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 기사(碁師)의 노래
2 도사쿠 바다 너머와 악수를 하다
3 진정한 바둑마니아
4 오가사와라에서 만난 김옥균
5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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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오로 창사10주년기념 특집칼럼
3편. 진정한 바둑의 마니아

도사쿠의 세계를 향한 시선이 잘 드러난 것 중 하나가 '적정록(適精錄)'이다. 적정록은 일-중 간의 바둑교류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보(碁譜)'로 일본 승려 허중(虛中)과 명나라 바둑인 임응룡(林應龍)이 뜻을 모아 1525년 강소성에서 출판을 한 20권의 거질로서, 대략 900도(圖)의 묘수풀이와 천문, 역학의 시선으로 바둑을 주시한 '역저'다. 적정록은 이후 일중 간에 보급되었다가 양국에서 권수가 망실되어 온전한 '저본'이 존재하지 않은 채로 20세기에 접어들어 뜻있는 바둑인들의 애를 태우던 책이다.

이후 적정록의 완전본이 복간된 후 안 사실이지만 도사쿠가 발견한 수로 알았던 많은 수법이 적정록의 내용이었던 것이 밝혀질 정도이고 보면 적정록의 가치를 짐작할 것이다. 이 적정록을 복원해 낸 사람이 오가와다쿠지(小川琢治, 1870-1941)다. 이 사람은 아마추어 바둑인으로 일본바둑은 물론 세계바둑 이론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소천'은 지리학자로 바둑사에 관심을 기울여 '1932년에 '중국 위기의 기원과 발달'이란 탁월한 논문을 발표한다. 

적정록
 

소천은 동양의 바둑계에 떠돌던 온갖 전설류의 바둑기원설을 일축하고 기왕의 비과학적인 학문 방법에서 탈피하여 바둑의 기원에 대한 유희사(遊戱史)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그는 한중일의 모든 고전을 뒤져 바둑의 기원과 발전사를 수집 정리 해내어 후학 '향천충부(香川忠夫)'로부터 "바둑에 관한 소천과 같은 연구는 다시 있기 힘들 것"이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소천의 논문 '중국 위기의 기원과 발달'이 나온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그의 연구를 능가하는 바둑의 기원에 대한 논문이 없는 실정이다.

소천에 의해 동양사 전반에 쌀에 모래알 끼듯 걷돌기만 하던 바둑의 고기록들이 한곳으로 모아졌고 정리가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그러나 변방의 유희로만 믿어지던 그동안의 바둑을 역사 연구의 과제로 견인한 공이 있던 소천도 바둑의 기원에 대한 결론은 내지 못하고 그저 "일찍이 성립하였다"라는 추론만 했다.

소천의 이 토로는 오늘날 한중일의 바둑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소천의 이 토로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중일 바둑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소천은 그의 논문에서 바둑의 기원을 '일찍이 성립했다'고 했지만 논문 속에는 한가지 주목되는 주장이 있다.

- 8도의 반상에서 국희(局戱)의 일종으로 출발한 것이 위기로 생각된다.

소천은 바둑의 최초의 모습이 8도의 반상 위에서 말을 움직여 게임을 하던 국희와 비슷한 형태로 출발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8도 반상은 중국 곳곳에서 발굴되는 13도, 17도 바둑판의 진화에 대한 역탐구로 이해가 되는 것이었고 이를 중국의 학자 장녀안(張如安)은 "중국 최초의 정형화된 바둑은 13도부터다. 13도 바둑은 초보적인 개념의 현대적 바둑을 둘 수 있다"며 소천의 설을 옹호했다.

오늘날 후대의 가감없이 현실적으로 고대 바둑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은 한대(漢代) 양릉(陽陵)에서 발굴된 바둑 도편(陶片)과 망도 1호분에서 나온 17도 석국(石局)이다.

이 한대의 바둑판을 검토한 중국의 역사학계는 중국 바둑이 한대에 이미 현대 바둑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보고 있다.

한대(BC 206~AD 220)에 이미 현대적인 개념의 바둑의 형태와 수법이 있었다면 바둑은 훨씬 이전부터 기능했던 것으로 보야야 한다. 이곳에서 바둑의 문헌이 필요하다. 기왕의 바둑 문헌들은 분명 한대 이전을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문헌이 수집되고 정리된 시기는 한대보다 훨씬 뒤이고 가감 첨삭 부회가 끼어들어 연구자들을 괴롭힌다.

중국의 바둑의 대명사인 위기(圍棋)가 처음 기록된 문헌은 양웅의 '방언'이다. 양웅은 서한 사람이니 중국에서 발굴되고 있는 고대 바둑판들과 같은 시대 사람이다. 한나라 보다 앞선 시대의 바둑을 기록한 문헌은 '좌전'이다. 좌전은 '말을 둘러싸 잡아 먹는것이 위기다'라 기록하고 있다.

좌전이 말하는 양공(讓公)은 전국시대 사람이니 바둑은 이미 전국시대에 말을 둘러싸 잡아 먹는 게임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공자 맹자의 '박혁'이 바둑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는 연구가 나오기는 했지만 당시에 바둑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 춘추전국시대를 전후로 바둑을 전하는 기록은 장화의 박물지다. 박물지는 지귀(知鬼) 소설로 잡박한 책이고 전하는 저본도 후대의 위서다. 그나마 전하는 저본 속에 바둑 기록은 있지도 않다. 그러나 이 박물지 속에서 요임금이 어리석은 자식을 위해 바둑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어 바둑의 요순설이 나온다.

논리도 신빙성도 전혀 없는 요순설은 하도설, 용성공설, 천문설, 종횡가설 등 그저 호사가들이 한번 해본 소리에 불과한 잡설들을 낳게 한다. 전혀 학문적이지 않은 농담(?)이 바둑 기원설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소천은 바둑사에 쌓인 이런 잡풀을 걷어내고 '한대 이전 8도 반상 국희설'을 바둑의 기원으로 생각해내는 성과를 보여준 사람이다. 그러나 필자는 '소천'의 바둑이론보다도 그의 바둑에 대한 진정성에 감탄하고 탄복했다. 아니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적정록 서문


소천은 일본에 각권으로 분리되어 정리 없이 흘어져 있던 적정록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복원의 방법은 낱권을 사들여 권수를 맞추는 방법이었다. 각고의 시간과 경비까지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적정록 총권수의 3분의 2를 수집해 놓고 타계하고 만다. 중국에도 적정록은 낱권과 반절본만 존재할 때였다. 그러나 소천의 꿈은 헛꿈이 아니었다. 그의 아들 가이쓰카시게키(見琢茂樹)가 기어이 아버지의 유훈을 이룬 것이다.

사학자였던 '견탁'은 아버지의 유훈을 새기고 있다가 '사고전서' 속에 적정록의 일정본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동생이면서 중문학자였던 오가와다마키(小川環樹)와 함께 나서 아버지가 끝내 복원해내지 못한 적정록 20권을 찾아내어 결본 없는 완전본을 1970년 출간을 해내는 저력을 보여준다. 소천탁치의 삼자(三子) 유기와히데키(楊川秀樹)는 물리학자로 동양인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학구열이 대단했던 집안내력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바둑인들은 오청원을 잘 알아도 '소천탁치'는 모른다. 그것이 마니아의 업보인지도 모르겠다.

일본바둑의 힘은 고수와 마니아들의 상생의 힘이다. 마니아는 바둑고수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리고 바둑고수들은 그런 마니아를 존경하고 사랑하기를 마다치 않았다. 어느 일방의 사랑과 존경만으로 그런 풍성한 문화를 이루기는 힘들다. 오늘날 한국바둑계의 고질적인 문제를 생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본인방 '수영'이 바둑마니아 김옥균을 존경하고 사랑한 이유를 알고나면 더욱 실감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