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집을 덥석 계약해놓고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여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교통, 통신의 불편함 그리고 외로움 등등. 그중 가정부 문제도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필리핀이나 태국처럼 생각하고 바로 되겠지 했는데 이 나라에서 가정부는 인도네시아나 캄보디아, 미안마 등의 외국인들이 아니면 좀처럼 구하기가 힘들었고 이들도 절차가 간단하지가 않았다..

은행 이발소 등을 통하여 알아본 인력대리점들과 통화를 해보니 기간이 약 3개월 정도 걸리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필리핀에서 알아본 필리핀 가정부의 월급보다 약 3배정도 높았고 그 연봉 절반 이상의 금액을 별도로 대리점에 수속비로 지불해야 했으며 계약만료시의 귀국 비를  담보해야 했다. 또한 계약서란 것이 상거래계약서가 아니고 인력신청서였으며 고용한 지 3개월 이내에만 인력의 변경 또는 교환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깨알 같은 글씨의 단서조항에는 3개월 이후에는 도주 또는 형사문제 등으로 인한 사고에 대하여 대리점은 일체 책임을 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즉시 계약은 만료되는 것으로 본다고 적혀 있었다 .

어처구니없는 계약이었지만 건평 76평의 집에서 혼자 매일 1-2층을 오르내리며 여기저기의 도마뱀 배설물을 치워야하고, 택시를 타고 다니며 구해온 식료품(대부분 인스탄트였지만)을 조리하고 치워야하는 자취생활에 너무나 질려있는 터라  대리점 어느 한 곳을 골라 불쑥 서명을 해버렸다. 병을 고치러 왔다가 여러 가지 스트레스 때문에 오히려 다른 병이 걸릴까 두렵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후덕하게 생긴 중년의 중국인 여사장은 계약서의 불공정한 조항들에 의구심을 보이는 나에게 “남자 혼자 있는 집에는 가정부를 보낼 수 없으나 미스터 리는 나이가 60이 넘었기에  특별히 주선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오히려 생색을 내기에 그 옆의 중국 식당에서 상어지느러미 요리까지 대접을 하였다. 그러나 3개월 이내라고 쓴 계약서와는 달리  4-5개월이 지나도  가정부는 데려오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쪽에서 말레이시아에의 인력수출에 제동을 걸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행이도 계약을 한 지 보름 만에 언니 집에 놀러온 누를이라는 인도네시아 아가씨 한 명이 소개되어 비공식적으로 일을 하도록 하였다. 단기 여행 비자를  가지고 와서 공식적인 직업을 찾으려는 중 우리집에서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해주는 가정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다. 대리점에 의뢰한 가정부가 올 때까지만 있기로 하고 이튿날부터 출근을 시켰다.

열여덟 살이라고 한 그녀는 열다섯 미만으로 밖에 보이지 않은 까무잡잡한 동안의 소녀었다. 그녀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고 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서투를 뿐만 아니라 느리기도 하였었다. 사기그릇이나 유리컵도 여러 개 깨뜨려 먹었다.  또한 영어는 겨우 몇 마디 밖에 통하지 않아 거의 한 달 동안은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밥솥과 자동세탁기 작동하는 법을 비롯하여 된장국 끊이는 법 반찬 만드는 법 및  청소도 구석구석 하는 방법 등을 손수 몸으로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가 조금 숙달되니까 시간만 나면 소파에 앉아 TV만 보는 것이었다.  내가 밖에서 돌아와도 소파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TV에 열중해있는 것이었으며 심지어는 식사 시간이 되어도 상을 차릴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가 많아졌다. 그녀의 언니와 형부를 불러 몇 번 주의를 주었지만 천성이 개으른 것 같았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거나 지갑이나 물건에 손을 대는 일은 전혀 없는 것 같아 가끔 이웃이 찾아와 “주인보다 더 편한 그리고 버릇없는”행실을 꼬집었지만 철이 덜든 손녀 딸 같은 아이로 생각하고 감싸주기까지 하였다. 가끔은 지각을 하기도 했는데 형부 오토바이가 고장이 났다거나 언니가 아파서 병원에 갖다 오느라고 늦어졌다는 등 변명도 여러 가지였지만   거짓말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지각을 한 날은 그만큼 늦게까지 일을 하여 시간을 맞추어주었기 때문에 일부러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늦게 출근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6개월이나 있었다. 대리점에서 수배한 가정부가 그만큼 늦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 그녀는 나에게 승용차에 달 마스코트를 하나 선물했는데 오뚝이 모양의 손바닥 크기의 "바틱" 천 인형이었다. 눈알은 프라스틱을 붙였는데 마치 그녀의 약간 튀어나온 눈을 닮았었다. 조잡하기는 했어도 손재주가 대단하다고 느껴 지금도 운전석 오른편에 매달고 다닌다. 

그녀는 결국 이곳에서 일자리 찾는 것을 포기하고 인도네시아 집으로 돌아가 결혼을 한다고 했다. 철부지 아이가 서른 몇 살의 신랑을 맞이한다고 해서 약간 처량한 생각이 들었지만 하여튼 결혼 축의금을 두둑이 주어 보냈다. 내 어께 밑에서 들먹거리며 눈물까지 흘렸던 이별이 인도네시아에 가서 새로운 삶의 시작일진데 부디 행복할 것을 빌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바람직스럽지 못했는지 2년 후에 마사지사로 다시 말레이시아에 들어왔었다.)    
  
새로운 가정부는 야띠라고 하는 인도네시아 자바 출신의 아주 키가 작은 서른두 살배기 여인이었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내가 월남전 참전 때 빈딩성 B 군청의 지하벙커에서 키운 적이 있는 원숭이를 연상케 하여  그곳 산족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용모가 촌스러웠다. 그러나 어쩌랴. 아직도 인도네시아 인력수출이 풀리지 않아 어느 중국집에서 일하던 이 여인을 빼오는데도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하는데......

야띠는 말레이사에서 5년 이상을 생활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일의 가닥을 짚을 줄 알았다. 누를의 숙달되었을 때 모습보다 훨씬 잽싸게 청소며 빨래며 밥 짓기를 처리하곤 하여 그런대로  마음이 놓였다.

조금 곤란한 문제는 그녀가 24시간 집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부작용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원래 지어진 건물에 “메이드 룸(가정부 방)”으로 만들어놓은 방이 있긴 있었는데 부엌에 딸린 창고 같은 조그마한 장소였다. 메트리스 하나 깔면 거의 꽉 차 버릴 습기 가득한 공간이었다.(이곳에서 메이드 방은 침대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인의 정서로는 가정부도 한 집 식구인데 그런 곳에 기거하게 한다는 것은 너무 차별을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주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아예 그 곳에 김치냉장고와 기타 취사 장비를 보관하는 창고로 쓰고 대신 거실 안쪽에 딸린 식당 옆의 침실을 제공했다. 뒷뜰 쪽으로 큰 창문이 하나 달렸고 에어컨 장롱 그리고 화장대도 설치되어 있다. 사워실 겸 화장실은 바로 옆 방이다. 그래서 그냥 비워두느니 그 곳을 쓰면 외국인 가정부가 장기간 정을 붙이고 생활하는데 충분할 것 같았다. 대리점 여직원들이 “와, 호텔 방이네!“하면서 시샘 겸 비아냥을 놓았지만  벽에 몇 개의 그림도 걸어주었다.

3개월동안 야띠는 이웃 중국인들과도 친해지고(?) 경비원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는 둥 그녀는  나름대로의 영역을 구축해나갔다. 그러나 저녁 7시가 되면  그녀는 그녀 방으로 들어가 다음날 7시까지는 화장실 겸 목욕실을 드나드는 이외는 전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그 시간 이후에 주위에서나  싱가포르에서 손님이 찾아온다, 해도 그녀와는 결코 무관한 일이었다. 누를과는 달리 손님이 찾아와도 커피 대접을 한다거나 소주 안주를 만드는 것은 그녀의 일이 아니었다. 식사를 차릴 때도 손님이 있건 말건 내 밥과 국만 준비해놓고는 식사하란 말도 없이 그녀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노크를 하여 인원수대로  상을 다시  봐 줄 것을 부탁하여야 뭐라고 구시렁대면서 억지 몸짓으로 상을 다시 봐준다. 몇 번이나 이야기 했는데도 그 것은 메이드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장은 항시 같이 갔다. 시장은 그녀가 유일하게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장소이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쇼핑 시간은 횟수가 늘어날수록 길어졌다. 식료품이나 생활용품을 같이 산 뒤 그녀는 그녀의 용품을 사기위해 내가 차에서나 커피 집에서 기다리는 동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그런 시간이 어느 때는 한 시간도 넘는다.

낮에 오침을 하는 것도 그녀의 권리요, 가끔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고 기도를 하는 것도 그녀의 권리였다. 샤워는 하루 서너번을 넘기도 했다. 그녀는 가정부가 아니라 골통 기술자였다.점점 그녀가멀어져보였다. 물론 처음부터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어느 날 한 집 건너의 이웃인 중국인 “찬”이  그의 집 앞에서 내 차를 세웠다.
“가정부 이야기인데요. 주민들 사이에서 불평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니, 그녀가 무슨 잘못이라도......?”
“경비원과의 관계가 이상한 것 같아요. 경비원 중 사라왁이 고향이라는 젊은 친구 있지요? 예쁘장하게 생긴 친구.“
“예, 알 것 같군요.”
“그 친구, 이 선생님 운동나간 때는 아예 집 뒤에서 산다고 합니다.  그 친구 아침 식사는 아예 "야띠”가 준비해주고 가끔 요리한 음식물도 경비실로 보낸답니다. 전번엔 우리 집에 달걀을 빌리러 왔어요. 집사람에게 다섯 알만 빌려달라고 하여 빌려주었다고 하더군요, 모두 그 친구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끔 그 친구 집안에도 들락거리는 것 같아요. 제가 미리 관리사무소에 경비원들이 어느 집이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주의를 주라고 말은 했습니다만....... 그 친구 사실은 마을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경비원이거든요.“

나는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달걀 소모량이 많아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은 그녀가 닭고기나 달걀로 보충을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사라왁 남자친구 때문이라니...... 그리고 손만 부딪치어도 기겁을 한 그녀가 외간 남자를 만나고 있다(?)  매일 저녁만 되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인도네시아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기 때문에 매주 시장에 갈 때마다 전화료 보충(top-up)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여자가. 그러고 보니 화장품도 좀 사는 것  같고.... 또 무슨 물건을 사는지 자꾸 쇼핑 시간이 길어진 이유가 그 친구 용품을 사느라고 그런 것 아닌지......? 그리고 또 얼마 전에는 가불도 요청하였었지.

“찬”에게 내일 운동 갔다 오면 정식으로 이야기를 해야겠으니 말레이어로 통역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번 기회에 나도 사무적인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그러기 위해서는  말레이어에 서툰 나보다는 제 3자인 “찬”이 통역과 동시에 그녀를 설득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첫째 나와 내가 허락한 사람 아니면 누구도 집안으로 들여서는 안 되고 외부인과 특히 경비원들과 오랫동안 이야기하지 말 것. 둘째 음식물을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절도나 다름없다. 셋째 내 허락 없이 다른 집에서 물건을 빌리지 말 것.  만일 차후 이를 어겼을 경우 바로 해고를 하겠다. 넷째 이제부터 급료를 절반만 지급하고 나머지 절반은 기한이 만기가 되었을 때 한꺼번에 지불할 터이니 이의가 있으면 대리점에 이야기 하라. ”

“찬”이 생각보다 길게 말레이어로 통역을 하였다. 아마 주민들이 그녀를 관찰했던 사실까지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말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는데요.,,,,,,,?”
“이웃들이 몇 번이나 보았다고 하던데......”
“내가 마당 청소를 할 때 도와준다고 마당에 들어온 일은 있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온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전번에 정원수를 다듬어달라고 한 적도 있긴 있었는데 방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내가 순찰 돌다가 돌아온 그와 이야기 좀 한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것입니까?”

그녀는 오히려 “찬”에게 대들다시피 하였다.  

“집안이라 함은 울타리 안을 이야기 것이이야. 주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대문 안에 사람을 들여서게 할 수 없어.그리고 12시간 어쩌구 하는데 너만큼 편한 가정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오침 시간,기도 시간 다 주고 시장 데리고 나가고...이런 주인한테 고맙다는 인사는 안하고 음식물을 빼돌려? 네가 싸 준 음식물을 여러 차례 경비실에서 나누어 먹는 것을 본 사람이 많아. 그들이 모두 네가 준 음식이라고 자랑을 하고 있어. 그래도 되는 거야? 그리고 경비원이 업무 시간에 업무이외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우리 주민들이 용서 못 해. 특히 아말은 더욱 안 돼.”

“찬”이 역정을 내었다.

“그 음식이 뭐 자기들 것인가? 내가 안 먹고 주는 것이라면 어쩔 건데......” 그녀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얘가 못된 것만 배웠구먼. 대리점에 이야기해서 당장 해고해야겠는데요.”

-그러지 않아도 이웃 아주머니들이 “쪼그마한 인둔(인도네시아 인)이 거들먹거리며 주인 행세를 한다.”고 말이 많은 여자인데 직접 이야기를 해보니 역시 방정맞기가 한량없다고 "찬"이 혀를 찼다.  

다음날 오후 대리점 여직원이 찾아왔다. 어제의 이야기를 하자 나이가 훨씬 어린 말레이 여자가 날카롭게 야띠를 불렀다. 야띠가 엉거주춤 서 있자 여직원이 다시 호통을 쳤다. 야띠가 털석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여직원의 서슬 시퍼런 호령에 현관유리창이 흔들린다. 야띠는 적진에 잡혀온 포로였다. 이런 섬뜩한 광경은 월남참전 때 보았었던 월남 경찰들이나 군 정보부 직원들이 베트콩 포로들을 신문할 때를 기억나게 만들 정도였다. 대리점 여직원은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대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그런대로 순진하게 보인 그녀에게 어디서 그런 성깔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미스터 리. 이제 걱정 마세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당분간  급여는 주지마세요. 대신 가불을 한 달에 100링깃 이내에서 해주시면 됩니다.“

그녀가 야띠에게 뭐라고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마 중국인 집에 일당일 시키겠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전에 그녀는 중국인들에게 매도 많이 맞았다고 했다. 일당 나가는 것은 대리점에 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 손에 쥐어진 돈은 거의 없다. 창고같은 합숙소에 동거시키면서 숙박비 의복비 등등이일당보다 더 떨어져나간다.  

그 후 야띠에게 달라진 게 있었다. 가끔 전에 없던 엷은 웃음을 띠우며 자기 자신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열네 살에 시집을 가서 얘가 둘이라는 둥  그 중 한명은 직장을 다니고 다른 한 명은 아직 학생이라는 둥  일본 영화 ”오싱“을 보았다는 둥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띄엄띄엄 터놓기 시작했다. 대리점 주의사항이 몇 가지 있었는데 주인은 가정부의 인적사항을 절대 물어보지 말라는 것도 있었다. 대답하는 것 거의가 다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라기보다 전의 누룰과는 전혀 인상이 다른 아띠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엄격하게 대하여 왔었고 그녀 역시 나를 ”나이 많은 독거노인“ 취급을 하면서 제 할 일만 할 따름이어서 나는 그녀의 이름이 야띠라는 것과 나이 32살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고 그 외에는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었다. 

그러던 그녀가 대리점 여직원이 왔다 간 뒤로 가끔 몸도 가볍게  부닥쳐오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제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그러면서도 그녀는 매일 다섯 번의 기도를 빼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말을 좋아했느냐?”
“좋아하는데 시라왁에 부인이 있어요,”
“너도 남편이 있지 않느냐?”
“제 남편은 작년에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떳어요.”
“아, 미안. 그런데 아말도 너를 좋아하느냐?”
“............잘은 몰라요.”
“혹시 돈 빌려준 것이 있다든지 빌려달라고 하지 않더냐?”
“아, 아닙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거린 것으로 보아 내가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이슬람법에 여자는 유부남을 사랑할 수 없지 않느냐?”
“..........”

차를 정문 옆의 공터에 세워두고 경비를 서고 있는 아말을 불렀다.

“너 정말로 야띠를 좋아하느냐?”
“...........” 그는 내 의도를 파악하고자 했다.
“만일 좋아한다면 모스크에 가서 결혼식을 하고 살면 되지 않느냐?”
“,,,,,,,,,,돈이 없습니다.” 

나는 그가 결코 야띠를 좋아할 리 없다고 판단했다. 집으로 돌아와 야띠에게 더 이상 아말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또 한번 그와 돈거래를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의 실실 웃는 모습을 보고 내가 잠시나마 결혼을 중재하고 우리 집에 당분간 살 수 있도록 주선해줄려는 한 순간의 마음이 부질없는 동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께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더욱 기도에 열중했고 어느 때는  쿠란을 너무도 크게 낭송하기도 하여 가끔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일도 열심히 하여 집안은 더욱 말끔해졌다. 아말과 가끔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인사를 건네는 정도의 짤막한 시간뿐이었다.

그러나 “찬”을 비롯한 이웃들은 이러한 나의 증언을 믿지를 않았다. 밤에 야띠의 방 창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아말을 몇 번이나 본적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아말을 해고해야겠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경비원들 중에서 유일하게 젊은 아말은 같은 경비원들 사이에서도 신용이 좋지 않다고 했다. 야띠가 준비해 준 음식물을 돈을 받고 팔기도 했고 소액의 돈을 갚지도 않으면서 자꾸 빌려달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소문은 야띠의 돈도 약 2000링깃 정도 빌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이 덜 깬 몸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뒤뜰로 연결된 부엌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처마 끝 밑으로 난 하수도를 둘러싸고 회중전등을 휘번득거리고 있었다. 대문 앞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마을 사람 3분의 1은 우리 집을 에워쌓은 것 같았다. 

“여기 있다. 고뿌라”
“경비원을 불러라”

사람들을 헤치고  집 뒤 뜰로 나가 수챗구멍이 파인 정방형 구덩이를 들여다보니 검은 색갈의 커다란 구렁이가 마치 구덩이의 주인인양 똬리를 틀고 삼각형 머리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회중전등에 비친 놈의 눈빛은 불안과 공포에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문득 며칠 전에 몇 포 사놓았던 쥐잡이 끈끈이(rat-trap)를 생각했다.  끈끈이를 몇 장만 뿌려도 놈은 꼼짝도 못할 터였다.

“야띠, 야띠”

나는 부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다 안에서 황급히 나오려는 “아말”과 부닥쳤다. “야띠"방문은 반쯤 열려있었는데 ”야띠“는 기척이 없었다. 나는 창고로 들어가 끈끈이 포를 들고 나왔다, 인도인 어린애가 뜰채를 들고 문 앞을 나서려는 내 앞을 지나쳤다. 철조망 울타리 밑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고 여러 사람들이 한사람을 덮쳤다. 나는 수챗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콩알만 한 구멍들이 원형을 그린 철판 한가운데 어른 엄지 손가락만한 구멍이 뚫린 수채망만 보일 뿐이었다. 놈의 머리통 절반도 안 되는 구멍 속으로 어떻게....?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연립 주택의 뒤뜰은 폭 15메타 길이 200메타정도의 잔디밭으로 뻥 뚫리어 있는데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어 같은 라인의 어린애들이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베드민튼을 치기도 하였었다. 어른들도 밤바람을 쐬기도 하고 어린애들과 같이 놀아주기도 하였는데 그날 밤도 우리집 두 집 건너의 인도인 가족들이 뒤뜰에 있다가 아말이 우리집 안으로 사라진 것을 보았었다. 애들이 살금살금 우리집 쪽으로 와서 한참동안 동정을 살피던 중  한 마리의 고뿌라가 철조망을 넘어 꼬불꼬불 잔디밭을 횡단하는 것을 보고 기겁하여 어른들에게 알렸고 어른들은 주위사람들을 불러 모았던 것이었다. 아말은 고뿌라 대신 주거 침입범으로 잡히게 된 것. 꼬리가 긴 놈은 꼬리에 묻은 지푸라기 때문에도 화를 당하는 법이었다.)
              
아말은 이튿날부터 나타나지 않았고 며칠 후 야띠는 별로 많지도 않은 옷가지들을 챙겼다.대리점 여직원이 몸 조사를 하다 보니 열쇠가 하나 나왔다. 바로 부엌 뒷문에 채워놓았던 튼튼한 자물통의 열쇠였다. 항시 채워져 있던 그 자물통이 그날 밤은 채워져 있지 않았던 것이 그때야 생각났다. 

그녀는 외국 땅에서 주홍글씨를 달고 소리 없이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