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태백산의 바둑축제가 열렸다. 작년에도 참석하여 태백의 정기를 흠뻑 받았던 적이 있었으므로 이번에도 필히 참석하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당초 계획은 예전같이 기차로 갈 생각이었으나 이렇게 저렇게 <영바모>님하고 연락이 닿아 동행하기로 하였으니...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는 비가 올 것을 알렸다. 우산을 하나 챙기고 허적허적 전철에 몸을 실었다. 잠실역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영바모>님과는 작년 구리모임 이후 뵙는 것이니 무려 1년 3개월만의 재회였다. <영바모>님의 친구 분과 함께 하기로 했단다. 대학동기인데 출판업을 하신단다. 여하튼 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워 무는 동안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점점이 굵어진다.

H출판 K대표님의 차가 도착하여 탑승하고 태백으로 출발. 가는 동안 이러저러 이야기꽃이 피었다. 한국의 출판계와 문화계 등에 관한 이야기며 그동안의 근황에 대한 시시콜콜한 잡담까지. 한편으로는 궂은 날씨 탓에 참가인원이 적지 않을까 염려도 되었다.

갈수록 날씨는 더욱 거칠어진다. 그 탓이었는지 예정시간보다 다소 지체되어 태백에 도착했다. 이미 어두워져 태백시내에서 당골로 가는 길을 약간 헤매었다. <빈삼각묘>님과 통화했다. 상세하게 길 안내를 받고 재정비하여 당골을 찾아갔다.

<빈삼각묘>님은 갑자기 공무가 생겨 참가하지 못하신단다. 일 년 만에 뵐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밀물처럼 스며온다. 시간을 보니 저녁 7시 20분이었다. 이미 다 모였을 텐데 우리가 제일 늦겠구나. 보고픈 마음 탓인지 태백 시내에서 약간 헤맨 것에도 조급증이 슬몃 일었다.

모임 장소인 <장수촌> 식당을 들어섰다. 부산하게 복작이던 작년과는 다르게 식당이 한가하였다. 역시 날씨 탓인가! 저 한편에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당근돼지>님이었다. 형제분들과 서울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이야기 끝에 다함께 오기로 의견합일을 보았다던가! 다섯 형제가 참석하셨단다. 지구를 지킬 셈인가! 독수리 오형제가 아닌 당근 오형제가 태백산행을 하기로 하셨다니, 끈끈한 형제애에 다들 혀를 내두른다.

후덕한 풍모의 <그대그시절>님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칠십대 중반의 고령(?)으로 아마도 태백에 오는 것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말씀과 함께 60년대 초 첫 직장생활을 이 태백에서 하셨다는 경험담을 들려주신다. 아울러 당신은 이런 모임에 자주 참가하고 싶으나, 다른 이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앞으로는 자제하기로 하였다는 말씀에 그런 염려는 붙들어 매시라고 말하면서도 <그대그시절>님의 타인에 대한 배려심에 슬며시 고개가 숙여졌다.

<당근돼지>님은 오후 3시경에 도착하셨단다. 이미 약주는 전조가 있었다. 그러건 저러건 한잔 안 할 수야 없지 않은가! 닭볶음탕에 산나물 장아찌, 그 비싸다는 금치(?)에 이러저러한 밑반찬과 함께 일배 일배 부일배.

<팔공선달>님 일행이 약간 늦는다는 전언이 있었다지만 8시 15분이 넘었는데도 도착하지 않는다. 궁금증이 일어 전화했더니 30분 이내면 도착할 수 있단다. 술을 마시면서도 걱정이 된다. 보고 싶다는 기대 반, 궂은 날씨라는 걱정 반. 30분이 넘었는데도 연락이 없다. 다시 전화하니 조금 더 걸린단다. 이래저래 9시를 훌쩍 넘긴 시간에 이르러서야 식당문을 열고 들어선다. <당근돼지>님은 피곤하시다고 이미 숙소로 떠난 이후였다.

<팔공선달>님과 우렁각시, <황소걸음마>님과 웬 묘령의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 왁자지껄하게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중년 여성이 살짝 말한다. “저 <새야날자>입니다.” 이런~! 집사람의 고등학교 후배라는, 미국에 산다는 여성동지가 여기 태백에는 웬일? 몸이 아파 국내에 요양 차 왔단다. <雪影>님이었다.

<팔공선달>님이 늦어진 이유를 설명한다. 운전하고 오면서 이야기에 정신 팔다 제천IC를 지났단다. 또 원주IC도 지났단다. 회차하여 원주시내에 들어섰는데 네비게이션의 안내대로 갔더니 출발지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으로 다시 왔다나. 이래저래 원주시내에서 40분 정도를 헤매었단다. 궂은 날에는 길 도깨비가 장난을 치는 것이야 예전부터 있었던 일. 이 여현이 일갈했다. “냄비게이션 도깨비한테 홀렸구만.”

감자 부침개를 안주삼아 이번에는 동동주를 시켰다. 동동주를 마시는 동안 식당이 소란해진다. 날씨 탓에 이제들 도착한 모양이다. 한상렬 사무총장을 비롯하여 조대현, 김영환, 박종렬 등 프로기사. 심우섭, 조민수, 김정우, 김영진, 박성균, 임진영 등 전국구 아마 강자들. <응봉동사랑>님도 보였다. 나이 어린 친구들은 아마도 주니어 대회에 참가할 강자들일 것이다.

중간 중간 태백시 및 태백바둑협회 관계자 분들이 각 테이블을 다니시며 내일의 행사에 대한 안내를 해주셨다. 일기 예보는 내일 날씨가 정오 무렵에는 갤 것이므로 천제단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한단다. 개막식은 청소년수련관에서 진행되고. 사소한 것조차 넘어가지 않고 하나하나 챙겨주시는 그 마음씨에 고마움이 절로 인다. 느즈막히 식당이 소란스러워질 때 우리는 숙소로 자리를 옮겼다.

<팔공선달>님과 <황소걸음마>님이 쑥덕대더니 밖으로 슬그머니 나간다. 잠시 후 한보따리 싸들고 들어왔다. 소주, 맥주, 막걸리에 안주거리. <팔공선달>님은 새벽같이 일어나 백담사로 가서 봉정암까지 들러보고 올 계획이라나. <황소걸음마>님을 비롯한 일행들은 그게 될 법한 소리냐 어쩌구 저쩌구. <그대그시절>님이 먼저 자리를 뜨셨다. 술이 들어가면 금방 취하면서 말이 많아지는 <팔공선달>님은 기어이 <황소걸음마>님한테 한소리(?) 얻어먹었다. 이러저러 주상(酒床) 잡담에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우리도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떠보니 새벽 6시였다. 닦고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이렇게 부산을 떠니 한 사람 두 사람 자리에 일어선다. K대표와 <영바모>님은 산책하러 밖에 나갔다 오신다. <황소걸음마>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영환도사한테 도전해서 꼭 이기고 싶다는 등 바둑으로 화제가 옮겨졌다. 바둑이나 한판 두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 이른 아침에 어디서 바둑판을 구하나?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수선을 떤 끝에 바로 옆방에 바둑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염치불구하고 문을 두드려 바둑판을 빌렸다. 오로7단인 <황소걸음마>님과 작년 조조식전대국에서는 이 여현이 졌었다. 느긋하게 포석을 진행하는데 식전 모닝커피가 조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