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면서 바람 따라 이리저리 뒹구는 낙엽이 조금은 스산하다. 바람도 제법 차가워지는데 그럴수록 걸어가는 두 남녀의 팔짱낀 모습은 오히려 따뜻해 보인다. 문득 생각나는 시조가 있다.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인공옥)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야니 진옥(眞玉)일시 적실하다
    내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 송강 정철(鄭澈)

철이 철이라커늘 섭철(攝鐵․잡철)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야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 기생 진옥(眞玉)

    「근화악부(槿花樂府)」라는 책에 있다는데, 이 시조를 처음 읽고는 아주 놀랍고도 흥미로웠다. 서로의 이름을 빗대어 풀어내는 육담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읽어볼수록 외려 은근한 감칠맛의 풍류가 느껴졌다. 정철 선생님(이라 해도 될는지?)이 무척 부러웠다.

정 선생님께서 애기 진옥에게 한 수, 턱～ 하니 던진다.
    ‘살송곳으로 뚫어볼까 하노라’

그러자 옹골차고 재치있게 응수를 한다.
     ‘골풀무로 녹여볼까 하노라’

     이 아니 어찌 부럽고 사랑스럽지 아니한가! 이른바 궁합이 맞다.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을까. 쓰다듬는 손에 다소곳이 몸을 맡기고 있을 두 분이 그려진다.

햐…, 내게도 저래 예쁜 여인이 있다면….
    그러나…, 내가 저렇게 멋있는 문장을 구사할 재주도 없거니와 위치도 되지 못하니 언감생심이고, 있더라도 부담스러웠을 게다 .

사랑하는 남녀의 교합은 아름답다. 더구나 얼마쯤의 원초적인 한 마디는 엑스터시(ecstasy)한 분위기를 만들어 부드럽고도 몽환적인 전희가 되지 않을까. 그 야생성과 노골성을 이처럼 거부감 없이, 감칠나게 세 줄 문장으로 엮어내는 두 분을 존경한다.

날이 차가워지니, 저런 얘기쯤 스스럼없을 여자 하나 안으면 좀 따뜻할까. 퇴근이 가까워져 밖은 어두워져 간다. 창밖의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데도 하릴없이 집으로 가려니, 그렇게 헛된 몽상이라도 잠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