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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九단의 기풍변화와 기업혁신 - 바둑과 경영 (3)
<제3강> 프로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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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이 글은 ‘SERI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양상국 九단이 ‘바둑, 경영을 만나다’란 주제로 바둑이 지니고 있는 경영적인 요소에 대해 강의한 내용입니다. 최근 사이버오로에서 <양상국 바둑사랑 55년>을 발간하면서 전편(총 15편)을 실은 바 있고, 이 가운데 월간『바둑』의 요청으로 강의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 적도 있습니다. ‘바둑과 경영’이란 큰 카테고리로 묶은 글이기는 하나 내용은 조훈현이나 조치훈, 이창호 같은 세계적인 기사들의 승부에 얽힌 에피소드와 바둑동네의 생생한 이야기를 곁들여가면서 바둑 속에 들어 있는 경영적인 면모를 살펴보는 것이므로 나름 읽는 맛이 있을 겁니다. 이미 많이들 알고 계신 내용일지언정 이 연재를 통해 바둑사를 반추하면서 긴 설연휴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사이버오로 회원을 위해 10편을 골라 명절연휴 기간 연재합니다. 모쪼록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사이버오로 임직원 일동 배례(拜禮). ○● 설특집/ 바둑과 경영 (1) 프로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운다 - 후지사와 九단의 “4판만 이긴다!”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2) 프로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운다 - 조치훈 九단의 “목숨을 걸고 둔다!” ☜ 클릭 ![]() <제3강> 프로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운다 조훈현 九단의 기풍변화와 기업혁신 장강(長江)의 앞물결은 뒷물결을 거슬러오르지 못합니다. 승부세계의 흐름 또한 이와 같아서 한번 정상에서 밀려나면 다시 컴백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앞서 한시대를 풍미했던 일인자들과 조훈현 九단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정상에 복귀하지 못했지만 유독 조훈현 九단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줄기차게 벌인 사제(師弟) 대결에서 제자 이창호 九단에게 10여 개에 이르던 타이틀을 몽땅 빼앗기고 무관(無冠)으로까지 전락할 정도로 난타 당하면 사실 재기를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상식을 깨고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조훈현 九단이 터미네이터처럼 되살아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해가 지지 않을 것 같던 조훈현의 왕국은 역설적이게도 자기손으로 키운 이창호에 의해서였습니다. 1988년 여름 13세에 불과한 제자가 KBS바둑왕전에서 우승해 세계최연소 타이틀 획득기록을 세웠을 때 스승의 반응은 ‘악!’ 외마디 비명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다소 장난끼 섞인 놀라움이었지만 곧이어 진짜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게 될 줄 짐작이야 했겠습니까. 세계바둑사에 유례 없었던 ‘사제 도전기’ 첫 타이틀을 딴 이창호는 그해(1988년) 겨울 스승의 라이벌인 서봉수 九단을 연거푸 꺾고 28기 최고위전 도전자로 나섭니다. 바둑역사상 스승과 제자가 벌이는 첫 도전기에 나라가 떠들썩했습니다. 스승은 어린 제자의 도전에 참으로 당혹스럽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지요. 드디어 사제 도전기의 봇물이 터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 ▲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둑계에 전례 없는 사제도전기가 막상 성사되자 스승 조훈현이나 13세 제자 이창호나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1988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에 부산에서 제28기 최고위전 도전1국이 펼쳐졌고, 이날의 분위기를 대변하듯 첫 사제도전기는 80수 만에 스승의 승리로 끝났다. 도전기에서는 보기 드문 단명국이었다. 국후 복기하는 스승의 엉거주춤한 자세도 그러했고 마주앉은 제자 역시 뭔가 저질러서는 안될 죄를 사람 같은 표정으로 일관했다.
![]() ▲ 그런데 1989년 1월 12일 최고위전 도전3국에서 제자 이창호가 극적인 반집승을 거두는 일이 벌어졌다. 사제대결 첫승이다. 다들 깜짝 놀랐지만 운좋게 반집을 이겼겠지,라고 생각했다. 스승도 허허 웃었다.
![]() ▲ 첫 사제도전기는 1989년 1월 26일 운당여관에서 이어졌고, 예상대로 스승이 이기며 3대1로 최고위를 방어했다. 조훈현 九단의 통산 100번째 타이틀 획득 순간이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스승의 벽을 넘어서기에는 아직은 이르다, 2~3년은 더 필요하다고들 생각했다. 언론의 관심도 대단해서 밤 늦게까지 대기했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 스승 앞에서 제자는 역시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 ▲ 그런데 제자는 다음 기(29기)에서 또 도전자로 나섰고 이번에는 2대2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더니 1990년 2월 2일 도전5국에서 스승 조훈현 九단을 꺾고 자신의 첫 신문사 타이틀을 땄다. 이때부터, 흡사 도미노가 쓰러지듯 사제대결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번번이 패퇴하면서 급기야 무관(無冠)으로까지 떨어지고 만다.
처음 두 번의 도전기-최고위전은 3대1, 패왕전에서는 3대0으로 스승이 가볍게 진압하는 듯했으나 이는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1989년 겨울, 세 번째로 제자의 도전을 받은 29기 최고위전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2대3으로 타이틀을 뺏기고 맙니다. ![]() 파천황(破天荒)의 사건이었습니다. 바둑세계에서 제자가 스승을 꺾으면 가르친 은혜에 제대로 보답했다 하여 ‘보은(報恩)’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의 대결 결과를 보면, 이건 보은의 차원을 넘어선 ‘융단폭격’의 양상으로 흘러갑니다. 2009년까지 두 사람의 역대전적은 190승 119패로 제자가 많이 앞섭니다. 사제가 마지막으로 도전기를 벌인 게 2003년 12월 34기 명인전인데, 이때까지 모두 68번의 타이틀매치를 벌였고 역시 제자가 49승 19패로 우세합니다. 이 와중에 1995년 2월에 스승은 마지막 남은 잎새처럼 달랑 남은 대왕 타이틀마저 빼앗기고 무관(無冠)으로 떨어지는 수모까지 겪습니다. 1974년 첫 타이틀을 딴 이래 무려 세 번이나 모든 타이틀을 휩쓰는, 전관(全冠)제패의 위업을 달성했던 천하의 조훈현이 자기 손으로 기른 제자로 인해 21년 만에 무관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 ▲ 1995년 12기 대왕전 도전4국 종국 장면. 스승 조훈현 九단(왼쪽)이 제자 이창호 七단에게 패해 21년 만에 무관으로 전락했다.
‘무관’ 조훈현의 혹독한 변신, 선택과 집중 조훈현의 시대도 끝나나 보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절치부심, 대국 때면 하루 세 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고 틈만 나면 북한산을 오르내리는 등 체력을 기르며 권토중래를 노립니다. 바둑의 스타일(棋風)도 과감하게 바꾸었습니다. 싸움의 신, 이른바 ‘전신(戰神)’이라는 새 별명을 얻을 만큼 더욱 치열한 싸움바둑으로 변신합니다. ‘이창호 바둑’, 하면 강태공을 떠올리게 하는 기다림의 바둑이지요. 몸싸움을 피하고 정밀한 형세판단과 계산력으로 후반 끝내기에서 승부를 보는 스타일인데 상대적으로 초중반 접전에 약한 면을 보입니다. 이 점을 파고든 것이죠. 복싱으로 치면 이창호 九단은 아웃복서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초반부터 탐색전이고 뭐고 없이 거리를 주지 않고 세차게 몰아붙여 난타전을 벌이게 되면 국면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급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창호의 능기인 계산바둑이 힘을 발휘할 여지가 줄어들게 되지요. 치열한 싸움바둑으로 상대를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것, 바로 이것이 조훈현 九단의 ‘이창호 파해법’이었습니다. 조훈현 九단이 전투바둑을 꾀한 건 점점 속기(速棋)로 흐르고 있는 기전의 추세를 헤아린 점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노장의 처지에서는 젊은 강자들을 상대로 장기전보다는 단기전을 꾀하는 쪽이 승률이 높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조훈현 九단이 국내기전에서 제자에게 밀려 무관으로 떨어진 뒤 세계대회로 방향을 돌려(선택과 집중) 더 혁혁한 성과를 올린 결과가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창호가 내 스승이다!" 또 달라진 면이 있었습니다. 숱한 사제대결에서 일패도지(一敗塗地)하면서도 제자로부터 배운 게 있으니, 바로 끝내기 실력입니다. 이창호 세대가 나타나기 전까지, 솔직히 조훈현 九단과 여타 기사들과의 실력차는 확실히 있었습니다. 초중반 바람보다 빠른 속력행마로 저만큼 내달리면 그걸로 게임 오버였지요. 빡빡하게 끝내기까지 겨룰 상대가 별로 없다보니 조九단의 끝내기 실력은 발전할 여지가 작았던 거죠. 승부사에게 정체는 곧 퇴보입니다. 사제 타이틀매치에서 조九단은 꼭 결정적인 판에서 반집을 져 주저앉곤 했습니다. 두 사람이 타이틀전에서 연출한 반집승부는 모두 27차례 있었는데 7승 20패로 조九단이 열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이 가운데 타이틀전 승부를 결정짓는 최종국, 이러한 판이 말 그대로 ‘진검승부’인데, 이창호 九단이 이런 판을 이긴 건 다섯 차례나 있는데 반해 조九단은 한 차례도 없습니다. 그만큼 제자의 계산력이 정교했다는 거지요. 스승은 끝내기에서 번번이 진 것입니다. ![]() ▲ 초중반까지는 토끼처럼 앞서가다 번번이 종반에 반집으로 무너지기 일쑤였던 조훈현 九단이다. 나이 마흔을 넘어서며 체력적인 '에이징 커브'를 맞은 탓도 있었겠으나 계산력, 끝내기 싸움에서 밀린 탓이 컸다.
이렇듯 이 한판에 타이틀 명운이 걸린 결정적인 대국에서 연속 반집패를 당하자 주변에서 “다 이긴 바둑을 역전 당했다”며 위로를 건네곤 했습니다. 그럴 때 조훈현 九단은 오히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냐. 이제부턴 창호가 내 스승이야.” 조훈현 九단의 환골탈태(換骨奪胎) 노력은 1995년 2월 대왕을 잃으며 무관으로 떨어진 뒤 1년 만에 효과가 나타납니다. 1996년 3월 말, 자신이 16년 동안 내리 우승하며 ‘한 기전 최다, 최장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던 패왕전에서부터 제자에게 도전장을 내밀어 3대2로 탈환했습니다. 타이틀매치에서 제자에게 열다섯 번 내리 패퇴하다 (1994년 1월부터 이때까지 무려 2년 2개월 동안 제자와 벌인 각종 타이틀전에서 열다섯 번 연거푸 패배하다) 열여섯 번째 만에 이긴, 15전16기의 눈물겨운 승리이자 1년 만의 무관 탈출이었습니다. 이어 비씨카드배와 기왕까지 공략해 단숨에 3개의 타이틀을 회수하며 멋지게 재기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무대를 확장해 세계대회에서도 1997년 동양증권배 우승을 비롯해 1999년 춘란배, 2000년 후지쓰배와 TV바둑아시아선수권, 2001년 후지쓰배와 삼성화재배를 제패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 ▲ 2003년 1월 14일 중국 베이징 쿤룬호텔에서 열린 결승3번기 2국에서 중국 왕 레이 八단에게 231수만에 흑불계승을 거둬 2연승으로 전기 6기 대회에 이어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이때 나이가 49세 10개월로 세계대회 최고령 우승기록을 썼다.
기업가가 배워야할 승부사 조훈현의 생존법 조훈현 九단은 2016년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면서 젊은 후배들이 출전하는 기전에는 출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프로 데뷔 62년 동안 딴 타이틀 횟수가 무려 161회. 연평균 2.6회에 이릅니다. 평생 타이틀 하나 따 보지도 못한 채 사라지는 기사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헤아릴 때 이 수치는 실로 엄청난 기록입니다. 게다가 1988년 국제대회가 생긴 이래 메이저 세계타이틀을 딴 횟수만도 9회. 2003년 삼성화재배를 2연패했을 때의 나이가 49세 10개월이었지요. 바둑이 더욱 치열해지고 덩달아 체력과 집중력이 승부를 좌우하게 된 요즘은 30대에만 접어들어도 하향곡선(에이징커브)을 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승부사로서 고려장 소리를 듣고도 남음직한 나이에 젊은이들과 나란히 승부를 겨루며 빛나는 성과를 거둔 조훈현 九단을 보노라면 ‘천부적인 파이터’란 생각이 절로 듭니다. 조훈현, 하면 바둑계 최고의 블루칩이었습니다. 그러나 후발주자인 이창호라는 변수를 맞아 조훈현주식회사의 주가는 속절없이 폭락했습니다. 이때 과감한 기풍 변화, 국내대회보다는 상금이 훨씬 큰 세계대회로의 신속한 전략 변경 등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황금의 기회로 바꿉니다. 한국경제연구원의 <한국 기업의 생존 보고서>를 보면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Forbes)에서 1917년 당시 미국경제를 이끌던 100대 기업의 성과를 조사한 결과 39개 기업만이 생존해 있었으며, 이 중에서도 100대 기업의 위상을 유지한 기업은 18개에 불과했고 나머지 82개 기업은 경영성과가 미미하거나 사라져버렸다’고 합니다. 바둑의 조훈현주식회사가 초일류 장수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명확한 비전을 갖고 이창호라는 거대한 외부 환경에 맞서 발빠른 기업혁신으로 위기에 대응하고 이를 기회로 활용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처한 현실은 안심해도 좋은가요?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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