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가지몽의 꿈 그리고 해인(海印)

조선 위항인 홍세태는 자신의 저서에서 기장 고을에 좋은 바둑돌이 난다 기록하고 있다. 그 고장은 좋은 바둑돌이 많이 나는 탓에 매년 조정에 상물을 하고 한양의 어떤 세도가의 집에는 천 벌이 넘는 바둑 기물을 상물을 하여 고을 살림이 말이 아니라고 적고 있다. 바둑 기물로 민폐가 자심했던 모양이다.

기장은 오늘날 부산 지역의 기장을 말한다. 신동국여지람 경주부편을 보면 동쪽 바닷가에 좋은 바둑돌이 많이 난다고 되어 있고, 실제로 얼마전에 발굴된 분황사 바둑알과 황남대총 바둑알 등도 경주 부근 바닷가에서 나온 자연석으로 연구된 보고가 나왔다. 동해 바닷가에 좋은 바둑알이 많았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조선실록은 바둑 기물을 만드는 사람을 기공(碁工)이라 했다. 특별한 기공을 일러 국수(國手)라 하여 바둑 고수를 지칭한 선기(善碁)와 구분한 것은 국수라는 호칭이 바둑을 떠나 서예 도자기 기공 등의 일급 명인들을 말하는 말로 변한 탓이다.

담양 향토사는 전라도 담양에 소년암(少年巖)이 있다고 한다.
담양 사람 이영간이 담양 산골의 한 바위에서 한 소년과 바둑을 두고 있는데 호랑이 한마리가 와 바둑을 다 두는 것을 보고 돌아갔다는 것인데 그 자리에 호랑이 발자국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바둑계에 전하는 "난가'와 '규중지율'의 전설과 비슷하다. 지리산 일대에 전해 오는 최치원과 진감선사의 바둑 전설 등이 이런류다. 실사에 충실하던 유교의 교조주의는 필연적으로 상상력의 부재를 부른다. 기껏 우리땅에 전하는 바둑의 전설이 난가류의 모작에 불과한 것은 선조들의 부실한 상상력의 빈곤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향은집을 한역하며 이 생각을 교정하게 되었다. 향은집은 이장찬의 저술로 바둑에 대한 몇가지 기록을 전한다. 이장찬은 향은집에 이런 시를 남긴다.

오산에 자란 나무 잘라 자리를 잡고

서해 기도(碁島)에서 가져온 바둑알 벌여 세우니

바둑으로 보내는 세월이여

날아온 나비만이 잘 두고 못두고를 말해주네.

이장찬은 홍주 남하리에 살던 선비로 주역에 조예가 있어 호서역(湖西易)으로 불리던 사람이다(필자의 칼럼 사야기림 2회 참조).
이장찬은 서해기도(西海碁島)라 한다. 서해에 바둑 섬이 있다는 것이다. 신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지리지 등에는 서해기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동국여지승람은 한강에 기도를 전한다. 실제로 한강에는 기도라 부르는 섬이 몇개 있었던 것으로 이경재가 지은 서울600년은 증언하고 있다.

마포와 여의나루 사이에 기도가 있었다는 것인데 여의도를 만들며 그 섬을 파괴하여 지금은 흔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좋은 바둑돌이 많이 난다고 한다. 흑백돌을 모두 구할 수 있었다니 그때의 자연 환경이 그립기만 하다. 위항인 홍석모는 한양의 해상들이 작은 배를 타고 한강을 내려와 서해 바다 곳곳을 누빈다 했으니 이장찬이 말한 기도의 바둑알은 그들의 운송로를 따라온 것일 것이다.

이장찬은 기도를 실제로 있었던 섬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상의 섬으로 생각한다. 장자의 나비마냥 그의 바둑판 위를 나비가 날며 승부를 안다고 하지 않는가. 필자는 바둑의 옛 전적을 하나씩 접할 때마다 '회남자'의 글귀가 떠오른다.

-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을 때 하늘에 비가 내렸고 그날 귀신이 목을 놓고 울었다.

이 말은 귀신만이 갖고 있던 천지의 비밀이 문자를 통해 세상에 공개된 것을 뜻한다. 귀신이 자기 혼자만의 것으로 알던 천지간의 비밀을 인간과 공유하게 되어 슬퍼했다는 것이다. 회남자의 기록을 바둑으로 대치해 보면 재미있다.

- 샤먼이 바둑을 만들자 하늘이 답답해 했고 귀신은 사색이 되었다.

바둑은 문자만큼이나 역사가 긴 듯하다. 오죽하면 천지공사의 역사를 수십 년 간 공부하여 무불통지했다는 증산교 창시자 강일순마저 바둑이 하늘의 비밀을 간직한 해인이라 했을까.

문자가 천지의 비밀의 공개라면 바둑은 천지의 무엇을 담아낸 놀이인 것일까. 강일순은 이런 알 듯 말 듯한 시를 지었다.

요임금 아들 단주가

바둑판을 받을 적에

후천운수(後天運數) 열렸으니

해원시대 기다리란

분부 아니 받을소냐.

바둑이 주역으로부터도 자유스럽지 못하다는 필자도 여러번 말한 바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주역의 대가들의 멘트를 소개한 글에서 말이다. 바둑의 섬 기도... 올 여름에는 그 섬을 찾아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