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닦인 청동거울에 달빛이 찾아왔는데 반사되는 빛의 여운이 소리의 높낮이를 조정한 듯 싶었다. 창밖엔 가을이 깊어진 탓에 소슬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다가와 한결 빈 가슴이 허전했다. 저런 곡이 월경(月鏡)인가. 마음을 갈가리 찢어 희부연 하늘에 날려 보내는 애소 띤 저 곡이 월경인가?
피리소리를 좀 더 가까이 들으려 문섶에 다가간 미실의 마음을 알았는지 사사는 어느 틈에 나가 보명궁을 찾아온 설원랑을 데려왔다. 사사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궁주님, 설원랑 부제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뫼시게.”
설원랑이 방으로 들어와 방안 중앙의 원탁에 앉자 미실은 그 반대편에 앉으며 미소를 띄웠다.
“부제께선 중원소식을 듣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글을 쓰는 것과 음률을 익히는 것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요?”
“글 쓰는 데엔 서예(書藝)처럼 일정한 법식이 있지요. 이른바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고 하나요. 그렇기에 글을 쓰는 이의 사랑법은 바로 ‘기승전결’이랍니다. 그런가 하면 음률을 아는 이의 사랑법은 글 쓰는 것과 다른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지요.”
“오호, 그래요?”
“시생은 음률을 다루기에 궁상각치우의 사랑법을 배웠습니다만 그것을 사용한 것은 한 번도 없습니다. 마음이 스산할 때면 피리(笛)를 벗 삼아 그 옛날의 영웅들을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부제께선 영웅들을 회상하며 그들을 악기의 구멍 안에 넣은 채 유희를 즐기는 군요. 소리마디를 짧거나 길게 하는 건 무슨 묘법이 있나요?”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사랑을 나누는 데도 자신이 세운 조건이란 게 있습니다. 말을 잘했던 소장(蘇張)과 같은 이는 상대방이 자신의 그물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마음을 열었고 장수된 자는 적과 대치하여 무릎을 꿇리는 방법에 용기백배했습니다.”
설원랑은 악기를 왼손에 잡고 있었으므로 오른손으로 원탁 위의 찻물을 홀짝이며 입안을 적셨다. 그 모습이 한 마리 청학(靑鶴)처럼 목마름을 가볍게 처리한 듯 보였으니 미실로서는 여간 흥미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세상의 사내들. 그들은 사람인지라 허기지면 음식을 찾아 술과 안주를 먹고 자신있게 떠든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을 오합지졸로 보고 스스로가 천군만마를 거느리는 대장군인양 떠든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를 듣는 양 귀를 곧추세우지만 그렇다고 얘기에 주목하진 않는다. 왤까? 그게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관심사는 뭔가?
글 쓰는 이의 관심은 자신의 글을 많은 이들이 즐겨보는 것이라면 음률을 즐기는 이는 자신이 토해내는 한(恨)의 알갱이들을 상대가 짓씹어주길 바란다. 그래야 토출되는 물방울같은 알갱이 속에 들어가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궁상각치우에서 수리(數理)를 보는 것 역시 사랑을 아는 이의 힘과 같은 것이다.
사회와 문화가 변하고 예전과 달리 월성에 사는 이들의 의식이 변하고 좋아하는 가락도 빠르거나 늦게, 또는 서정적이거나 서사적 음률로 바뀌지만 수의 이치는 결코 변함없다. 이를테면 궁이나 상, 각이나 치, 그리고 우의 음계가 각기 다르듯 음률의 고저 장단에 사랑법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중원인들이 혀끝에 달고 있는 ‘일도이비삼첩사처(一盜二婢三妾四妻)’는 첫째가 바람을 피우는 상대요 둘째가 집에 있는 하녀요 셋째가 첩이며 넷째가 부인이라는 색도(色度) 순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생도 노래하는 가기(歌妓), 몸을 파는 창기(娼妓), 춤과 시문을 논하는 예기(藝妓)가 있듯 신라에도 유녀(遊女)니 상녀(商女)라는 등급이 있고 소유하는 색깔의 천이 있고 보니 중원과 마찬가지로 1품이니 2품의 구별이 엄연했던 것이다.
기생들이 현학금을 울리면 중원의 화류계에서도 시를 잘 하는 기생, 즉 예기들이 나름대로 사랑법을 개발했었다.
훗날에 알려지기로는 당나라의 두보(杜甫)나 백락천(白樂天) 등과 함께 시를 주고 받은 설도(薛濤)나 어현기(魚玄機) 등이 있었고, 송나라 때엔 휘종(徽宗)을 끌어들인 이사사(李師師)가 황제로 하여금 땅굴을 파 자신을 찾아오게 했었다. 그 중에 멋있는 시를 쓰며 음률을 아는 이가 있었는데 당나라 평강리(平康里)의 명기 조란란(趙鸞鸞)이었다.
그녀를 찾은 사람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서슴없이 ‘규방오영(閨房五詠)’이란 말을 사용했다. 이것은 검은 머리, 눈썹, 입술, 유방, 손가락 등의 여체미를 노래한 것인데 유방에 대해 부른 노래 가운데 ‘목욕한 뒤에 그리운 님의 손장난 하는 곳’이란 구절은 달콤한 시정(詩情)이 넘쳐나는 것이다. 규방오영은 수나라 때도 유행했기에 중원을 오가는 사신을 통해 알고 있었으나 그게 궁상각치우와 궁합이 맞아떨어진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소장(蘇張) ; 소진과 장의
▲규방오영(閨房五詠) ; 잠자리에 든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 다섯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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