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룡'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 기보(棋譜)가 유행했다 했다. 조희룡은 '권련번' '대소철망' 등 돌아다니는 기보집이 수십 종이라 했다. '기보'는 바둑의 실전을 기록한 모음집이자 기력을 돕기 위한 학습서로 명나라 청나라는 물론 조선 일본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최남선은 조선의 전기(前期) 고수로 '유희춘'을 말한 적이 있다. 유희춘이 왜 고수였는지에 대한 논지는 생략되어 있으나 유희춘의 문집 속에 '윤후가 고쳐준 기보'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닌 듯하다. 유희춘은 분명 기보를 말하고 있다. 이미 조선전기에 바둑의 이해를 돕기 위한 책의 존재가 있었다는 반증인 셈이다.

다산 정약용도 기보를 증언한다. '죽지시사' 동인인 '한혜보'에게 바둑시를 한 편 써주며 다산은 후기를 적고있다.

- 장맛비가 열흘을 계속되니 형은 건(巾)도 쓰지 않고 버선도 벗고는 맨머리 맨발로 의자에 앉아 기보를 펼쳤다 접었다 하며 늙어가는 것도 잊고 있겠구료. (다산시문집)

다산이 말한 기보는 현현기경 류의 사활집이나 '혁가보' 등의 명청시대의 고수들의 대국보일 것이다. 사고전서에 수집된 명청시대의 기보는 수백 종이던 시대니 한혜보가 기보를 보며 바둑을 연구하는 장면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기보는 조선후기에 오면서 바둑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져 있었다.

바둑을 성호 이익과 함께 가장 악랄한 평을 한 바 있는 '이덕무'조차도 기보를 보며 바둑을 공부하는 아이러니가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다. 이덕무는 자신이 다 본 기보를 친구에게 주며 고상한 덕담을 첨부한다.

- 내가 보던 기보를 그대에게 줍니다. 1년 360일로 바둑판을 삼고 나의 재업과 연기(年紀)로 상대를 삼아 삶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삼는다면 재업도 힘을 얻고 만사도 돌보아져 능히 삶에 이기는 사람이 될 듯합니다. (청장관전서)

이덕무의 말은 성리학의 기본서인 대학(大學)을 '본말은 바둑판이요 삼강과 팔목은 바둑알이다'라고 비교한 '이상정'의 바둑인식을 고스란히 담아낸 말이다. 조선의 지식인들 중 기보를 말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정조임금까지도 기보를 언급한다.

정조는 '무예도보통지' 편찬에 즈음하여 군사의 운용법이 '기보'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조선후기 바둑의 기보는 바둑인들의 개인적 호사에 그치지 않고 책자로 만들어져 바둑인들과 주변인들의 이해를 돕고 바둑의 보급에도 활용되는 시대였다.

필자는 조선의 바둑을 연구하다 장석각에서 몇권의 기보집을 찾았았다. 기보집은 조선 바둑의 실마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바둑판과 기보작성법 그리고 바둑의 용어 등을 보여주며 몇 판의 실전보도 전해준다. 기보집에는 바둑용어가 32가지가 있다고 한다. 바둑판의 설명과 기보작성 요령도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그중 현대바둑에서 말하는 집을 한번 보자.

기보집의 한페이지.

- 취는 집이다. 바둑에서 (상대의) 눈을 빼앗는 것을 집을 못짓게 한다고 한다. 파호할 수 있는 집의 모양은 3집부터 6집까지다.

(聚集也. 凡碁有未合眼者反聚而點之有三聚四聚五聚六之類也)

오늘날 우리가 집(家)으로 알고 있는 집은 모일집(集)이었다. 위의 문장에 보이는 점(點-찍을점)은 파호(破戶)다. 자료는 분명 점파야(點破也)로 되어 있다. 눈이 되는 자리에 착수를 하는 것을 점이라 한다. 그러고 보면 취(聚)나 점(點)의 사전적 의미로는 해석하기 힘든 사례다. 오늘날 중국의 바둑에서 매화육궁을 취육(聚六)이라 하는 것도 참고가 될 듯하다.

자료는 입(立)을 말한다. 입은 세우다는 의미다. 남치형은 중국식 용어로 입을 내려서다로 정리한다(바둑백서). 자료의 설명은 이렇다.

-입은 내려서는 것이다. 변에서 아래로 내려서는 것을 입(立)이라 한다.

(立歷也. 沿邊而下子曰 立.)

입의 사전적 의미는 '서는 것'이다. 설문해자도 사람이 땅위에 서있는 모습의 회의(會意)라 했다(大人也.地也.會意). 서다는 의미와 내려서다란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취(聚)의 의미도 설문해자는 포로를 취하는 것으로 본다. 모으는 것이나 잡는 것을 의미한 글자다. 이런 의미에서 취는 집으로 본 듯하다. 집을 호(戶)로 계산하는 집(家)으로의 변화가 흥미롭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가 출간한 책자가 있다. 일본식 한자와 조선식 한자를  분류한 자료로 가족(家族)을 일본식 한자로, 식구(食口)를 조선식 한자로 분류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갑고 소중스럽게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가 일본식 한자용어였다는 것이 놀랍다. 식구(食口)는  밥을 먹는 입이란 의미로 가족공동체를 인식했던 선조들의 생각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많은 것이 일본의 강점기에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식구가 가족으로 변하고 집(集)이 집(家)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알게모르게 그 바뀐 세상에서 그저 우리의 것이니 하고 산다.

광은 빠르기다. 두개의 (판단) 길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벌판이나 골짜기를 빛이 내려쪼이듯  해야(빨라야) 한다.

(光簽也. 兩路斜簽而下子曰者光便有顧之意也.)

빠른 수읽기는 바둑의 역동성을 잘 표현한 말이다. 빠른 수읽기로 국면을 장악하고 리드하여 승기를 잡는 고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둑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당대의 고수 조훈현의 빠른 수읽기를 빗대어 제비라는 별명으로 예우한 것도 이유가 있다. "바둑은 연결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바둑교실에 처음 입문하면 선생이 학생에게 하는 말이다. '기보'는 연결을 말한다.

점은 연결이다. 상대의 돌을 끊기 위해 나의 돌을 연결해야 한다. 이것이 점이다.

(粘連也. 彼欲以子斷之我卽以子連之故曰粘)

간혹 옛기록에 보이는 '붙을 점'자를 놓고 순장식 바둑의 배석으로 보는 등 혼란이 있었으나 '기보'는 점을 연결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점자를 연결로 보는 것이 타당하냐 물을 수 있겠지만 '붙다'와 '연결'은 같은 의미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기보'는 연결을 방해하는 용어로 찌르다(刺)를 든다.

자는 찌르는 것이다. 연결하는 (상대)의 돌 사이로 끼어드는 것을 말한다. 전쟁에서 창칼을 들고 적 사이로 뛰어들 듯 상대의 눈을 없애는 것이다.

(刺刺也. 蓮子而直入曰刺若戈戰之傷此亦之無全眼也)

바둑에서 상대의 두눈을 파호하는 방법을 찌르다의 의미로 보는 것은 바둑을 전쟁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많은 자료에는 바둑과 병법을 연결지어 논하는 기록이 많은 것도 이런 인식 때문으로 본다.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는 백병전이다. '기보'는 이 백병전을 과전(戈戰)으로 표현한다. 그러고보면 반상에서 벌어지는 쟁투는 생사를 가르는 백병전의 모습이다.

백병전은 육박전이고 육박전은 개인과 개인의 싸움이다. 싸움꾼은 눈이 좋고 마음이 담대한 자질의 소유자가 일류 싸움꾼이 될 가능성이 있다. 조훈현은 바둑의 고수는 수읽기와 승부호흡이 가늠한다고 했다. 백병전은 빠른 눈과 담대한 마음가짐을 필요로 한다. 전쟁과 바둑은 이런 점에서 닮았다.

바둑의 용어 중에서 가장 멋진 용어는 행마(行馬)가 아닌가 한다. 행마는 바둑의 용어를 떠나 세상사의 한 덕목을 지향하는 말로 차용되어 쓰이기도 한다. 행마는 저포(著捕)에서 나와 바둑으로 들어와 바둑의 용어로 정착한 것이기는 하나 중국 장기나 조선 장기의 옛문헌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지는 용어이기도 하다.
'기보'는 행마를 이렇게 말한다.

행은 움직임이다. 돌을 서로 연결하는 것이 행으로 (상대)로 인해 돌이 끊어지는 일이 없게 하는 움직임이다.

(行行也. 連子而下曰行 使有粘連不斷之結也.)

'기보'에서 말하는 행은 돌의 운용법을 말한다. 나의 돌의 움직임은 나의 돌의 형세를 고려하고 상대에게 즉각적인 차단이나 침입 등을 방어하는 움직임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날일자 행마나 눈목자 행마 등이 이 함유에 들어있다. 바둑에서 좋은 행마란 나의 세력을 키우고 상대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는 움직임인 것이다.

행마의 의미를 보여주는 옛 기록은 의외로 많다. 기보에서 말한 '집'도 그러하다. 기보는 집을 취(聚)와 집(集)이라 한다. 이것을 '동엄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엄집은 구한말 사람인 '정환직'의 저서로 기국문(碁局文)이 들어있다.

그대의 집을 보니 개구리 때의 모습이고 그대의 집을 세어보니 거북이 집마냥 작구나.

(觀厥形聚同蛙附/ 數兩戶少如龜玆)

집은 취와 집(聚集)이고  그 집을 세는 것을 수호(數戶)라 했으니 '기보'에서 말하는 32가지 바둑용어는 조선후기에 넓게 쓰이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끊는 것은 좇는 것이다. (상대를) 좇아 두개로 나누는 것, 이것을 끊는다고 한다.

(斷攺也. 攺之以爲二曰斷.) 개: 역괴 쫒을 개.

상대의 말을 양단하는 것을 좇는다는 의미로 본 고대의 바둑용어는 조금 생소하다. 시간을 두고 조금씩 변하는 것이  언어라고 보면 이해가 된다.

오늘날 우리는 더할나위없이 정리된 바둑의 용어를 대한다. 이론도 잘 정리가 되어 있어 더이상의 의문이 없을 듯한 시대를 산다. 그러나 오늘의 정리정돈 속에서도 무엇인가 미진한 것이 있고, 그 미진한 것이 어떤점에서는 치명적인 것인데도 짐짓 외면하며 넘어가기도 한다. 귀곡사와 같은 경우가 그것이다.

'기보집'은 혁가십결(奕家十結)로 위기십결을 말한다. 위기를 '혁가'로 말한 대목은 바둑이 동양삼국에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장석각 기보집은 연구가 더 필요한 자료다. 특히 바둑사 분야가 취약한 싯점에서 이 기보집의 등장은 주목된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