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영민은 안대가 가려진 채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영민의 얼굴은 피떡이 된 상태였다. 코뼈가 주저앉았는지 시끈거렸지만 당장은 그것보다도 숨이라도 제대로 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영민의 양옆에는 덩치가 산만한 남자 두명이 좁아터진 뒷좌석을 거의 차지하고 앉아 영민으로서는 옴짝달싹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이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영민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1시간 전인가, 아니면 2시간 전?...
눈이 가려지자 시간 개념도 희미하다.
어쨌든 마지막 기억은 기원을 끝내고 주차장에서 차를 타려는 순간이었다.
“고영민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덩치가 산만한 남자 두명이 서 있었다. 그들이 누군지 한눈에 짐작할 수 있었다. 박회장이 보낸 사람들이다. 영민은 온몸에 긴장감과 소름이 돋았다.
“고영민씨 맞죠?”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전 고영민이 아닙니다.”
영민은 태연하게 차를 타려고 했다.
“어허...이러면 곤란한데...”
덩치가 차를 타려는 영민의 어깨를 잡는 순간 영민은 비호처럼 몸을 돌려 주먹을 날렸다. 주먹에 살기가 묻어 있었다. 살기 위한 필사적인 주먹이었다. 그런 주먹도 덩치 앞에서는 솜방망이에 불과했다. 영민의 주먹은 덩치의 솥뚜껑만한 손에 힘없이 포획됐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덩치는 공연히 힘을 빼게 한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해머 같은 주먹을 영민의 안면에 꽂았다. 그걸로 영민의 기억은 끝이었다.
정신을 차리자 영민은 안대가 가려진 채 어디론가 운반되고 있었다. 차는 비포장도로로 접어든 듯 심하게 덜컹거렸다. 20분, 아니...30분쯤 달리던 차가 멈춰 섰다.
차가 멈추자 영민의 몸은 전율에 떨었다. 이곳이 내가 묻힐 곳인가.
덩치는 영민의 뒷덜미를 잡아 개 끌 듯이 차에서 내렸다.
분뇨냄새. 익숙한 냄새다. 돼지농장.
덩치가 영민의 안대를 풀었다. 영민은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에 묻힌 주변 저만치 불을 밝힌 돼지우리가 보였다.
영민이 볼 수 있는 기회는 그것이 끝이었다. 덩치가 우악스럽게 영민의 어깨를 눌렀다. 영민은 덩치의 힘에 무너지듯 무릎이 꿇려졌다.
비로소 영민은 눈앞에 서있는 벤츠를 보았다.
벤츠의 윈도우가 소리 없이 열리고 뒷좌석에 앉아있는 남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박회장이다.
“회장님.”
영민은 울 듯이 박회장을 불렀다. 최대한도로 자비를 구해야한다.
“고영민. 넌 돼지만도 못한 놈이다. 돼지는 그래도 자신에게 밥을 주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아. 오히려 자신의 몸으로 보답하지. 그런데 넌 뭐야. 지금까지 그렇게 보살펴주고 키워줬는데 그렇게 날 배신해? 날 배신한 대가로 얼마 받기로 했나. 강미영 그년한테...”
“회장님 아...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박회장의 쇳소리가 돼지농장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네놈이 알아냈다는 청석의 입찰가! 그게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나. 당장 얘기해봐! 진실이야! 네놈 목숨을 걸고 말해봐! 진실이냔 말이야!”
“회...회장님...”
“돼지만도 못한 네놈 때문에 본 손실이 얼만지는 알고 있겠지. 그걸 갚으려면 네놈 목숨 100개로도 부족하겠지만 돼지 밥으로 주는 걸로 끝내지.”
“회장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요!”
“이 새끼 갈아서 돼지 밥으로 줘버려.”
“회장님!”
영민은 눈물 콧물이 범벅인 얼굴로 절규했다. 살려만 준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민의 그 절규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박회장의 얼굴은 닫혀지는 차창에 가려져버렸다. 영민의 절규는 계속되었다.
“회장님.”
몸이 온통 땀으로 젖어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영민이었다.
악몽에 헐떡인 영민은 물을 병채 들이켰다.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왔다.
영민은 자괴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비록 꿈이지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한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저녁밥을 짓던 가정부는 힐끗 곁눈질을 했다.
박회장이 담요를 잔뜩 뒤집어쓰고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벌써 6시간째다.
아무리 봐도 기괴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박회장은 밑도 끝도 없이 버럭 성질을 냈다가도 혼자 실없이 웃기도 했다. 차라리 성질낼 때는 괜찮다. 저렇게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있을 때는 마치 귀신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치는 가정부였다. 이 집에 오래 있다가는 아무래도 제명에 못살 것 같다는 생각인 가정부는 올해만 다니고 그만 둘 작정이다. 올해도 이제 일주일뿐이 남지 않았다.
박회장은 마치 이구아나처럼 미동도 않고 앉아있었다. 눈동자도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한곳만 바라보았다. 핸드폰이다. 핸드폰이 울기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기 전에는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박회장이다. 절대 울 것 같지 않던 핸드폰이 워싱턴광장을 연주하자 박회장은 마치 먹이를 낚아채는 이구아나처럼 번개같이 핸드폰을 들었다.
“나야! 어떻게 됐어?”
박회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는 반대로 핸드폰 저쪽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인천신청사입찰 프로젝트 팀장 윤이사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빨리 말해봐!”
“우리가...졌습니다.”
“뭐야? 져? 어떻게 졌다는 거야?”
“30억 차이로...우리는 3270억...청석은...3240억을 써냈습니다.”
“3240억!”
3240억!
고영민이 물어온 정보에 의하면 청석의 입찰가는 3340억이었다.
박회장은 청석의 입찰가보다 70억 낮은 입찰가를 써내라고 윤이사한테 지시했다. 70억이면 혹시 최종입찰 순간에 변수가 작용돼도 안심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3240억이라니...
고영민이 가져온 정보보다 100억이 낮은 금액이다. 변수가 생기더라도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수는 없는 것이다. 결론은 하나다. 고영민이 거짓 정보를 가져온 것이다. 그것이 고의든 실수든...
윤이사와 통화를 끝낸 박회장은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고영민 잡아와.”
박회장의 목소리는 낮게 으르릉거렸다.
박회장의 명령이 떨어지고 30분도 안돼 기원에 건장한 남자들이 들이닥쳤다. 남자들을 본 여사원은 기겁을 했다.
“고원장. 어디 있나?”
“모...모르겠어요. 점심때 나가셔서 안들어오셨어요.”
“뒤져봐.”
한 남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같이 들어온 남자들이 기원을 이잡듯이 뒤졌다.
영민은 없었다.
같은 시각. 영민의 오피스텔 자물쇠를 부수고 다른 무리의 남자들이 들이닥친다.
그곳에서도 역시 영민은 볼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뛰어야 벼룩인 놈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다는 거야!”
“죄...죄송합니다, 회장님. 고영민이 갈만한 곳은 전부 찿아봤습니다만...”
덩치가 산만한 남자는 고영민이 사라진 것이 마치 자신의 탓이라도 된 듯이 말까지 더듬었다.
“진천 그놈 생가는 가봤나?”
“네. 회장님. 고영민 어머니까지 뵙고 왔습니다만 오늘은 전화통화도 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고영민의 행동반경은 박회장 손바닥 안에 있었다. 특별히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도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갈만한 곳은 겨우해야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기껏 숨는다고 해봐야 피시방이나 모텔 정도였다. 그러나 박회장이 풀어놓은 200명이 넘는 남자들은 고영민의 최대 행동반경 안 어디에서도 고영민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제 박회장이 생각할 수 있는 고영민의 행방은 한곳뿐이다.
“차 준비시켜.”
“네? 어딜 가시려고...”
“평창동으로 가자.”
“강회장 집으로 말입니까.”
남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무리 무대포라지만 이런 상황에 강미영집으로 쳐들어간다니...더군다나 시계는 10시를 넘고 있었다.
“회장님. 지금 시간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차 준비시켜!”
박회장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화산 같았다.
이 시간에 평창동 큰집의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을 김실장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벌써 11시가 넘은 시간이다. 그런데 이 무례한 방문객은 회장님을 뵙겠다면서 연신 초인종을 눌러댔다. 인터폰 액정화면에 보이는 남자는 보기에도 무례하기 짝이 없게 생겨먹은 남자였다.
김실장의 인내는 3번째 초인종 소리에 극에 달했다. 직접 대문을 열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대문 밖에는 뜻밖의 상황이었다. 무례한 남자 외에도 10여명의 남자들이 병풍처럼 서있었고 그 가운데 한 남자가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김실장은 그 남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박회장이다.
“나, 박회장이오.”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목례를 하며 예를 갖추는 김실장이지만 인상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나, 강회장 좀 만나러 왔소.”
“시간이 꽤 늦었습니다. 내일 약속을 잡으시지요. 회장님.”
“아니, 내일은 늦어. 오늘, 지금이어야 해.”
“죄송합니다. 돌아가 주시지요.”
“전하게. 강회장한테...”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로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김실장이다.
“젊은 친구가 꽤 고지식하구만. 고지식하면 부러질 수도 있어.”
무례한 남자가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가죽장갑을 낀 자신의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앞으로 나섰다. 무력이라도 행사하겠다는 무언의 표시다. 무례한 남자가 나서자 병풍처럼 서있던 다른 남자들도 일제히 한발 앞으로 내딛었다. 김실장으로서는 이미 각오하던 바이다. 눈빛이 칼날처럼 변하면서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일촉즉발. 잔뜩 부풀은 풍선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 순간, 그 긴장감을 끊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모시세요.”
인터폰으로 들리는 미영의 목소리다.
김실장이 잠깐 인터폰을 돌아보았다. 미영의 지시가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의 명령이다. 단 한번도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은 김실장이다. 김실장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저택으로 들어가는 길을 터주었다.
“들어가시지요. 회장님.”
말투는 정중했지만 어금니를 지그시 악무는 김실장이었다.
미영은 저택 현관문 앞에서 박회장을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회장님.”
“이거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방문했소. 강회장. 예의는 아니지만 늙은이의 주책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해주구려.”
“...”
박회장의 말에 미영은 침묵으로 불편한 마음을 대신 전했다.
“집이 참 좋구먼. 인테리어도 아주 잘했어. 집이란 건 이래야 하는데 우리집은 도무지 집인지 돼지우린지...”
“용건이 뭔지...”
“아, 내가 깜빡했군. 먼저 축하를 해야겠군. 이번 인천신청사 입찰건 말일세. 내가 멋지게 당했어. 이 박문식이가 이렇게 패배한 건 철들고 처음일걸세.”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박회장의 말투는 어느새 하대로 바뀌어 있었다.
“지는 건 좋은데 뭔가 명쾌하지가 않아. 내 마음이 말이지.”
“무슨 뜻이신지...”
“고영민, 고영민이 알지?”
“압니다.”
미영의 말투는 덤덤했다.
“그 친구 내 밑에 있는 친군데 말이야. 오늘 행방이 묘연하단 말이야. 하필이면 신청사 입찰 발표하는 오늘 말이야. 그 이유가 뭐지?”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박회장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실장이 나선다. 목소리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뭐가 지나치다는 건가.”
“고영민을 회장님한테 의도적으로 접근시킨 건 박회장님 아니십니까.”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뭔지는 뻔하다. 그런데 박회장은 -그런데-라는 말로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냐라고 태연하게 묻는다. 김실장은 입을 닫았다. 부끄러움이나 상식 따위는 전혀 모르는 철면피 같은 사람이다. 더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회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충분히 알겠습니다만 죄송하게도 회장님이 원하시는 답변을 드릴수가 없군요. 저도 영민씨 행방은 모릅니다. 사실 오늘 여러 차례 전화를 했지만 통화가 안됐어요.”
미영의 말투는 차분했다.
“그래? 통화가 안됐다? 증거를 보여줄 수 있나?”
미영은 무슨 뜻인가 싶어 박회장을 보았다.
“강회장 핸드폰을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렇지 않나?”
“무례합니다!”
박회장의 말에 김실장이 버럭 나섰다.
“김실장, 내 핸드폰 가져오세요.”
“회장님!”
“가져다 드리세요.”
김실장은 참담함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김실장이었다.
미영의 핸드폰이 박회장에게 건네졌다.
미영의 핸드폰을 받은 박회장은 통화내역을 검색했다. -영민씨-라는 이름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첫 통화는 5시10분, 입찰결과가 발표된 직후다. 마지막 통화는 11시였다. 총 통화 횟수는 30회를 넘었다. 통화시간은 20초 내외. 20초내외라면 실제 통화를 한 것이 아니라 발신신호 시간일 것이다.
미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영민은 미영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이다.
“자네 말이 사실이군.”
미영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하는 박회장의 말이다.
“이 늙은이를 이해해주게. 나이를 먹으면 뭐든지 이렇게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믿게 된다네.”
“...”
박회장의 말에 미영은 말이 없었다. 더이상 할말이 없으면 그만 돌아가 달라는 표정이었다. 미영의 마음을 알았는지 박회장은 휠체어를 현관 쪽으로 돌렸다. 미영은 현관 밖에서 박회장을 배웅했다.
“밤길 살펴가세요.”
“그래, 밤늦게 폐가 많았네.”
미영이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끈질긴 박회장이 미영의 발목을 잡았다.
“강회장, 한가지만 묻겠네.”
미영이 고개를 돌렸다.
“청석의 입찰가, 영민한테 사실대로 말해줬나?”
상대방의 배려나 인간적인 예의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는 박회장이다. 도저히 입 밖으로 뱉을 수 없는 말을 서슴없이 던져서 상대방을 곤혹에 빠트리게 하는 박회장이다. 생각지도 않은 뜻밖의 질문을 받으면 보통 사람들은 생각할 겨를 없이 진실을 토하게 된다.
미영은 박회장의 뜻밖의 질문에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빛을 등뒤로한 미영의 얼굴은 그림자에 감춰져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했군.-
박회장은 나지막이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가자.”
박회장은 휠체어를 대문 쪽으로 돌렸다. 그 뒤를 쓸데없이 덩치만 큰 남자들이 뒤따랐다.
박회장이 대문을 나선 후에도 미영은 그 자리에 그렇게 덩그러니 서있었다. 마치 움직이는것조차 귀찮다는 듯이...
“바람이 찹니다. 회장님.”
김실장이 조심스럽게 미영에게 말했다.
“오늘이 이브죠?”
김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라도 해야하는데...”
말끝에 미영의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아니, 이유가 너무 많은 눈물이었다.
포장마차 주인의 볼은 잔뜩 부어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 평상시보다 손님이 더 없었다. 초저녁에 손님이 반짝하더니 금방 발길이 끊겨버렸다. 하긴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장사가 될 것 아닌가.
주인의 부아를 더 돋구는 건 초저녁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죽치고 있는 저 남자 때문이었다. 8시부터 들어앉은 남자는 지금까지 소주 한병 시켜놓고 진상을 떨고 있었다. 주인의 인내는 한계에 다다랐다.
“손님, 웬만하면 그만 일어나쇼. 장사도 안되고 그만 문닫을 건데...”
주인의 신경질적인 소리에 영민은 고개를 들었다.
“지금 몇신데요.”
“12시 넘었수다.”
“12시...겨우 그것뿐이 안됐나.”
하루종일 영화도보고 게임도하고 거리를 쏘다닌 영민이었다. 그런데 밤이 되자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들어온 곳이 여기였다. 이렇게 넓은 땅덩어리에 자기 몸 하나 갈 곳이 없다는 게 신기했다.
영민은 소주 한잔을 들이켰다. 술이라면 독약보다 더 진저리를 치는 영민이지만 오늘은 그래도 제법 마신다. 하긴 제법 마신다고 하지만 4시간동안 겨우 소주 3분의2 병 정도를 비웠을 뿐이다.
영민이 빈잔에 소주를 채울 때 핸드폰이 울어댔다. 문자가 왔다는 시그널이다. 미영이었다. 벌써 수십 번 전화를 했지만 영민은 받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문자다. 잠시 망설인 영민은 수신함을 열었다.
영민씨 우리 통화 좀 해요. 박회장이 집에 왔다 갔어요.
문자를 본 영민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박회장이!”
영민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가기가 무섭게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영이다.
“영민씨!”
미영의 목소리에 말보다 울음이 먼저 터져 나온 영민이다.
-왜그랬어, 내가 입찰가액 가르쳐 줬잖아. 날 못믿었던 거야?
-믿어. 뭐라고 말하든 믿어. 단지 내가 너무 비참해질까봐.
-바보. 사랑하는 사람한테 주는 선물인데 뭐가 비참해.
-사랑하지 않았다면 비참해야할 감정도 없겠지.
-사랑, 그것이 뭐기에...
-축(逐)
3개월 후.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보내서인지 올해는 봄소식이 빨랐다. 성급한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벗어던지고 벌써 반팔 차림이었다.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있던 명지산 계곡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음을 녹이고 계곡물을 힘차게 흘려보냈다.
계곡 옆에는 드문드문 펜션이 보였다. 펜션들은 한결 같이 넓은 땅을 차지하고 거대한 유럽풍의 건물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요즘은 크고 화려하지 않으면 장사가 안된다.
그런데 유독 계곡에서 떨어진 곳에 아담한 펜션 하나가 보였다. 위치도 숲속이라 사람들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곳인데다 겨우해야 10여 평의 2층짜리 펜션은 주변 펜션에 비해 무척 초라하게 보였다. 그래서인지 다른 펜션에는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있는데 그곳만은 흰색 소나타 한대가 달랑 주차돼 있을 뿐이었다. 펜션 안에서는 여자의 밝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자는 커다란 배만한 주먹밥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주먹밥은 크기도 크기지만 울퉁불퉁한 게 먹음직스러움과는 전혀 동떨어지게 보였다.
“이게 뭐야. 자신 있다더니 이걸 어떻게 먹어.”
여자의 말에 남자는 밥풀이 잔뜩 붙은 양손을 어쩔 줄 모르고 난감한 표정으로 변명이었다. 미영과 영민이다
“글쎄 일단 먹어봐. 그래봬도 맛은 좋아. 내가 일주일동안 연구했다니까.”
“싫어. 안먹어.”
“안먹으면...”
영민은 잔뜩 밥풀이 묻은 양손을 미영의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밥풀이 묻은 양손을 미영의 얼굴에 문지르겠다는 위협적인 행동이다.
“하지마! 하지마! 하면 알아서해!”
미영은 자지러졌다. 자지러지는 미영에게 바짝 다가선 영민의 얼굴이 미영의 얼굴 위로 겹쳤다. 두 사람의 입술이 하나가 되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미영의 입이 열리고 영민의 살점을 받았다.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은 소파로 쓰러졌다.
영민의 능숙한 손놀림이 미영의 몸을 걸치고 있는 옷을 벗겨냈다. 옷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영민의 스웨터 하나가 전부다. 불과 20분전에 사랑을 나누고 달랑 영민의 스웨터를 걸쳤던 미영이었다. 배가 고프다는 미영의 말에 영민이 주먹밥을 만든다고 나서던 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벌써 3번째다. 3번이 아니라 30번이라도 아쉬운 두 사람이다.
일주일에 한번. 미영은 영민이 머물고 있는 펜션을 찾았다. 펜션은 미영의 채무자의 담보를 압류해서 김실장 명의로 해놓았던 물건이다. 미영은 일주일에 한번 사무실에서 잠깐 시간을내서 영민을 만나러온다. 미영이 영민을 만나러 오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다. 박회장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박회장은 영민을 찿고 있었다. 물론 미영에게도 감시의 눈초리가 있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미영은 조심에 조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영민을 만나러 올 때는 사무실 지하 주차장에 주차시켜놓은 소나타를 몰고 온다. 가장 흔한 차종에 가장 흔한 흰색이다.
사무실에서 펜션까지는 한 시간 반. 영민을 만나는 시간은 길어야 3시간 정도일 뿐이다. 그것도 일주일에 한번. 그 3시간은 두 사람에게 눈물겹도록 아쉽고 안타까운 시간이다. 그 아쉬움은 두 사람을 더 뜨겁게 만들었다. 영민은 미영의 몸속에서 용암처럼 분출됐다. 그 용암에 미영은 화려한 불꽃이 되었다.
차라리 이렇게 불타 한줌 재가 될수있다면..
미영은 더이상 참을 수 없음에 길게 교성을 질렀다.
그것은 비익조의 울음소리였다.
아쉬운 시간이다. 미영이 돌아갈 시간이다. 이제 다시 일주일을 기다려야한다. 이별은 가벼운 키스가 전부였다. 뭔가 할말이 많은 것 같지만 헤어질 때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저 상대방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다. 얼굴에 점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언제나처럼 떨어지지 않는 미영의 발길을 떼는 건 영민이었다. 영민이 펜션 문을 열자 비로소 미영은 무겁게 발길을 돌렸다. 언제나처럼 똑같은 이별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펜션 밖을 나선 두 사람은 마치 얼어붙은 듯이 몸이 굳었다.
펜션 밖에는 덩치가 산만한 두 남자가 코란도 옆에 서있었다. 그 남자들이 누군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결국 꼬리가 잡힌 것이다.
“고영민씨.”
“당신들 누구여요.”
미영이 소리쳤다.
“이 사람 고영민 아니어요. 사람 잘못 찾아오셨어요.”
“강미영씨. 숨바꼭질은 끝났습니다. 고영민씨. 같이 가시죠. 박회장님이 모셔오라는 분부십니다.”
“안돼!”
남자들이 한발 앞으로 다가오자 미영이 양팔을 벌려 영민을 가리며 발작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미영의 비명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그 후로 그곳에서 더이상 사람을 볼 수 없었다.
8년 후.
분당서울대병원 특실에 한 남자가 누워있었다. 나이가 꽤 들어보이는 남자는 산소호흡기를 장착한 채 가래 끓는 소리로 거칠게 호흡을 했다. 눈동자는 미동도 않은 채 천장의 한곳만을 응시했다. 침대에는 남자의 신상명세가 써있는 표찰이 붙어있었다.
Age; 74
sex; m
name; 박문식
박회장이었다.
의사는 심하게 요동치는 바이탈 그래프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이미 숨을 거둬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환자의 상태는 어제부터 급격히 악화됐다. 그런 상태라면 12시간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환자는 벌써 40시간째 끈질기게 버티고 있다. 마치 죽기 직전 뭔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선생님, 혈압이 너무 떨어지고 있어요.”
간호사의 말에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더이상 처치할 무엇이 없다는 표정이다.
그때 병실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섰다.
미영과 영민이었다.
“회장님!”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은 박회장 옆으로 달려갔다.
이미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미영과 영민은 눈물이 터져나왔다.
“죄송합니다. 좀더 빨리 왔어야 하는데...”
영민은 터져나오는 울음에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은 박회장의 손이 무겁게 움직였다.
입을 덮고 있는 산소마스크를 떼 달라는 표시였다.
“괜찮을까요?”
미영이 걱정스럽게 의사한테 묻자 의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민이 조심스럽게 산소마스크를 떼자 박회장은 말라붙은 입을 겨우 뗐다.
“캄보디아에...간...일은...”
“잘됐습니다.”
“그래..그..럴 줄..알았..어. 네놈..혼자는..안돼. 미영이가..있어야지..”
“그래요. 회장님. 이 사람은 혼자 아무것도 못한다니까요...”
눈물 범벅인 미영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그래..나 없더라도..미영이가..이녀석 잘..돌봐줘..나이..40이 됐는데도..아직도..어린애 같은 놈이니까...”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회장님이 어딜 가신다고 그러세요. 가시면 안돼요.”
“사람은...갈 때가 되면...가는 거야...”
말을 끝낸 박회장이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칠게 그르륵...거렸다. 마치 가래가 호흡기를 막고 있는 것 같았다.
“회장님!”
미영과 영민이 박회장을 붙들고 절규했다.
“썩션!”
의사가 짧게 소리치며 박회장의 입을 벌리자 간호사가 튜브를 집어넣었다. 기계가 작동하며 걸쭉한 액체가 튜브로 빨려나왔다.
처치 후 박회장은 숨소리가 조금 안정되는 듯했다.
“회장님! 괜찮으세요! 회장님!”
미영과 영민이 박회장을 붙들고 소리쳤다.
“괜찮아...”
박회장은 천장의 한곳에 눈을 고정한 채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그때...그때가...좋았어...”
“무슨 말씀이세요. 회장님.”
“8년전인가...네녀석들...골려먹을 때...말이야. 두 사람...감쪽같이...속았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뛰어요.”
“그래...그래...그럴 거야...그래도..두 사람...이뤄진 건...나 때문이니까...고맙게 생각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난...말이야...미영이...자네가...좋았어. 미영이를 영민이...저녀석 짝으로...점찍어..뒀지...그런데...영민이...저녀석이...쑥맥이니...혼자...뭘할 수...있겠어.
그래서...내가 방법을...쓴 거지. 물론...여러가지...테스트가...있었지. 테스트를 통과하지...못하면...두 사람...이뤄지지 않았어. 그 중에...마지막 테스트가...청석의...입찰가였는데...만약 사실대로 말했다면 끝이었지...저 녀석이...그걸...통과한 거야...사실...웬만한...사람은...쉽지 않은 건데...말이지...”
“그만 말씀하세요. 힘들어요.”
“영민아...”
“네. 회장님.”
“네 녀석 말이야...내 인생에...가장 큰...선물이었어. 네 녀석이...없었다면...내 인생은...너무...외로웠을 거다...고마웠다.”
박회장의 말에 영민은 왈콱 눈물이 쏟아졌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회장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한번 부르고 싶습니다. 아버지라고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박회장은 대답대신 영민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
영민이 목이 멘 소리로 불렀다.
영민의 부름에 박회장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영민의 손을 잡은 박회장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그런데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박회장의 손이 힘없이 영민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순간 바이탈 그래프가 수평으로 일자를 그렸다.
박회장의 얼굴은 만면에 웃음을 띤 그대로였다.
-끝-
*** 이 작품을 ‘오로천사’ AKARI님에게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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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6 본 내용은 작가의 순수 창작물이므로 무단복제나 도용, 표절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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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ARI
논공돌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