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심심파적(破寂)으로 한시를 몇 편 읽고 있었는데, 추사의 시에 눈길이 멈춰졌습니다. <바둑을 노래함(咏棋)>이란 제목인데, 모르는 글자가 하나도 없건만 그 뜻이 아리송하여 도통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궁금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뒤적이기 시작해 이틀 만에 겨우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 감상기를 적으니 제대로 된 것인지 아닌지 강호 제현의 질정(叱正)을 감히 받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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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원문과 문자적 풀이는 다음과 같다.

咏棋(영기)-金正喜(김정희)        바둑을 읊다-金正喜(김정희)

局面南風冷暖情(국면남풍냉난정) 바둑 판 위의 남풍은 차고도 따뜻한데

古松流水任縱橫(고송유수임종횡) 고송에 흐르는 물은 종횡으로 마음대로구나

蓬萊淸淺非高着(봉래청천비고착) 봉래 바다 맑고도 옅으니 높은 곳이 아니며

橘裏丁丁鶴夢輕(귤리정정학몽경) 유자 속의 바둑돌 부딪는 소리 학의 꿈이 가볍구나

첫 구부터 막힌다. 바둑 판 위의 남풍은 차고도 따뜻한 정이 흐른다? 대체 이것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이리 저리 굴려 보아도 도통 감이 오질 않는다. 인터넷을 뒤적여도 신통한 답을 찾을 수 없고. 에라! 남풍(南風)에 무슨 뜻이 있는지 한자사전이나 다시 뒤적여보자 하고 검색을 하니 그 밑에 남풍불경(南風不競)이란 성어가 눈에 뛴다.

南風不競 : 중국(中國) 남쪽의 음악(音樂)(☞南風)은 음조(音調)가 미약(微弱)하고 활기가 없다는 뜻으로, 대체로 세력(勢力)이 크게 떨치지 못함을 이르는 말

옹? 이런 뜻이? 순간 첫 구와 둘째 구가 휙 풀리는 것이다. 국면이 신통치 않구나. 바둑 내용이 좋지 않아 차다(冷)라는 말을 쓴 것 같다. 난정(暖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 두는 것 자체는 좋다>하는 뜻이 아닐까?

둘째 구의 고송유수(古松流水)는 동양화 소재로 빈번하게 그려지는, 말 그대로 오래되어 가지가 구불구불한 소나무와 그 밑을 이리저리 흐르는 물을 나타내는 말이니, 청산유수 또는 세속을 떠난 한가한 모습 등 혹은 승패를 떠난 것으로 대강 짐작을 하고. 임종행(任縱橫)의 임(任)자를 찾아보니 맡는다는 뜻 뿐 만 아니라 <마음대로 하다>라는 뜻도 있었다. 아하! 종횡을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니 이리저리 막 둔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기승(起承)구는 다음과 같이 보여 진다.

局面南風冷暖情 바둑 내용은 썩 좋지 않으나 두는 것은 좋아해

古松流水任縱橫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마음대로 둔다

세 번 째 구인 전(轉)구에서 또 애를 먹는다. 蓬萊淸淺非高着. 봉래야 금강산을 말하기도 하고, 신선이 사는 섬을 말하기도 하는데, 제주도도 예전에는 봉래라 불렀으니 별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 다음 글자 청(淸)이 문제였다. 물 맑을 청이니 제주 바다가 맑으데...옅으나 높지 않다? 이게 대체 뭔 소리고?

거기다 천비고착(淺非高着)? 보통은 심천(深淺), 고저(高低) 이렇게 대비하는 것인데, 얕을 천(淺)과 높을 고(高)를 대비한다... 이건 뭔가 좀 이상하다. 봉래 바다가 얕다?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다 문득 봉래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렇지!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간 적이 있었지. 답이 확 풀리는 기분이다. 아하! 이렇게 읽어야 하는구나.

蓬萊 淸淺 非高着. 얕을 천(淺)에 고루(固陋)하다는 뜻이 있으니 淸淺은 귀양 생활이 험하나 마음은 편하다는 혹은 청빈한 삶이란 소리이겠구나. 그렇다면 非高着은 양반으로서 떵떵거리는 그런 삶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겠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던가! 귀양생활을 한가롭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읽혀진다. 그렇게 보니 기(起)구와도 뜻이 상통한다.

<바둑내용이 썩 좋지 않아 기분이 언짢음> 對 <험한 제주 유배 생활>

<바둑 두는 것을 좋아함> 對 <불편한 귀양 삶을 느긋하게 받아들임>

마지막 결(結)구는 비교적 막힘이 없었다. 귤중선(橘中仙)에 대한 고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橘中棋 : 옛날 파공(巴邛)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 귤나무에서 큰 귤 하나를 따서 쪼개보니, 그 안에서 세 노인이 바둑을 두며 즐거워하고 있더라는 고사. 橘皮逃世

이 고사를 몰랐다면 <귤>로 풀어야할지 <유자>로 풀어야할지 고민 좀 했을 것이다. 제주도 유배와 관련하여 거의는 후자로 풀었을 것이고, 더 심하게는 바둑 두던 곳이 아마도 감귤 밭이 아니었을까 추정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橘裏丁丁鶴夢輕

丁丁(정정)은 바둑돌 놓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 橘裏丁丁(귤리정정)은 귤중선이 귤 속에서 바둑돌 놓는 소리니, 그 소리가 가볍다는 뜻이다. <학의 꿈>처럼 일지 <꿈속의 학>일지는 대세에 영향이 없는 듯하다.

이렇게 놓고 보니 두 번째 승(承)구와 결(結)구도 대비가 된다.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한가롭게> 對 <귤중선의 가볍게 돌 놓은 소리>

<이리저리 마음가는대로> 對 <학의 꿈같이>

이상을 토대로 추사의 속마음으로 추정되는 용어와 감정으로 정리해본다.

局面南風冷暖情 바둑 내용은 썩 좋지 않으나 두는 것은 좋아해

古松流水任縱橫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마음대로 둔다

蓬萊淸淺非高着 제주의 삶이 비록 거칠어도 세상 명리 떠나고저 

橘裏丁丁鶴夢輕 신선같이 바둑이나 두며 나는 학같이 가볍게 보내리

이제 다시 이것을 한시 격(格)에 맞추어 시적 언어로 재정리한다.

咏棋(영기)-金正喜(김정희)         바둑을 읊다-金正喜(김정희)

局面南風冷暖情(국면남풍냉난정) 국면은 안 좋아도 두는 정만은 따듯해

古松流水任縱橫(고송유수임종횡) 늙은 솔 흐르는 물 이리저리 마음가는대로

蓬萊淸淺非高着(봉래청천비고착) 봉래 삶이 거칠어도 명리에 마음 없어

橘裏丁丁鶴夢輕(귤리정정학몽경) 귤 속 바둑 돌 소리 학의 꿈처럼 가벼워

추사가 제주에서 유배 생활할 때의 진짜 속마음은 이런 것 같다.

조정 벼슬살이 할 때는 비록 떵떵거리고 살았는지 모르겠으나, 갖가지 번잡하고 더러운 일들을 피할 수는 없었는데, 제주 생활은 비록 힘이 들어도 마음에 짐이 없이 훨훨 날아가는 듯한 삶을 즐긴 것 같다. 이렇게 고결한 심성과 한적한 마음이 <세한도>와 같은 명작을 제주에서 이루어낸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숙연해짐을 금할 수 없다. 더구나 제주를 신선이 산다는 봉래로 또한 자신을 한마리 학(鶴)으로 비유함에 이르러서는 선골도풍(仙骨道風)의 기운마저 감지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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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제가 추사의 시를 감상한 과정이었습니다. 제대로 본 것인지 아닌지 선학(先學)의 진심어린 편달을 받고 싶습니다.

<참고로 맨 위 문자적 풀이는 한문고전번역원이라던가 거기서 번역한 것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