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중순 경이었다.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동기 기우회장을 맡고 있는 친구로부터 <yes24.com배 고교동문전> 출전과 관련된 모임이 있으니 6월 20일 ○○기원에서 모이자는 것이다. 순간 근 3년 가까이 바둑을 멀리한 나로서는 하품이 나왔다. ‘아! 골치 아프게 생겼군.’ 동기 모임 총무를 맡고 있으니 귀찮지만 회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날렸다.

<yes24.com배>가 창설되었던 3년 전 제1회 대회 때 참가한 경험이 있었다. 초창기라 바둑TV에서 전국 지역별로 16개 학교를 대상으로 초청장을 보냈다. 그때 참가하여 16강전에서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P고를 이겨 파란을 일으켰었다. 8강에서 바둑명문고인 C고에 완패하였고, 결국 C고가 초대 챔프에 올랐다.

그 이후 2회 때도 선배가 참가를 권유했지만, 당시 지방에 일이 있어서 사양했었고, 3회 때는 어찌된 일인지 연락도 없었다.

그럭저럭 일요일이 되어 모임 장소에 나갔더니 꽤 많은 동문이 모여 있었다. 또 동문은 아니지만 지역 최강자이자 전국 아마10걸 멤버였던 L7단도 조언자 자격으로 와 있었다. 단장 역을 자임하여 다방면으로 희생을 아끼지 않으시는 선배 분께서 그간 경과와 이번 대회에 관한 취지와 대회 규칙 등을 설명하신다.

작년, 재작년에는 나이 지긋하신 원로선배들로 선수 구성을 하였는데, 완패를 당했단다. 다른 학교들은 참가하지 못해 난리도 아니라는데, 우린 매년 초청받고 있으니 기회가 아니냐? 더구나 이번 대회부터는 감독제가 신설되었다. 우리 지역의 강자 S九단을 감독으로 영입할 예정이고 이미 내락을 받았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대로 구성해서 망신 좀 당하지 말자. 뭐 대강 이런 투의 이야기와 대략 3개 팀 선수 구성 초안을 잡고, 바둑 한판씩 두고, 저녁 먹고 헤어졌다. 다음 번 모일 날을 정하고.

갱년기 증상을 심하게 겪고 있나? 작년부터 기억력, 집중력이 급격하게 떨어짐을 느껴왔다. 매사에 의욕도 꽤 줄어들었다. 그 동안 바둑을 멀리했으니 바둑공부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발양론, 관자보, 맥 관련 바둑 책들을 찾아서 옆에 쌓아두기는 했지만 도통 귀찮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

첫 출전 때는 간간히 바둑도 두고 하던 때였다. 망신은 당하지 말자는 의욕도 있어서 전략, 전술, 초반 30수 등의 포석 책과 맥 사전, 절묘한 맥 시리즈, 사카다의 묘시리즈, 사활문제집 및 현현기경 등을 한 번씩 훑었었다.

그나저나 모이기로 한 날은 다가오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뭐 제대로 되는 게 있겠어?’ 우리 동문들 특징 중 하나는 모래알 같다는 것이다. 다른 학교는 동문 모임도 활성화 되어 있고, 선후배간의 끈끈한 정도 꽤 과시하지만, 우리는 좋게 말해 그런 것에 초연해하는 분위기가 주류다. ‘고생만 하게 생겼구만.’

대회 출전 이틀 전에 연락이 왔다. 내일 모이자는 것이다. 감독으로 영입하려고 했던 S九단은 다른 일로 안 되고, 대신 동문 출신 프로기사 Y八단이 맡기로 했단다. 이러저러 논란 끝에 대략 세 팀 선수를 확정지었다. 얼추 꽤 시간이 지난 후에 Y八단이 나타났다. 대략 전반적인 작전 지시를 받고, 저녁자리로 옮겼다. 우리 동기에서는 예비선수까지 포함 네 명이 참가하기로 했다. 그 중에는 지하바둑세계에 은거하고 있는 친구도 있었다. 저녁을 먹으며 “너! 적당히 술 마셔라. 내일 주전 선수로 뛸 건데 그저 반주 정도로만 마셔. 그리고 오늘 모임 끝나면 집으로 곧장 들어가라. 행여 다른 사람하고 어울려서 2차 가지마.” 신신당부를 했었다.

대회 당일. 모임 장소에 나갔더니 썰렁했다. 동기 두 명은 일이 있어서 오늘 못가겠단다. 기분이야 씁쓸했지만 예비선수니 그저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주전으로 뛸 친구 하나가 안 나타나는 것이다. 전화를 수차례 했지만 받지 않는다. ‘그러면 그렇지.’ 욕이 절로 나온다. ‘기원 구석에 쳐 박혀 내기나 두는 놈들이 시간 개념, 약속 개념 없는 것 한두 번 봤나.’ 투덜대며 일행에게 출발하자고 한다. 도대체 동문들에게 면이 서질 않는다.

홍익동 한국기원에 도착하니 선배 분들도 거의 도착했다. 상대는 전통의 강호 K고. 감독님도 나타나셨다. 다 같이 의기투합하여 힘껏 싸우자고 전의를 다진다. 우리 선수들은 실력이 아마 5~6단 정도. 그러나 상대는 아마 6~7단의 강자들이다. 감독님은 1장에게 너무 많이 두어놓지 마라. 여기서 작전을 짤 수 있는 여유를 남겨놓으라.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결정하지 말고 그대로 철수해라. 지시를 내린다.

1장으로 들어간 선배가 바둑을 너무 많이 두어 놨다. 막간의 시간에 2장에게 다시 작전지시가 떨어진다. 그런데 2장 선배가 떡을 쳐 놓았다. ‘아차! 큰일이다. 이거 잘못하면 패전처리 뛰겠구나.’ 정신이 번쩍 났다. 잽싸게 줄행랑을 놨다. 동기들이 다들 불참하는 바람에 면이 없어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는데, 단장은 이미 버린 판에 선배님들 출전시켜 체면 구기게 할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대국>

밖에 나가 담배 한 대 피우고 있는데, 단장 선배가 헐떡이며 나를 찾는다. “야! 너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고함 소리에 원망어린 눈빛으로 “형님....!” “야! 다 알어. 그러나 어떻게? 네가 나가야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대국실에 들어섰다. 반면을 보니 20집이 넘게 차이나 있었다.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방송진행도 생각해줘야 한다. 아직도 우리 쪽 시간이 8분이나 남은 것이다. 대강 대강 마무리하고 계가를 마쳤다.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복기하는 척 좀 해달란다. 몇 마디 씨부리고 종국.

원래 계획은 3국에서 뛰기로 되어 있었다. 점심을 먹으며 다시 작전을 짠다. 상대가 아무리 강호라도 우리가 한판 정도는 못 건지겠나? 2:0 승부는 방송진행 입장에서 부담스러우므로 약간의 사전조정이 들어갔을 것이다. 이번 판은 저쪽 팀에서 약체가 나올 것이다. 뭐 대강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결승전에는 참가 경험이 있는 사람이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방송대국은 변수가 많다. 스튜디오에 들어가 바둑판 앞에 앉으면 머리가 하얗게 된다. 조명에 계시원에 분위기에 눌려 자기 실력 발휘를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웬 걸. 상대는 2국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전국대회 입상경력의 아마7단 강호 선수들을 투입한 것이다. 아뿔사! 잘못된 정보였구나. 무참하게 무너졌다.

다들 허탈한 마음으로 뒷풀이를 한다. 이러저러 이야기 끝에 모임을 정례화하기로 했다. 두 달에 한 번씩 감독님과 함께 모인다. 감독님은 스스로 감독 내지 사범의 자격이 아니라 동문 자격으로 참석하시겠단다. 초중종반 선수를 선정하여 집중훈련을 시키자. 각 기수 바둑 모임도 이날 같이 여는 것으로 하여 연합모임으로 발전시켜나가자. 뭐 대략 이런 정도의 의결이 있었다. 단장 선배는 노래방까지 모시며(?) 나를 달랬다.

다음 날 불참자들에게 결과도 알릴 겸 전화기를 들었다. 지하바둑 선수는 우리가 모였던 기원에서 그곳 독립군들과 반가운 마음에 한잔 마시기 시작한 것이 밤을 새웠다던가.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선배들 전화번호 알려주며 사과 전화하라고 했다. 얼마 후 단장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놈 전화했더라. 일단 야단은 쳤고, 다른 선배들한테는 내가 알아서 무마할 테니, 그놈 잘 달래서 다음 모임부터 빠지지 않게 네가 책임지고 참가시켜라.”

<美人인 Camera Girl>

아무려나 일거리만 하나 더 늘어난 듯하여 공연히 심드렁하다. ‘그러건 저러건 바둑 공부를 하긴 해야 할 터인데...올해 망신당한 것 내년에는 복구를 해야겠지?’ 슬그머니 마음을 다잡아 본다.

그나저나 대기실 취재를 담당하던 훤칠하고 아름다운 카메라 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삼삼하게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