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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중사. 에필로그.

2015-08-18 오전 12 조회 8594추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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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중사 에필로그.

뒤안길에서.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났다.

미친 듯 퍼붓던 눈은 어느새 멎어 있었지만,

짙게 내린 어둠속에서도 흰 빛을 뿜어내는 눈은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하지 않으려 외롭게 애쓰고 있었다.

탁자에는 혼자 마신 것으론 꽤 많은 술병이 쌓여있다.

너무 많은 양을 마신 술꾼에 횡포를 두려워해 흘끔 거리며

주위를 맴돌던 주인도 지쳤는지 보이지 않는다.

긴 回億을 털어 내고자 밖으로 나섰다.

이상스레 술은 계속 마셔도 마음은 눈을 뜨고 깨어 있었다.

쏴아~ 하고 바람이 지나갔지만 추억의 잔재는 한줌도 쓸려가지 안았다.

마음 전체가 잠겨있는 옛 기억 속에서 현실로 돌아오고 싶지 않은

미묘한 기분은, 나도 모르는 억센 기운으로 낮에 만나지 못했던

친구가 혹시 돌아 와 있지는 안을까 하는 궁금함까지 꾹꾹 눌러댔다.

변혁이 많았던 가정사로 일찍 고향을 떠난 탓에 내게도,

어린 시절에 기억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래선지 추억에 군데군데가 비어있는 불연속성에 아쉬움이 늘 가슴에 있다.

잘 들추지 않아 둔 곳을 잃어버린 한 권의 앨범을 찼듯

유년 시절에 기억을 찾으려 추억 찾기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내가 쥐고 있던 어스름한 기억의 퍼즐 몇 조각을 들고

끼워 넣을 자리를 찾아, 나이에 맞춰진 고향을 뒤졌다,

어린 날 우리의 놀이터였을 동네 어귀 옆,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벼 타작을 하던 공터를 찾아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날로 돌아가는 통로는 사라지고 없었다.

입구가 될 만한 자리는 빽빽하게 서있는 아파트들에게 점령당해

모두 메워져 버려 없었고, 나는 그저 작은 한숨 몇 개만

그 자리에 남기고 돌아서야 했다.

너무 아쉬워 돌아오다 석양빛에 물들어 전구의 필라멘트처럼

밝게 빛나던 눈부신 구름을 보았던 행운은 큰 위안이었다.

어릴 때 놀이에 팔려 저녁 밥 때가 되도 돌아오지 않는 나를,
질질 끌다시피 데려 갔던 어머니의 모습을 또 하나 찾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래 서있어도 추억 속으로 더 이상 한 발도 더 들어가지 못한
나는 맥없이 돌아왔다.
매체가 강렬하지 않은 기억은 추억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지 못했다.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1년 안쪽의 시간이지만 그의 모습,

그의 음성을, 나는 아직도 어제 일처럼 간직하려고 애쓴다.

길거리에서 든 영화 한 장면 속에서라도 행진하는 모습이나,

헉헉 거리며 구보를 하는 젊은 군인들을 만나면 나는 김 중사에게

쌓여가는 먼지를 털어내고 닦아내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어쩌면 김 중사는 젊은 날. 내 모습을 찾아가는
기억의 창고를 열게 하는 열쇠로 남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면, 언제라도
김 중사는 젊음의 추억을 거느리고 문을 열어 준다.
그 창고에는 사나이다웠던 박 상사도, 12km를 완전 군장으로
목숨을 걸고 뛰었던 내 전우들도 점호를 기다리고 있다.

똥별 사단장도, 거품을 물고 소리 지르던 대대장도.
병아리 냉가슴을 앓았던 윤 대위도, 부대 앞 구멍가게 천안 댁도,
아무 곳으로도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있다가 나를 반긴다.
김 중사가 열어 준 추억의 창고를 열면 나도, 아주 젊고
싱싱한 모습의 젊은 군인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들과 어울릴 수가 있다.

면회실 창밖을 내다보며 기다리다 연병장을 건너오는 내 모습이 보이면,
잘 튀겨진 통닭 봉투와 술병을 흔들어 보이며 내게로 달려오던
환한 미소에 그리움을 익살에 섞어 보내던 내 첫 사랑도,
그들과 손을 맞잡고 쟁여져 있다가 내게 달려와 꿈을 꾸게 해준다.

김 중사가 먼저 떠났고 뒤이어 나도 떠나온 자리이지만,

내가 그를 그리워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

김 중사는 내가 부르는 손짓을 따라 언제나 잠을 깨고 곧 다가와 준다.

나는 그가 걷지 않은 세월에 길을 더 많이 지나 왔지만, 김 중사는

내가 지나온 젊은 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군복을 입었던 그날들이 주었던, 두 사람이 공유했던 자리에는

지금은 많은 공터를 부여받은 나만이 남아있다.

그립다고 보고 싶다고 내가 지나온 시간의 길로 돌아가 살 수는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그어진 선을 그조차 마음대로 넘을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건 그리워하며 뒤돌아보다 마음만 잠시 다녀오는 것 .

그것 밖에는 없다.

한 생애의 깊게 박힌 편린처럼 남아있는 김 중사와 나 만의 우리는
쌍 다리 집을 나서고 찬바람이 내 머리를 차갑게 식혀오자
다시 서로의 길을 가기위해 헤어져야했다.
비어있는 바로가기 파일이 언젠가 필요한 자리를 점유한
불편함으로 삭제되고 말듯, 번거로운 일상에 밀려난 기억들은
스스로 추억의 창고 속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옛사람들 끼리 모여 있는 곳에서 그 문이 다시 열릴 때까지
잠을 청할 것이다.

오늘처럼 문득 거닐게 될 청춘의 뒤안길에서
내가 그를 다시 그리워 할 때까지,
나는 또 그를 깊이 묻어두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막차인 듯싶은 버스의 운전기사가 나를 보더니
빈 차로 돌아가지 않으려는지 요란스럽게 클락션을 울려대고 있다.
세상 속으로 발을 깊숙하게 다시 밀어 넣는다..

-끝-

내게 가장 빛났던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내다 유성처럼 사라진
김 중사를 다시 회상하며, 1년 중 가장 뜨겁다는 더위에 며칠을
3년 만에 컴퓨터 앞에서 오롯이 지냈습니다.
시간이 한참 또 흐르면 덧없는 짓을 했다는 후회를 낳을지 모르지만,
여름 하나를 세월에 흘려보냅니다.

답하는 글도 없는 해우소가 되어 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읽어 주시는 분들의 해량을 기대하는 염치없음을 남깁니다.
놀이터를 오로에 두신 모든 기우님들의 건강을 기원 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때의 댓글입니다.

꿈속의사랑 ｜ 2010-12-18 오후 6:49:2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젊은 날의 아련한 기억....김중사.. 그동안 잘 보았습니다...

一圓 쟁여둔 이라는 멋진 단어 알려주셔서 허락도 없이 차용해 썻읍니다 ㅎ 설익은 글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근돼지 ｜ 2010-12-19 오전 11:35:2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그동안........ 재미있게 잘 보고 감사 드립니다.

AKARI ｜ 2010-12-19 오후 1:10:1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잘 읽었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어요...

인연이 거기까지라니...;;

토닥토닥토닥 화이팅~

조아해유 ｜ 2010-12-19 오후 4:38:0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다시한번 구우벅 ,넘잘읽엇슴니다,

팔공선달 ｜ 2010-12-19 오후 5:19:4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수고많았읍니다. 그리고 감사했읍니다.(__)

홍선비 ｜ 2010-12-19 오후 6:08:1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한자락 아픈 추억의 조각 ....잘보았습니다

一圓｜ 2010-12-20 오후 12:35:0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추억이 잠시 내어준 오솔길을 함께 걸어 주셨던

담돼 형님,꿈속의 사랑님,조아해유님,아카리님,팔공선달님,홍선비님,

에취님,월곡천님,소라네님,가능동아이님 너무너무 고마웠읍니다

채 여물지 않은 글을 읽고도 나무라지 않고 함께 해주신

나작의 모든 이웃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고맙읍니다

aichi ｜ 2010-12-20 오후 11:56:19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님의 아픈 추억을 잠시 빌려 제 가슴속에 넣어 보았습니다.

죽이고 싶은 인간이 둘 있었는데 그것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군요.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 때의 경험이 외국에서 억척같이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추워서......... 눈물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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