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가 어슴푸레하다.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양치질 후에 자리에 앉는다. 지긋이 아래로 시선을 두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정적만이 맴돈다. 종소리가 들려온다. 집 가까이 있는 고찰에서 새벽 4시 20분이면 어김없이 쳐대는 소리다.

숨결에 정신을 싣는다. 몸이 구멍 뚫린 문풍지 같다는 허적감(虛寂感)에 소스라친다. 젠장! 쓴웃음이 절로 난다. 나이를 먹어가더니 뇌세포도 많이 죽었나보다. 젊을 때는 다리만 틀면 별별 잡생각이 다 나더니만, 이젠 그럴 세포도 없는 모양이다. 다시 답답한 감정이 밀려온다.

나는 비교적 사변적(思辨的)이다. 집안 교육 탓도 있으려니와 실상은 어릴 때의 충격 때문이었다.

초등4학년 말 때였다. 밑으로 네 살 적은 동생이 운명을 달리했다. 자식교육을 위해 강화(江華)에서 인천으로 온 가족이 이주를 한지 일 년 조금 넘었나? 쉽게 말해 도시화 과정에서 촌아이가 적응 실패한 것이다.

함께 뛰어놀던 골목길을 가다보면 형! 하는 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면 아무 것도 없다. 옆 골목에서 누군가 뛰쳐나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휙 고개를 돌려봐도 역시 아무 것도 없다. 저녁 해가 뉘엿뉘엿해질 때면 정말 보고 싶었다. 미칠 듯이 그리웠다.

비록 열한 살 남짓의 어린 나이였지만, 인간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강하게 일었다. 그 유한성이라는 것에 절망했다. 존재의 궁극이란 질문이 짓눌러댔다. 청소년기를 거쳐 지금까지도.

그때의 충격과 경험은 자아의식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분별심이 깊어졌다. 그리고 직관력과 통찰력을 키우는 바탕이 된 듯하다. 종교적인 것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했다. 그 당시 내게 있어 종교란 유일신교로 한정되어 있었다. 불교는 무속과 같은 계열의 미신이라고 어릴 때부터 집에서 교육받은 탓이다. 그러나 분별심은 나로 하여금 유일신교에 대한 불신의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이십 대 초반에 라즈니쉬 서적에 푹 빠졌었다. 노장사상도 뒤적였었다. 역사 특히 우리의 상고사 쪽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서 고유사상과 고유종교에 대한 갈증이 생겨났다. 살아있는 신선(神仙)이라던 봉우(鳳宇)선생의 글들을 읽었다. 최인호의 <길 없는 길>이란 소설을 통해서 불교에 대한 서적을 접하기 시작했다. 유가의 가르침에 대한 그리움도 일었다.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우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우주의 나이가 137억년이라던가. 처음에 빅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의 모든 원소가 만들어졌단다. 순간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이 충격이 왔다.

물리, 화학 등 짧은 과학상식이 빠르게 회전한다.

빅뱅이 있었다면 열과 빛이 났을 것 아닌가? 137억 년 전에 발생한 에너지는 물질이든 빛이든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허블망원경에 잡힌, 우주 끝이라는 곳에서 날아오는 빛은 최초의 Event 때 그것이 아닌가? 지금 비추고 있는 태양 빛은 8분 20초 전 것이라던가. 내가 라이터 불을 켰을 때 발생하는 빛은 현재 빛?

시종(始終)이 공존하는 것 아닌가! 처음과 끝이 함께 하니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 아닌가? 비로소 천부경의 무시무종(無始無終)이 퍼뜩 다가온다. 그렇다면 과거, 현재, 미래 삼세제불 운운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나란 무엇인가? 몸과 생각으로 이루어진 나는 누구인가? 뇌세포의 작용으로 생각이라는 것이 즉 의식작용이 일어난다. 결국 세포들로 구성된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몸의 세포를 구성하는 원소는 137억 년 전 그때 생성된 그 원소들이 아닌가? 나라는 것은 137억년 최초 우주 그 자체 아닌가? 내가 곧 우주? 어렴풋이 무아(無我)라는 개념이 손에 잡힐 듯 말 듯 한다.

삼십년 전의 이 몸과 생각은 현재의 그것과 같은가? 그 세월 동안 숱하게 많은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들이 생겨났어도 결국 초기에 생성된 원소들끼리 자리이동만 한 것 아닌가?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 착각하고 있었을 뿐 전혀 새로운 <나>가 아닌가? 차이가 있다면 응집력 또는 결집력의 차이라고나 할까? 젊음은 세포의, 원소의 결집력이 높고, 늙어 감은 그 응집력이 느슨해져가는 것일 뿐. 따라서 어제의 <나>도 오늘의 <나>도 내일의 <나>도 각각 다른 <나>이며, 각각 다 같은 우주일 뿐이리라.

다른 이는 어떤가?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곧 너. 네가 곧 나?

만물은 어떤가?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곧 만물이요 만물이 곧 나 아닐 까닭이 없다. 범신론적 견해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말 역시.

현재의 나는 이런 모습(相)이다. 저런 모습이면 어떻겠는가?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그른가. 내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고, 그 모습에 기대고자하는 것은 아닌가. 불구부정(不垢不淨)?

물질과 에너지는 상호 변환성을 갖는다는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공식 E=mc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늘 일정하다. 아니 일정해야 한다. 열역학 제일법칙이다. 부증불감(不增不減)?

열역학 제이법칙은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무질서로의 진행.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만 같은 바위며 태산이며 지구며 태양이며 은하도 언젠가는 사라져 갈 것이다. 우주도 역시 언젠가는 사라져갈 것이다. 혹시 빅뱅의 반대 현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빅뱅이 핵분열의 과정이었다면 언젠가 엄청난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 에너지를 내뿜으며 모든 원소들을 회수해가지는 않을까? 만물은 그런 것이다. 생주이멸(生住離滅)할 뿐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어느 날 TV에서 <인심(人心)은 유위(惟危)하고 도심(道心)은 유미(惟微)하니 운운 윤집궐중(允集厥中)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서경(書經)에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오직 위태롭고, 道의 마음은 감추어져 있으니 그 가운데를 잡아라.>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인심은 무엇이며 도심은 무엇인가? 혹시 인심은 전오식(前五識)과 의식을 합한 육식(六識)이고, 도심은 마라식과 아리아식인가? 아니다. 아리아식은 함장식으로 요즘 말로 데이터베이스고 마라식은 분별식이라던데 이것 역시 사람의 마음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도심(道心)이란 대체 무엇인가?

蓋上天 云云 其理則謂道 云云 率性則謂之道 修道則謂之敎 (近思錄)

개상천 운운 기리즉위도 운운 솔성즉위지도 수도즉위지교 (근사록)

대저 하늘의 이치를 도라 한다. (사람에게 命한 것을 性이라 하니) 성품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성(性)을 따르는 마음 - 도심(道心)은 유미(惟微)하다 했는데, 지미(至微)는 숨김(隱)이라 했으므로, 참 성품을 따르는 것은 은밀하게 숨겨져 있으니 그 가운데를 잡으라(닦으라) 하는 정도의 뜻일까?

참 성품? 참 마음? 참 나? 불성(佛性)? 그렇다면 도심이 간시궐(乾屎橛 : 똥 치우는 막대기)이라는 말인가? 뜰 앞의 잣나무가 바로 그것이었다는 말인가? 모를 일이다.

대체 나(我)라 할 것이 무엇이며, 나와 남을 나누는 것은 또한 무엇이며, 나와 만물을 분별하는 것 역시 무엇이며, 고정불변할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대체 아트만이란 무엇이며, 영혼이란 무엇이며, 실체란 무엇이며, 실존이란 무엇인가.

소옥을 부르는 까닭은 님이 그리워서인가. 돌장승에 매질하는 것은 도둑을 잡기 위함인가. 새벽별을 보거나 말거나, 닭 우는 소리를 듣거나 말거나, 돌이 굴러가거나 말거나, 보리가 익거나 말거나.

눈 푸른 납자의 성성한 수행이 그리워진다. 눈 밝은 선지식으로부터 할(喝) 소리와 함께 그 주장자로 세차게 맞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