없으며, 대간인들 어찌 다  과실이 없겠는가? 이렇게 한다면 재앙을 상서가 되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서를 재앙이 되게 하고 말 것이다.

사람의 선과 악을 논하는 데 어찌 다 공정하게 할 수 있으랴마는 만일 음흉하고 사특한 사람이 대간이 되어서 평생의 사사 혐의를 가지고 무죄한 사람을 공격한다면 이는 심한 폐풍이다. 대간이 사체를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말하니 옳지 않다.

(今臺諫因災變而請汰冗官。 若遇災變, 輒令沙汰, 則必有冤抑, 豈可謂無賢能, 而汰去無罪之人乎? 若有罪, 雖三公、六卿, 亦且不饒。 今靈雨等, 雖以博奕、使酒, 罷軟爲言, 苟非皐陶、稷、契, 誰無過失? 雖臺諫, 亦豈盡無過耶? 如此則非惟不得轉災爲祥, 秪自轉祥爲災。 論人善惡, 豈盡於公? 脫有陰邪之人爲臺諫, 以平生私嫌, 攻擊無罪之人, 此甚弊風。 臺諫不計事體, 輕言之不可也)

해독이 잘 되었는지는 모르나 연산의 말이 별로 틀린 말이 아님을 알겠다. 영우니 고요니 하며 상당히 어려운 말도 골라 쓴다. 하긴 연산은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연산은 아버지 성종이 이뤄 놓은 공과 위에서 제 멋대로 놀다간 왕이다. 그러나 연산이 시를 잘 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철의 절경도 노는 것만 못하고

수수한 누정에서 가을달을 바라보니

바람 이는 강에 배일랑 띄우지 마소

배 뒤집혀 위급시 누가 구해준단 말이오.

(四時街景不如遊/須賞幽臺浪月秋/莫好風江乘浪渡/飜舟當急救人唯)

연산은 광폭의 밤을 보내고 나면 어김없이 이런 류의 시를 한편씩 내 놓는다. 시를 쓰고 나서는 신하들을 불러 모아 놓고 평을 하라고 하며 지긋이 눈을 감고 평을 듣는다. 이때 신하들은 아슬아슬하다. 아양(?)이나 공치사는 곧바로 연산의 광폭한 린치를 각오해야 한다. 허튼 평은 공부가 없다 하여 또 당한다. 로마시대의 네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연산은 시를 잘 쓰고 놀기 좋아하며 바둑을 두며 후원에 암수의 말을 들여 그 교접을 음미하며 젊은 날을 보낸 탓인지 여자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 내가 연산을 거의 인사불성의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는 두 여자를 가혹하게 죽인다.

한명은 수근비라는 자신의 애첩이고 또 한명은 부왕의 총애를 받던 정귀인이다. 왕이 사람 죽이는 것도 고유 업무 중의 하나였으니 연산의 살상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연산의 사람 죽이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

수근비는 살결이 너무 희어 도화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녀는 어느 날 연산의 심기를 헤아리지 못하고 질투를 하다 광풍에 휩쓸린다. 연산은 그녀를 죽여 잘 들지 않는 칼로 발끝부터 머리끝까지를 저며 죽이라 한다. 그리고 그 살점을 한점씩 주워 담아 젓을 담그도록 한다.

연산은 자신의 양모이기도 한 귀인정씨도 죽여 젓을 담가 산천에 뿌린다. 원한이 맺혔거나 버릇없는 첩에 대한 징계로는 너무도 가혹하고 심하다. 혹자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이유를 들어 연산이 지나치게 폄하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적합하다 볼 수 없다.

조선실록은 절대로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다. 있던 그대로를 너무도 간결하고 똑 떨어지게 기록하고 있다. 중종은 연산을 별로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의 제삿날을 지켜 음복을 할 정도였다.

연산의 성적 에너지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정력이 있으니 그리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그렇지 않다. 역적의 괴수도 거열형이 너무 심하다고 하여 한 등급씩 내려 효수하던 조선이다. 그건 인정에 관한 문제다.

생각해 보라. 사람을 죽여 장을 담그고 젓을 담가 내시들에게 맛을 보게 하는 행태가 군주로서 할 태도인가. 이 기록을 연산을 더욱 죽이기 위해 써 넣은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시라. 조선의 사관들은 그 정도로 유치하지 않았다. 조선의 사관들은 사실주의 역사관이니 과학적인 역사관을 들먹이며 웃기지도 않는 오늘날의 관변 사학의 허접과는 본질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연산의 어떤 말은 너무도 정치하고 정리가 되어 있다. 당대의 최고 학자들의 훈육을 오랫동안 받은 탓이다. 성군인 성종의 왕도 교육도 한몫한다. 그런데 연산은 어떻게 이런 광신의 망종이 되었던 것일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시를 한편 읽어 보면 연산의 면모가 엿보이기는 한다. 할머니에게 올린 연산의 시다.

곱게 물들인 자하(은하수) 하늘에 닿아 있고

궁전에 꽃이 날려 휘황하니 눈부셔라

깊은 사랑 신에게 중한 줄 누가 알랴

황연히 넓은 은혜 홍군을 누리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