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이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10여년 전 지금처럼 카페가 활성화 되지 않았고 하이텔, 천리안으로 대변되었던 게시판 시대였다.그 때 하이텔에는 무협게시판이 무척이나 성행했는 데 그 중 최모작가의 "표류공주"를 연재하던 게시판에서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표류 공주? 무슨 공주가 칼쌈을 그리도 잘하냐? 하는 좀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엄청난 조회수를 보고는 꼼꼼하게 서문부터 읽기 시작했다. 서문에 나온 한자제목을 읽는 순간 마음이 휘청거렸다. 漂流空舟 ;표류하는 빈배 - 심오한 뭔가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 L의 나이도 그런 단어에 마음이 끌리는 그 무렵이었으니 마음에 드는 것 이상이었다.
 
그는 곧 표류공주의 골수 팬이 되었다.
 
그 날도 특별한 일 없이 저녁을 먹고 담배를 한 개피 피워물고 게시판에 접속을 했다. 

9600bps의 모뎀 속도로 하이텔로 전화 접속을 하루 한시간 정도 사용하면 요금이 한 3만원 정도 나오는 시절에 몇시간씩 무협게시판에서 글들을 읽고 느낌을 댓글로 쓰고 댓글에 달린 댓글들과 공감하고 ,.. 마치 옛날 우리 어린 시절 먹을 것이 귀해 먹을 것을 보면 탐했던 것처럼 몇 줄의 글을 탐했던 그런시절,

새로운 글 한편을 새담배 나왔을 때 담배가게 줄서는 것처럼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느날 이었다 

L의 댓글 바로 아래에 글이 한줄 달렸다.
 
요즘처럼 글 아래에 바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올린 글 아래에 달리기 때문에 타이밍을 놓치면 보지도 못하고 넘어 가기 쉬운데 그 날은 이상하게 L의 눈에 빨려 들어 오듯이 들어오는 글 한줄이 있었다.
 
이 것이 L과 그녀와의 첫번째 만남 이었다.
 

바로 몇줄 아래에 "님 - 그 닉과 ???이라는 단어와 연관 있지요?" 엥? L은 옷이 확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묵x, 남x으로 이어지는 외가의 아호를 어떻게 알았지? 혹 외삼촌과 아는 사람일까? 온갖 상상속에서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돌아온 답장으로 그 글의 주인이 여자라는 것도 알았고, 나이가 비슷한 또래라는 것도 알았고 기질이 그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채로 단지 글이 주는 느낌 때문에 서로의 가정사부터 시작해서 온갖 마음속에 있는 치부들까지 하나씩 둘씩 공유하게 되었다. 마치 조폭들이 서로의 범죄사실을 공유함으로 유대감이 더욱 더 깊어지는 것처럼 L과 그녀는 둘만의 진한 유대감이 형성이 되기 시작했다.

L 의 취미생활도 친구와 술마시며 세상사를 논하는 것에서부터 점차로 퇴근후 컴퓨터를 켜 메일을 열어보는 것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메일을 몇 번씩 읽어 보는 그의 모습을 보면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작은 설레임으로 컴퓨터를 켜고 메일에 접속하는 순간 L의 메일의 제목에는 "안녕"이라는 제목의 메일이 한통 와 있었다. "남편이 컴퓨터를 못하게 한다!"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L 은 무척이나 당황해 했다. 그렇지만 L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름도 모르고 주소도 모르는 L이 할 수 있는 것은 데 "이유가 뭐냐!" 라는 메일을 보내는 것과 게시판에 들어가 찾아 보는 일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

...

L의 원망, 아쉬움이 쌓이다 2년쯤 지난 어느날, 모든 마음의 병에는 시간이 제일 좋은 약인 것처럼 그렇게 서서이 마음이 안정을 되찾아갈 무렵, 하이텔같은 게시판은 새로 태동하는 포탈에 밀려 서서이 잊혀져갈 때였다. 그 때 포탈 흉내를 내던 가장 괜찮았던 곳이 초보적인 게시판 형태의 온갖 모임이 활개를 치던 드림위즈였다.


그날도 드림위즈에 들어가 이리 저리 써핑을 하며 좋은 정보가 없나? 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다가 무슨 문학동호회 방이 있어 가입을 했었는 데 ...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묘한 상황이 발생했다.

예전에 알고 있던 그 닉이 보였던 것이었다.
"님아"를 발음대로 부른 "xx"라는 그 닉을 보았을 때 L의 등에는 전율이 일었다.

가슴을 두근 거리며 글 들을 읽어 보니 ... 바로 그녀였다. 반가움의 정도는 말로 표현하기는 어렸웠다.

그렇지만 L 은 아는 채를 해야되나 말아야 되나, 무척이나 망설였다.

혹여나 예전의 공유했던 얘기들을 치기어린 감정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어떻게 하나? ...

이런 저런 생각에 그녀의 글들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읽어 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글을 몇 개 읽지 않았을 때 그 녀의 상황과 심정을 알 수가 있게 되었다. 그 때 그녀는 이혼이라는 힘든 결정을 하게 되었던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L 은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에 휩쌓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혼에 대해 그도 자유로울 수 만은 없다는 그런 종류의 느낌, 일종의 자괴감이랄까?

L은 다시 메일을 보냈다.

"그 동안 잘 지내셨나요? ... " 그 동안 L에게 수없이 많이 쌓인 원망과 서운함을 모두 그 한마디에 실어 보냈다.
"미안 그 때 너무 무심했죠!" 이 짧은 한 마디가 그 동안 L에게 쌓여있던 업이랄까? 한이랄까? 하는 그런 원망들을 한꺼번에 풀어 내어 버렸다.

이 것이 L과 그녀와의 두번째 만남이었다.

그후 며칠동안은 예전의 기억, 그 감정들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는 것 때문에 L 에게는 너무나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일주일쯤 뒤 L은 그녀로부터 울산 문인들의 무슨 행사의 밤에 초대를 받았다. 저녁겸 무슨 발표회인가? 하는 곳이었는 데 그녀의 만남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무슨 주제의 모임인가 하는 생각은 겨를도 없었다.

L은 직장에서도 제법 높은 간부였지만 공장지역이라 근무복으로 출퇴근만 하는 생활이었기에 변변한 외출복도 없어 결혼식 때 입었던 예복을 입고 그 자리에 참석을 했다.

제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겠지만 L의 눈에 비친 그녀는 눈이 부셨다. 그녀가 입은 옅은 하늘색 옷은 천사의 날개처럼 보였다. 군청색의 예복과 하늘색 원피스는 한쌍의 부부와 같이 빛이 났었다. 둘다 한동안 말도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다가 한 참이 지나고 나서야 "아! 진작에 한번 뵜어야 되었는 데 ..." 그 뒤로 L은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보통 한 곳이 뛰어나면 어느 한 곳은 모자람이 있기 마련인 데 L의 눈에는 그런 모자람은 보이지를 않았다.
그녀도 내심 L이 싫지는 않는 기색이다. L과 그녀의 감정을 감정 계량기로 검침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L과 그녀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너무 서로에게 끌리다가, 주체를 할 수 없으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그 만남 이후로는 둘은 오히려 조심을 하는 모습이었다. 서로 피한다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그냥 친하게 지내기에는 너무 부담감이 큰 존재같이 보였다.
그저 다른 말은 감춰두고 "오늘 어땠나요? ... 안녕, 잘주무세요"라는 말로 며칠을 보냈다.

그러던 며칠 후 L은 영남알프스의 백운산 암벽중, 백운슬랩이라고 부르는 곳에 암벽등반을 가게 되었는 데, 마침 예전에 인수봉 아래에서 돌아내려 왔다던 그녀의 말을 기억해 냈다. 그래서 북한산 인수봉과는 비교도 되지 않겠지만 백운산 암벽을 해보겠는냐고 제안을 했다.

흔쾌히 승락을 해서 그녀를 데리러 울산까지 갔다가 백운슬랩에 갔었는 데 마침 비가온 뒷날이라 물이 많이 흘러 할 처지가 되지를 못해 배내골 안의 청수산장에서 산꾼들의 자리를 마련했다. 눈치 빠른 선후배들이 둘을 위해 슬쩍 자리를 비켜 주었다.

술을 몇잔 하자 눈 끝에 그녀의 눈물이 고였다. L은 왜그러는 지 묻지도 못하고, 위로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앉아 있기만 했다. 힐끔 거리던 선후배들은 뭔 사단이 크게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정작 답답한 것은 L 이었다.

어느듯 해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 가게 되어 그녀가 처음 탓던 곳 부근으로 가서 내려 주기 조금전
그녀는 L에게 "미안! 나 이제 외국에 이민을 가게 되어 연락할 수도 없을 거 같아" 라는 말을 했다.
"무슨 소리 전화도 있고 인터넷도 있으니 연락을 하면 되지!"
그렇지만 그녀는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하고는 내려 버렸다.

L은 또 다시 첫번째 헤어짐의 심정이 되어 울산의 몇몇 아는 문인들에게 물어 보니, 그 때 참석했던 그 모임이
그녀가 출국하면서 지인들에게 신고하는 자리였다고, 헤어짐을 신고하는 자리였다고, 뼈를 묻을 생각으로 남미 오지에 봉사활동을 나갔다는 말만 들었다. L로서는 그녀가 무슨 생각이 있었는 지, 무슨 한이 있었는 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이 것이 L 과 그녀의 세번째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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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이에게는 피천득 선생님의 "세번째는 아니 만남보다 못하였다"라는 말 보다는 조금 더 나은 결말처럼 보였지만 L 에게는 더 못한 결말 인 것 같았다. 왜냐면 L의 가슴에 큰 멍울이 하나 생겨났기 때문이다.

L이 바위를 볼 때면 보면 그녀의 생각, 그녀에게 주었던 감정의 응어리들이 생각나고 그 응어리들은 그의 가슴속 깊이 숨어있다가 한번씩 철렁이는 그리움으로 다시 살아 나니 그건 언제 끝날 줄 모르는 형벌이기 때문이다.

비록 세월이 상처를 덮어 주더라도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그런 그리움, 다시는 풀지 못할 응어리를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야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기 때문이다.

주) 표류공주
작가 최후식이 마흔이 넘기전에 첫 소설을 써 보기로 결심한 소설로 대강의 줄거리는 우연하게 딸의 아버지를 죽인 주인공이 그 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게 되고 그 딸도 그 정성에 사랑을 하게 되지만 현실은 "해와 달이 동시에 뜨기 전에는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 질수 없다" 라는 신파조의 결말이지만 하이텔 백만 독자의 심금을 찡하게 만든 무협의 형식을 빌린 연애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