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목향

“사람이 곧 바둑이다!”

“천목향”이라는 미려한글씨체의 기원 간판에 궁서체로 이런 글귀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아빠, 저거 이상해.”

기원 한쪽에 있는 TV에서 평일 낮인데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관심이집중된 탓에 최강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라딘과 세계 최고 바둑 기사 중 하나라는 김유 9단의 대국이생중계되고 있었다. 김유 9단은 지난 10여 년 간 세계 최고의 기전을 석권하고 부동의 세계 1위를 고수해왔었다.

“아빠, 아빠, 빨리 와봐. 이상하다니까.”

평소 바둑은 인간의 고유한 문화이며 바둑 예절을 더 없이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감히 인공지능 따위가 바둑을둔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화를 내고 사실 본능적으로 흥미가 끌리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중간에 프로기사 생활을 접고 이 외진 시골에 내려와 텃밭이나가꾸며 소일거리 삼아 기원에 나와 바둑을 두는 김기사와 점심 내기 바둑을 하고 있는 고완성 원장은 하나 뿐인 8살짜리딸이 하도 성화를 부려 못이기는 척 김기사와 함께 TV 앞으로 다가갔다.

“연아, 왜 그래. 아빠, 김기사와 점심 내기 중이거든. 이 판 이겨야 네가 좋아하는 탕수육 먹을 수 있어.”

“아빠, 이상하다니까. 저 아저씨 지금 일부러 져주려는 것 같아.”

“뭔 소리야. 니가 뭘안다고. 저 분은 세계 최고 중에서도 최고인데 니가 감히 평할 수준이 아니라고…”

그 말에 연이는 풀이 죽어 혼잣말로 “이상한데…중앙으로 탈출할 수 있는데”라는 말만 나지막이 되뇌였다.

“김기사 우린 점심 내기나 계속하지…”

“고원장, 자네 천목은항상 강력하단 말이지…

“원, 엄살도…은퇴한지 좀 되었다고 프로 바둑 기사 솜씨가 어디 가겠나?”

김후주 프로기사를 줄여 김기사라고 부르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무슨 택시 기사나 버스 기사쯤으로 착각하기도하는 게 재미있어 고원장은 일부러 더 큰 소리로 “김기사”라고불러대지만 사실 김기사에게 두 점 접바둑으로 이겨본 일이 거의 없어 그를 존경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골 촌구석 기원에 그런 고수가 온다는 걸은근히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허물없는 사이가 된 마당에 고원장의 외동딸 이름이 “재연”이 된 사연까지 다 알고 있는 김기사는 비록 자신보다 기력은약하지만 바둑에 대한 고원장의 철학과 “천목”이라는 신수아닌 신수를 생각해 낸 그의 탁월한 감각을 내심 부러워했다.

“재는 누굴 닮아서 저리 고집이 센지 모르겠어. 세계 최고 프로 기사 바둑에 아마 1급도 안 되는 녀석이 뭔 토를달아…”

“음, 자네 딸인데 자네를닮았겠지. 근데 연이 요새 기력이 부쩍 늘었어. 자네 몰랐나?”

“그래? 그래봤자 아마 1급 두던 꼬맹인데 뭘.”

“아냐, 지난 번에 3점으로 내가 졌어. 나도 깜짝 놀랬어.”

“뭐야? 정말이야? 그게 가능해?”

“자네 천목 때문이지 뭐. 저놈이 좀 독한 면이 있잖아. 죽어도 지기 싫었는지 지 딴에 천목을 엄청나게 연구했나보더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연아, 너 정말 김기사한테이겼어?”

“응…”

“연이 바둑 프로 기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켜볼 생각 없나?”

“글쎄, 지가 좋아서 한다면야…하지만 자네도 그 생활 지겨워서 때려치운 거잖나?”

“그거야 그렇지만…그 바닥이좀 지저분한 면도 있어서…”

“그나저나 이 판은 또 내가 졌구만…오늘점심 내가 살게”

“아닐세, 매번 여기와서공짜로 바둑 두면서 소일하는 데 모처럼 그 동안 밀린 요금 내는 차원에서 내가 쏠게. 짬뽕 둘 짜장하나 탕수육 맞지?”

“두 말하면 잔소리지…군만두도가져다 달라고 해…”

고원장은 환하게 웃으며 딸에게 소리쳤다.

“연아, 오늘 점심 메뉴는니가 젤 좋아하는 탕수육이랑 짜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