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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일]구도자의 아름다운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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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그러니까 정확히는 11월 15일의 날짜로 노기사 한 분이 한국기원을 떠나셨습니다.
이강일 5단.
1921년생이시니 우리 나이로 여든넷의 고령이십니다.
조남철 9단보다 두 살이 연상이시라 하니, 이강일 5단께서는 우리나라 202명 프로기사 중 과연 최고령의 기사셨습니다.
 특별한 지병이 계셨던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바둑에 대한 애정이 돌연히 식은 것도 아닐 터인데 이처럼 훌쩍 현역에서 물러나신다 하니 의아함에 앞서 걱정부터 듭니다.
혹시 정말 어딘가 우리가 모르는 편찮으신 곳이 있는 것은 아닌지 ….
김태현 사범님이 그러하셨고, 고광락 사범님이 또한 그러하셨으니 자라보고 놀란 속 솥뚜껑만 봐도 벌렁벌렁 할 밖에요.
그저 저녁진지 잘 드시고 아랫마을 마실이라도 나가듯 ‘다녀올게’하는 얼굴로 한국기원을 나섰던 분들, 그리도 건강하신 모습이었건만 뜻밖의 부음 소식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얼마나 철렁 뒤집어 놓으셨던지요.
1959년 11월에 입단하셨으니 이강일 사범님의 프로기사 생활은 꼭 45년이 됩니다. 11월 제10회 입단대회로 윤기현 9단이 입단 동기셨지요.
전북 전주 분으로 젊은 시절 스승은 뜻밖에도 조남철 선생이셨습니다. 두 점 정도의 치수로 많은 지도대국을 두었다고 합니다.
이강일 사범님의 입단 이후 궤적은 그리 선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입단 7년 만인 66년에 2단이 되었고 70년에 3단으로 승단했습니다. 다시 7년 후인 77년에 비로소 4단에 올랐는데, 장장 13년이란 긴 세월동안 4단에 머무신 뒤에야 비로소 90년, 5단이 되셨지요.
은퇴하실 때 5단이시니 햇수로 14년.
결국 4단의 13년 기록(?)은 손수 깨신 셈입니다.
1978년 제4기 기왕전 본선에 진출해 그해 기도문화상 감투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일평생 바둑의 길을 걸으며 한결같은 자세로 기사들의 모범을 보였다 하여 1996년에는 바둑문화상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굳이 이 자리에서 그분의 프로필을 지면을 낭비해 가며 적어 보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고 사실상 드러난 그 분의 행적은 이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극심할 정도로 ‘심플’하기만 한 이강일 사범님의 프로기사 이력서.
도전기는커녕 본선 무대 한 번 후련하게 오른 이렇다 할 기억이 없지만, 45년간 단 한 순간도 프로기사로서의 품위와 자부심을 놓아 본 적이 없는 분.
오히려 심풀하기에 이강일 사범님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강일 사범님의 트레이드마크는 기보용지 한 장이었습니다.
대국이 있는 날 오후면 언제나 한국기원 사무국에 들르시곤 “나, 기보 한 장만 주게” 하셨지요.
매번 드리는 일이 번거롭기도 하고, 또 한 장 덜렁 드리기엔 손이 야박한 듯 보여 한 묶음을 건네면 늘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한 장이면 되네.”
사무국 구석 소파에 앉아 기보용지에 그날의 대국을 꼬박꼬박 기록하며 군데군데 인상을 찌푸리시기도 하고, 잠시 펜을 멈추고 사색에 잠기시기도 하고, 쯧쯧 혀를 차시기도 하십니다.
“하아! 내가 왜 이렇게 두었을까나 ….”
그렇게 차곡차곡 패국(승국은 거의 없지요)의 기보를 적어 나가셨던 여든의 노 기사님. 입회라도 맡으실라 치면 아침 일찍부터 지팡이 짚고 나와 대국장 한켠을 조각상이라도 된 듯 앉아 지키셨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의 삶을 바둑이란 거울에 비추어 ‘반상의 구도자’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수행하듯 보낸 45년.
이제 그 분은 손을 들어 우리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보내오고 계신 것입니다.
⊙ ⊙ ⊙ ⊙ ⊙
며칠 뒤 이강일 사범님의 모습을 한국기원 앞에서 뵈었습니다.
직원 몇 명과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
사범님은 길에 서서 택시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기까지 석 대의 택시가 그분을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두 대는 멀찌감치에서 노인의 모습을 보고 오던 속도 그대로 지나쳤고, 한 대는 설 듯 말 듯 하다가 사범님 면전에서 가속기를 밟아 달아나버렸습니다.
젊은 시절 매처럼 당당했을 사범님의 풍모. 하지만 여든다섯 노인의 허리는 구부정히 휘었고 동선(動線)은 늘어져버렸습니다.
사범님은 자신을 지나쳐버리는 택시를 향해 아무런 동작도 취해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보시지도 못한 듯 두 손을 지팡이 머리 위에 얹은 채 길 건너편을 향해 무심한 시선을 던지고 계실 뿐.
보다 못한 직원 한 사람이 사범님 곁으로 다가가 택시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이라 해서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택시기사는 직원에게 화를 버럭 내고는 다시금 혼자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기사가 화를 낸 이유는 “왜 당신이 탈 것도 아닌데 세우느냐.”는 것이었지요.
우여곡절 끝에 한 대의 택시를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사범님은 그제서야 택시에 오르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길옆에 선 채 사범님이 택시에 오르시고, 우리를 향해 미소를 보내오시고, 이윽고 차 문이 닫히고, 택시가 소음과 함께 멀어져가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인상 깊은 영화의 마지막 크래딧이 오르는 순간처럼, 우리들의 가슴을 잔잔히 흔들고 있었습니다.
“바둑을 사랑하나? 그렇다면 후회없이 사랑하게.”
이강일 사범님,
내내 건강하시고 가끔은 기원에도 들러주십시오.
사범님을 위한 따뜻한 차 한 잔은 언제라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기보 용지 한 장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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