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날 - ‘수(水)’라는 글자의 비밀

궁 안 내명부에서 중전마마 다음 자리는 숙의 문씨(淑儀 文氏)였다. 상감이 중전마마와 혼례를 치르기 전부터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눴으므로 내명부 살림살이는 직접 나서지 않는다 해도 훤히 꿰뚫는다는 능구렁이였다. 그런 그녀가 상감과 함께 늙어가면서 슬하에 두 옹주만 있게 되자 하루에도 열두 번씩 조바심치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를 추종하는 무리 중에 소용(昭容) 장씨가 있었다. 장씨는 숙의 문씨와 같은 고향으로 그 집안이 자식을 잘 낳는다는 얘기를 듣고 궁으로 데려왔었다. 고향 사람이자 먼 친척뻘이라하여 궁에 들어왔을 때, 문씨는 이상야릇한 말로 그녀를 긴장시켰다.

“지금 내의원에 봉사(奉事)로 근무하는 이가 우리 집안의 먼 친척이다. 벼슬 직제로 본다면 내의원 도제조 역시 남이라고 할 수 없으니 나와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가깝다 할 수 있다. 지금 조정은 고약한 중전의 패거리들이 궁 안을 온통 자기네 세상인 양 진을 치고 있다. 상감께선 이들을 두고 보시지만, 나라의 장래로 볼 때는 더 이상 방관치 않을 것이다.

우리가 내명부에 뿌리를 내리려면 무엇보다 중전의 세를 꺾어야 한다. 그렇게 하자면 중신들을 규합해 우리의 세를 늘리는 것도 방책일 수 있으나 보다 확실한 것은 중전의 몸에서 왕자 아기씨가 탄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상의 연치가 적지 않은 데다 일본의 기승이 하루 다르게 거칠어지고 있으니 언제 마음이 편해 합방할 수 있겠는가. 내의원 도제조 대감에 의하면 향후 주상께선 마음의 병으로 여인네를 가까이 할 수 없다 했다. 그러니 앞으론 회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냐.”

“하오면?”

“그렇다고 내의원에 손을 넣어 좋은 약재로 탕약을 만들어 주상의 건강을 회복시킨다는 게 얼마나 맥없는 짓거리냐.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하고 뒷짐진 채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방법이 있습니까?”

“없는 건 아니네.”

“말씀해 주십시오, 문숙의 마마님.”

“내가 아는 바, 자네가 궁에 들어와 주상을 뫼신 것은 열 달이 채 못 됐다 들었네.”

“아닙니다. 열 한 달이 됐습니다.”

“아니야, 자넨 고작 아홉 달이 됐어. 그래야 얘기가 되니까. 상선으로 있는 이공수 내관이 계집 하나를 주었는데 그 애가 상감을 모신 것이 아홉 달 전이라 했네. 그렇다 보니 이내관에게 은밀히 청을 넣어 그 아이가 받은 반지(環)를 가져오라 하였는데 아무래도 말을 듣지 않아 부득이 죽일 수밖에 없네.”

“예에?”

“대를 위해 소가 희생되는 건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야. 다행히 이내관이 내 청을 들어준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자네의 오라버니가 형부(刑部)에 있다 했으니 궐자의 손으로 입을 막아야겠네. 그러니 즉시 내 처소로 보내주게. 내 섭섭지 않게 대접할 것이야.”

이날 밤 이내관은 자신의 처소에서 목이 졸려 죽은 후 자액(自縊)으로 위장 돼 대들보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다. 경위원에서 순검들이 곳곳을 조사하던 중 경기감영으로 파견된 탁일환이 돌아왔다.

“죽은 자는 은장이 노인 최씨인데 요근래 마음 씀씀이가 넓어졌답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술 인심이 넉넉해지고 자신이 만든 물건을 며칠 후 전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답니다.”

“물건을 만들었다?”

“술자리에 합석한 사람들 얘기론 반지일 것으로 추정합니다만, 익사한 노인의 몸엔 그런 물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죽기 전 어찌나 왼손을 강하게 쥐었는지 이상하게 생각하여 손을 부드럽게 만든 후 펼쳤더니 안에서 나온 것은 기름종이에 배월붕반(配月朋半)이란 일자(日字)가 적혀 있고 그 뒷장엔 ‘물 수(水)’ 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물 수라?”

물에 빠져 죽는다는 의미가 아닌 바에야 물 수 자가 쓰일 리 없다는 점에 그 뜻이 상당히 미묘했다. 그러나 궁에 다녀온 정문원이 ‘자경전이 동북간에 있다’는 말에 장율하는 손바닥을 소리나게 쳤다.

그는 은장이 노인이 손에 쥐었다는 글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일자를 나타내는 글씨는 상대가 말한 것이고 ‘수(水)’ 자는 은장이 노인이 쓴 것으로 생각됐다. 왜냐하면 노인은 자신이 위급에 처한 것을 알고 ‘수’자로써 무엇을 알린 것인데 이것은 동북간(東北間)을 나타낸 단어였다.

즉, 수(水)자에서 동북간은 오른쪽 두 획이지만 나머지는 한 획이다. 조정에선 동북간 사업은 금지시켰었다. 이 방향엔 대비전(大妃殿)이라 부르는 자경전이 있었다. 그런데 수 자와 함께 쓰인 ‘배월붕반(配月朋半)’은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장율하가 화들짝 놀라 튕기듯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