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초 국수에 대한 오해와 이해
노사초 국수에 대한 오해와 이해
17회 노사초배 전국바둑대회 개막에 즈음해
[노사초배] 정용진  2024-08-31 오전 01:10   [프린트]
▲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산 바둑 일인자. 나라를 잃어버린 후 바둑이 일본사람들에게 뒤떨어지게 된 원인을 “특수층이나 남자들만의 독점 오락으로 여기는 인습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나라 바둑은 그 질과 양을 탈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신랄하게 규탄한 노사초 국수의 면모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진은 한일병탄 무렵인 35세 때의 선생이다. (사진제공/한국기원)


예전에는, 조선시대의 국수들은 바둑을 하나의 직업으로 여기지도 않았고 사회적으로도 바둑인을 전문가로 취급해 주지도 않던 시대였다. 그저 풍류였다. 심지어 해방 후 조남철 선생이 고군분투를 한 이후로도 한동안 어엿한 분야로 인정받지 못했다. 따라서 후세가 이 시대의 산마루에서 서서 앞선 시대와 그 시대에 살다간 인물을 바라보며 평가할 때에는 당대의 시각으로 바라봐야 올바로 이해를 할 수 있다. 어느 분야나 매한가지다.

이는 주교와 귀족이 여전히 독점하던 시대에 태어나 활동했던 모차르트의 음악과 이에 견주어 중상인 계급층이 부상하는 시대를 살았던 베토벤의 음악이 어찌하여 달라질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하는 하나의 단서로 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엄청난 천재인 모차르트라 할지라도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안정적인 생계를 위해 평생 취업전선(궁정악장 자리)을 끊임없이 노크해야 했고 상류층의 음악 기호를 등한시할 수 없었다. (더 앞서 태어난 하이든은 말할 것도 없다. 말이 궁정악장이지 실질적으로는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연회와 휴식을 위한 작곡을 하고 악단을 이끄는 하인 신분이었다.)
그렇지만 이들보다 뒤에 태어난 베토벤은 후원자(귀족)들의 비위와 기호에 맞추지 않고서도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추구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와 불과 14년의 나이 차이에 불과했지만 베토벤의 시대에는 중상인 계급의 발호와 더불어 때마침 피아노 발달이 이루어졌고 부를 이룬 중상인층이 집집마다 피아노를 들이는 붐이 일었다. 피아노 연주는 그 시절 교양이었다. 자연 악보가 인기리에 팔리는 시대를 맞았고, 작곡가는 왕정과 귀족과 같은 특정계급에 기대지 않고서도 대중을 상대로 연주회나 작품으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음악이 더는 특정계급의 전유물이 아닌 시대가 도래했고 이는 자기 음악세계를 펼칠 수 있는 배경이자 발판이었다.

노사초 국수의 바둑생애에 대해 이해하려면 이처럼 그가 살던 시대상을 들여다봐야 한다.

30세에 정진한 늦깎이 바둑,
‘盧上패’로 불린 싸움바둑


노사초(盧史楚). 일제시대 말기 조선의 일인자로 군림했던 기사다. 1875년에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介坪里)에서 부자집안에서 태어났고 1945년 5월 23일(음력) 생가 사랑방에서 별세했다.
사초(史楚)는 호(號)이며 청년시절에는 士初(사초)라고 쓴 일이 있다. 이름은 노석영(盧碩泳)이다. 때로는 근영(近泳)이라고도 하였으며 20세 전에는 철영(喆泳)이라고도 하였다.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

권경언 6단(2022년 작고)은 월간바둑 87년 8월호 ‘동강만필(東岡漫筆)’에서 노사초 국수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 사초는 백남규 국수에게서 바둑을 배웠다. 처음에는 6점으로 지도를 받았으나 몇 해 안가서 곧 맞수가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으며 30세가 지나서야 비로소 바둑에 정진해 국수가 되었는데, 그의 천재성으로 미루어보아 만약 유년시절부터 바둑만 본격적으로 공부했더라면 굉장한 고수가 되었을 것이다.

- 사초의 바둑은 호방한 전투형이었고 특히 패싸움을 즐겨해서 ‘盧패’ ‘盧上패'였다. ‘노상패’란 노(盧)국수가 패싸움에 상수(上手)라는 의미이며 ‘노상 패싸움을 한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대국보가 10여 판쯤 기록으로 남아있으나 모두가 노년기에 둔 것뿐이며 사초 전성기에 둔 순장바둑 대국보가 없는 것은 유감천만이다.

▲ 노사초 국수 생가의 사랑채 대청마루에 덩그라니 놓인 바둑판. 국수는 여기서 무수한 기객과 수담을 나누었을 것이다.

내기바둑꾼으로 가산을 탕진했다는 오해

함양에서 2008년부터 열고 있는 노사초배 전국바둑대회 덕분에 이제는 많이 불식되긴 했지만 아직도 ‘노사초’ 하면 ‘내기바둑꾼’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안타깝고 답답하다. 노사초 국수가 태어나 산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프로페셔널’한 전문기사제도를 꿈도 꾸지 못할 때이다.

영화 ‘서편제’를 보더라도 그들이 산 시대는 참혹했다. 지금이야 광대로나 취급되던 예인(藝人)들이 선망하는 연예인으로, 창(唱)을 하는 소리꾼들은 국악인으로 또는 인간문화재로 대접받는 세상이 되었지만 국운(國運)이 기울고 백성이 각자도생해야 하는 암울한 시대, 게다가 신문물이 밀물마냥 들어오면서 외면받기 시작한 시절에는 명창(名唱)이라한들 헤쳐나갈 묘안이 없다. 지역 부호(富豪)가 내어준 곁방에 장기간 머물며 밤마다 소리를 하다 챙겨주는 소리값을 받아들고서 또다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구름 같은 신세. 점차, 날로 스러져가는 판소리와 소리꾼의 한맺힌 이야기-서편제를 보노라면 구한말 순장바둑의 대가들, 노(老)국수들의 처지가 겹쳐지곤 했다.

노사초 국수가 산 시대에는 돈을 건 내기바둑이 지금식으로 치면 상금을 놓고 두는 전문기사들의 프로페셔널한 대국이었다. 4대 바둑가문이 병립했던 일본 쇼군시대에는 일찍이 어성기(御城碁), 그러니까 어전 바둑경기가 있었고 봉록이 주어졌다. 이에 견줄 수조차 없었던 우리로서는 바둑인들의 내기바둑이 곧 프로경기나 다름없었고, 그 시절에는 예사로운 일이었다. 보통 바둑을 좋아하는 권문세가(權門勢家)나 부호가 판돈을 대고(대회를 개최하고) 선수를 따로 두었으나(수준 높은 기사가 뛰었으나) 명망가의 자손이었던 노사초 국수는 자기가 판돈을 대고 자기가 두었다.

권경언 6단이 ‘동강만필’에서 이 대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노사초 국수 시절에는 공식적인 바둑대회란 것이 없었고 지도료라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기사들은 내기바둑을 두었다. 내기바둑만이 기사의 유일한 수입원이 되었던 것이다. 사초도 역시 내기바둑을 두었다. 집문서, 논문서를 걸고 큰 내기도 두었고 동전 몇닢짜리 작은 내기도 두었다.
그러나 사초는 돈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기를 두어서 돈을 따면 가난한 기우들과 나누어 썼다. 게다가 오히려 내기에서 지는 경우도 허다하여 함평군 개평리의 집이 여러번 가차압에 걸렸다가 풀리곤 하는 바람에 등기가 무려 27번이나 변했다고 한다.
사초가 한번은 전라도 광주에 가서 내기바둑을 두는데 몰판으로 이긴 바둑을 “천무진살지리(天無盡殺之理)! (하늘의 이치가 다 죽이는 법은 없다)”라고 말하면서 상대방 대마를 살려주고 나서 도리어 한방을 져버린 적도 있다.”

사초의 증조부 노광두(盧光斗)는 호조참판을 지냈다. 증조부대에는 천석꾼 부자였으나 사초 당대에는 집안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세상사람들은 사초가 내기바둑으로 가산을 탕진했다고 말을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재산은 이미 아버지대에서 쪼그라들어 있었기에 잘못된 이야기다.

월간바둑 78년 8월호에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바둑계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노사초 국수의 집을 찾은, 노승일 기자의 탐방기가 나온다. 그때 노사초 국수의 장남 노상국 씨와 한 인터뷰가 있다. 노상국 씨는 선친의 재산탕진을 부인하였다. 기사를 옮기면 이렇다.

“울 아부지는 돈을 탕진한 게 아니고 돈을 몰랐던 것이오. 뭐 큰돈 없앤 것도 없어요. 원래 성품이…, 주머니가 비어야만 맘이 편하신 분이라….”

가산을 탕진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조부(사초의 아버지)의 정치자금 헌금 때문이었다. 사초 27세 때 부친은 10만 냥의 부채를 남기고 별세했다. 당시(1900년 전후) 보수파의 정점이었던 조(趙)대비의 친정아버지에게 정치자금 10만 냥을 내겠다는 어음을 떼고 돌아가신 것이었다. 사초는 농장의 상당한 부분(산청 땅)을 처분하여 그 채무를 정리하였다. 그러고 나니 그 많던 부동산이 대부분 없어졌다. 즉 가산을 크게 축낸 것은 조부이지 선친이 아니라는 게 노상국 씨의 주장이었다.

역시 ‘동강만필’에 보면 우리바둑계의 초창기 국수이며 한학자인 신호열 선생의 말이 노사초 국수의 내기바둑에 대해 단적으로 설명한다.

“내기바둑에는 악질적인 내기와 선비다운 내기가 있다. 악질내기는 자기보다 급이 낮은 사람을 상대로 암수, 사기수를 써서 돈을 털어먹는 것을 말함이요, 선비다운 내기는 서로 큰 손해가 없는 범위에서 운치 있게 두는 내기를 말한다. 노사초 국수는 절대로 악질적인 내기를 둔 적이 없는 분이다. 그 분은 바둑 동호인들에게 명국을 구경할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었다는 의미에서 바둑계에 이바지한 공로가 컸던 분이다.”

▲ 올림픽 성화 봉송처럼 노사초배의 시작은 대회 개막일 오전 노사초 국수 묘역 참배로 비롯된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 앞산에 뫼신 노사초 선생 사적비를 찾아 군과 대회 관계자와 자손들, 일부 참가선수들이 대회를 고하는 제를 지내고 하산하여 국수의 생가에서 차담(茶談)을 한 뒤 대회장인 고운체육관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뜻깊은 세리머니를 앞세우는 대회는 노사초배가 유일하다.

▲ 오전 10시 함양군 정해문 지곡면장이 노사초 국수 생가를 찾아 위패를 모신 사당(안채 뒤뜰)에서 대회를 고하는 제를 올렸다.

▲ 왼쪽에서 두번째가 생가를 지키고 있는 종손 노철환 선생이고 그 오른쪽 옆이 정해문 지곡면장, 그 옆이 함양군바둑협회 김종한 상임부회장이다.

▲ 노사초 생가가 보존되어 있는 개평마을은 전통 한옥마을로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같은 인물이 태어난 500년 마을이기도 해 역사적 가치, 관광지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함양군은 노사초 국수가 나고 살다 묻힌 개평마을 앞산(생가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인다) 묘역에 2008년 바둑 한판 둠직한 정자가 딸린 노사초공원을 조성해 노사초사적비를 세웠고, 노사초배 전국바둑대회를 만들었다. 생가인 ‘노(盧)참판댁’은 경남 문화재 사료 제360호로 지정해 선생의 바둑을 기렸다. ‘노참판댁 고가’는 호조참판에 추증된 노석규(사초의 고조부)가 1746년에 이곳으로 이거할 때 지은 것으로 이후 후대로 이어지며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 개평리를 가르는 계곡을 끼고 그 좌우에 자리 잡고 있는 개평마을은 정씨와 노씨가 주로 사는 집성촌이다. 조선 500년과 일제강점기 35년을 거치는 기간 무수한 고위 공직자를 배출한 마을답게 한눈에 부촌임을 알게 한다. 사초의 부친이 교리(校理)였으며 증조부 노광두는 호조참판이었다. 사초의 아우 노준영은 도의원을 지냈다. 일찍이 1920년대에 전기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함양읍보다도 먼저였다고 한다.

▲ 노사초 국수 생가인 노참판댁 안채 전경.

노사초 생가 ‘노참판댁 고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아래 블러그(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 노참판댁고가 블로그 ☜ 클릭


노사초배를 매년 여는 까닭

요즘 젊은이들은(어린아이들은 더할 것이고) 이창호 9단의 존재에 대해서조차 잘 모르는 눈치다. 알파고와 대결한 이세돌 9단까지는 알까? 초단위로 격변하는 시대에 현존 일인자 신진서 9단 한명 정도 빼고는 모두 잊히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물며 100년이나 지난 구한말 일제강점기시대의 일인자 노사초 국수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 없다.
지난해 강릉시에서 개최하는 허난설헌배를 취재한 적이 있다. 그때 대회에 출전한 여자프로기사들은 허난설헌 이름은 들어봤어도 이 위대한 여성시인이 바둑시를 남긴 인물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냥 강릉(사천면) 출신이라 그 고장 인물의 이름(허난설헌)을 내건 여자바둑대회거니 여길 수도 있다. 노사초배도 별반 다르지 않을까 노파심이 일었다. 경상남도 함양이 본향인 노사초 어른이 구한말 우리나라 제일가는 국수(國手)로서 순장바둑의 대가라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대부분 거기까지다. 그렇기에 노사초 국수의 내기바둑에 얽힌 에피소드에만 매몰된 경향이 있다.

한 인물의 이름을 내세워 대회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리고자 함이다. 한갓 내기바둑에만 빠져 집안을 내팽개친 바둑꾼에 지나지 않다면 함양군에서, 함양군바둑협회에서 16년째 물심양면 지극정성으로 대회를 열 이유가 있을까.

대회에 참가하면서도 노사초 국수의 바둑인생에 대해 미처 잘 모르는, 몰랐던 이들을 위해 71년 월간바둑 1월호에 유상로 님이 쓴 [바둑야화] 전문을 다음 기사로 소개한다. (아래 링크 클릭!) 요즘 맞춤법에 맞지 않는 표현과 일부 문장을 이해하기 쉽도록 조금 손을 보았다.

○● 노사초 국수(國手)와 내기 ☜ 노사초 바둑이야기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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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pediem7 |  2024-09-05 오전 11:31:00  [동감0]    
노사초배.
윤실수 |  2024-08-31 오후 1:01:00  [동감2]    
모짜르트와 베토벤이 고작 14년 차이이지만 음악가에 대한 인식이 차이가났듯 바둑관 역시 지난날과 큰 차이가 납니다. 40년 전만해도 법조인 의사 회계사 엔지니어 같은 전문직 엘리뜨 들이 취미가 바둑이라고 떳떳이 얘기했지만 지금은? 조치훈 명인은 80년대 초-목숨을 걸고 둔다-라고하여 바둑팬들의 경탄을 자아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하기엔 상금이 다른 인기종목에 비해 너무 작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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