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산 이름이 무엇입니까?"

식당에서 갈비탕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먹어버린 후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 마시면서 주인집 사내에게 물었다.

"주흘산 입니다."

"저 산을 넘어가면 어디죠?"

"문경새재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게 코스인데 반대로 타시려 하나요?"

"한번 가 보려고요"

"지금 출발하면 도착하지 못하고 밤중이 될 겁니다. 예서 하룻밤 유하시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시는 게,"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이미 주흘산을 타기로 결정했다.

점심때가 막 지나서 태양빛이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여기서 올라가는 길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등산로로 가시려면 저쪽으로 한 시간쯤 가야 됩니다."

"저 산을 질러 올라가면 등산로를 만날까요?"

"만나 지기야 하겠지만 길이 없어서 고생 할 텐데요"

졸졸 흐르는 실개천을 지나 산을 타기 시작했다. 길은 없었다.

난 무조건 정상을 향해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삼십분쯤 오르자 숨이 턱에 차면서 등에 진 배낭이 점점 어깨를 눌러왔다.

산을 얕보는 건 자살행위다. 산 앞에서 사람은 겸손해 져야 한다. 나는 그 진리를 거부했으므로 지금 개고생이다.

두 시간쯤 올라가자 저만치 등산로가 보였다. 온몸은 땀에 젖고 시계를 보니 네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내려간다고 해도 저녁 무렵 이었다. 내친걸음 이었다. 나는 산을 넘어 문경새재를 가기로 결심했다.

등산로를 따라 걷다가 바위위에 앉아서 숨을 고르는데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시원하다고 느끼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고 내 옷은 금방 비에 젖었다.

"혼자 다니다간 들짐승 밥되기 십상이지."

누군가 내게 말했었다. 그 말이 오늘 적중하려나 보다. 나는 손전등을 꺼내서 조심조심 비추면서 길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문경새재에 도착할 듯싶었다. 비를 피할 데도 없고 사람을 만날 수 도 없었다.

바닥이 미끄러운 데다가 쏟아지는 폭우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안경이 비에 젖어서 가뜩이나 밤눈 어두운 나는 거의 장님처럼 더듬거리면서 기다시피 행군을 했다.

무섭지는 않았다. 대신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엄한 비가 폭우가 온몸을 적시고 배낭을 적시고 팬티를 적시고 고추를 적시고 끝내는 내 마음까지 적시고 있었다.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엉금엉금 기어 내려가고 있다. 춥고 어둡고 다리가 아프고....

그러다가 그만 낙엽에 미끄러지면서 등산로를 이탈했다. 한참을 미끄러져 내려오는데 손전등을 떨구었다.

다시 더듬더듬 기어오르는데 손전등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길은 어딜까. 손전등은 어디 있을까. 눈을 감고 오 분쯤 주저앉아 있었다. 번쩍 콰르릉. 천둥이 치고 번개가 쳤다.

그리고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마치 등짝을 후려패는듯 했다. 번개가 지나가고 칡 흙 같은 어둠.

그 어둠을 가르는 손전등의 빛이 보였다.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다는 것이다.

나는 손전등을 잡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장대같은 비를 맞았다.

등산로를 따라 내려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전등을 끄고 나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단전에 기를 모으면서 심호흡을 시작했다.

호.....흡....호...흡.. 호와 흡 사이가 점점 길어지면서 마음에 평안이 왔다. 비가 쏟아지면서 나는 공연히 흥분했던 거 같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옛날 어르신들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니까..

가만 명상에 잠겨야지 요런 잡스런 생각이 맴돌지.. 이윽고 나는 내 자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빗소리도 멎고 등짝을 두들기던 매운 손길도 멎고 ......

눈을 뜨자 비는 멎어있었다. 한참을 다시 그렇게 앉아있자 거짓말처럼 달이 떠올랐다.

보름달이었다. 마음한켠이 부듯이 차오르면서 나는 천천히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꿈이었던가?

내 삶의 역경도 결국 이런것 이었던가? 자고 깨듯 허무한 삶에서 나는 왜 아등바등 거렸던가.

달은 떴지만 커다란 나무들 때문에 길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손전등을 켜자 등산객들이 매 둔 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마음 산악회라던가 뭐 그런 글자들을 읽다가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쓰적쓰적하고 비 묻은 바지가 허벅지를 쓸었다. 꺼끌꺼끌하더니 한걸음 걸을 때마다 쓸렸다.

모자를 벗어서 탈탈 털어내고는 다시 썼다. 옷도 무겁고 배낭도 무겁고 그래도 길은 보이고 비는 오지 않는다.

배낭 속에서 라면을 꺼내서 부셔서 먹었다. 그러다가 스프도 살살 뿌려서 먹었다.

영남의 선비들은 과거를 보러가기 위해서 반드시 문경새재를 넘어야 했다.

여긴 골짜기, 골짜기 산 구비 산구비마다 전설이 많다. 영원처럼 걸었다.

가도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내가가는 길이 옳다는 믿음만이 나를 지탱하게 해준다.

갑자기 개울물소리가 진동한다. 바라보니 커다란 성이 보였다.

다가가서 보니 제이 관문이라고 적혀있었다. 제이 관문에서 제일 관문 까지는 약 한 시간 거리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시 십 분이었다.

나는 노래를 부르면서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걸었다. 한참을 걸어 내려오면서 촬영 세트장을 만났다.

집들은 텅 비어 있었고 거긴 고려시대가 재현되어있었다.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여궁 폭포라는 팻말이 보였다. 손전등을 비추어 표지판을 읽었다.

"여자의 하반신 모양을 한........."

십 분정도 걸린다고 한다. 나는 여궁 폭포로 길을 잡았다. 길이 가팔랐다. 이윽고 여궁 폭포에 도착했다.

폭포는 생각보다 작았지만 물소리는 굉장했다. 나는 문득 배낭에 있는 소주를 떠올리고 찾아서 이로 병을 땄다.

벌컥벌컥 하고 마시자 뱃속이 따스해지면서 기분이 야릇해졌다.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고 정신이 멍청하기도 하고 명료하기도 했다.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옷을 벗었다.

조심스럽게 신발도 벗고 마침내 알몸이 되어 여궁 폭포로 들어갔다.

덜덜덜 떨려왔지만 막상 물속으로 잠기자 몸이 진정되었다. 너와 내가 합일 하는 거다.

폭포야, 여궁 폭포야, 오늘 너와 내가 알몸으로 한판 하는 거다.

그러나 너무 추워서 내 성기는 형편없이 쪼그라져 있었다.

달빛에 보니 정말 불쌍한 번데기처럼 오그라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깊은 데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아, 탄성을 질렀다.

정말 여인의 하체를 닮아있었다.

이럴 수가, 이렇게 노골적일 수가, 이렇게 직접적일 수가,

주름살이 세로로 잡히고 검은 구멍까지 정밀하게 묘사한 까닭에 민망할 정도다.

그러면서 아랫도리에 힘이 불끈 솟았다. 하 하하하하 이 새벽에 너와 내가 한판 하는 거야.

내 목소리는 우렁차게 계곡에 울려 퍼졌다. 그래 제대로 한번 하자, 난 벌써 오 개월이나 굶었단다. 그래 기억이 난다.

마지막 섹스의 기억. 그리고 난 몸도 마음도 엄청 외로웠느니라. 나는 조그맣게 흐느끼다가 점점 큰소리로 울었다.

헤엄을 치면서 울었다. 물장구를 치면서 울었다. 잠수를 했다가 얼굴을 내밀고 엉엉 울었다. 그때였다.

"당신 뭐하는 거야?"

갑자기 고막을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눈이 부신 조명이 켜진다. 바라보니 카메라맨과 사극 촬영 팀이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지? 왜 나는 그들을 보지 못했을까.

"여기서 촬영할거니까 나가 주시오."

맞아 여기서 무인시대를 야간 촬영한다고 했었지, 나는 얼른 헤엄쳐서 내가 옷을 벗어놓은 곳으로 왔다.

여자들도 있었다. 궁녀의 복장을 한 여자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저 사람들은 언제부터, 나는 허겁지겁 옷을 입고 후닥닥 하산을 했다. 등 뒤로 낭자한 웃음소리.

저 미친놈은 뭐야. 몰라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서 옷을 홀라당 벗더니 폭포로 들어가데. 뭐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전국적인 개망신이다. 한참을 내려오니 제 일 관문이보이고 또 걸어 내려가니 민박집과 식당이 보였다.

문을 연 식당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막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어? 아저씬 뭐 예요?"

나는 뭘까? 정말 황당한 질문이다.

"저요? 전 사람인데요?"

사람 말고 사람은 기본이고 정말 나는 뭘까?

"식사 할 수 있나요?"

"안 돼요. 촬영 팀 들 새벽밥 해 먹이느라 준비 한 건데, 찬이 부실하더라도 드시렵니까?"

대충 밥을 먹고 다시 나왔다. 하늘이 맑았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마침 택시가 와서 타고 문경읍내로

나가 문을 연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는 열쇠를 발에 차고 한쪽 구석에서 코를 골면서 잣다.

오후 세시였다. 나는 장터에서 산 트레이닝복을 입고 배낭을 지고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매점에서 산 일간스포츠를 펼쳤다.

여배우 권 민중 벗다. 뭐 그런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 기사들을 읽어 내려갔다.

한참을 읽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졸고 있던 여자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내가 읽고 있는 신문을 넘겨다보았다.

서른 한 두 살이나 되었을까? 어딘지 나른하기도 하고 졸린 듯 하기도 하고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돈 하나도 안줘도 홀랑 벗고 엉엉 우는 사람도 있던데."

여자가 나를 바라보면서 싱긋이 웃었다.

"봤어요?"

"봤죠, 전 정말 감동했어요, 솔직히 어른 남자가 홀랑 벗고 헤엄치는 것도 처음 보고."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여자의 말이 이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아저씨를 미친놈이라고도 하고 정신병자라고도 했어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 아저씨는 길을 찾는 사람 같았어요,

지금은 길을 잃고 있지만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요,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데."

"............"

"다음엔 저를 데려가 주세요. 아저씨랑 같이 있으면 저도 발가벗고 속 시원하게 엉엉 울어버릴 수 있을 텐데."

".........."

"아저씨가 벌거벗고 짐승처럼 큰소리로 울부짖을 때 아저씨한테 반했어요."

"놀리지 마세요. 저 지금 무지 황당해요."

내가 무안해서 횡설수설 할 때 여자가 캔 커피를 내밀었다. 아주 차가운 캔 커피.

나는 캔 커피를 마시면서 어쩌면 서울까지의 시간이 즐거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