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새벽 한시, 밤새도록 흉흉한 파도소리에 뒤척이느니 차라리 피시방에서 바둑이나 두고 운영하는 인터넷 바둑카페에 어설픈 글이나마 몇 자 올릴 요량으로 피시방에 들었다. 아침까지 있겠다고 했더니 5000원만 내고 아침 아홉시까지 있으라고 하였다. 나는 배낭을 카운터에 맡기고 피시방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담배 두 갑을 미리 꺼내놓고 음료수는 페트병으로 오렌지주스를 한 병 꺼내 놓았다.

“성격이 터프하십니다 그려.”

팻트 병과 담배 두 갑 그리고 옆에 놓인 지포라이터를 보고 피시방주인이 한 말이었다. 성격이 터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편해서였다. 음료수를 마시다보면 작은 병으로 대 여섯 병을 마셔야 하고 담배도 들락날락 하면서 하느니 차라리 두 갑 꺼내어 놓은 것이고 휘발유를 가득채운 지포라이터야 사실 폼이었다. 병 채로 벌컥벌컥 마시고 나는 라이브 바둑으로 들어갔다. 붉은 여우 5단의 등장 짜잔,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동호회의 모자를 쓴 사람들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나는 다시 나와서 오로 바둑으로 들어갔다. 돌의 힘 이란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왕 장고. 제한시간 삼십분에 마지막 초읽기까지 꼭 쓰고야 마는 사람. 십 분을 지켜봤으나 겨우 세 수 진행되는 것을 보고는 그만 질려버렸다. 상대도 지독한 왕장고인 모양이었다. 왕 장고 호적수끼리 만났으니 제한시간 한 다섯 시간씩 놓고 하루 걸이 바둑이라도 두라고 권하려다가 쓸데없는 짓이라 여겨 다시 오로를 나왔다. 이번엔 네오스톤. 그때가 새벽 세시. 다시 나와서 라이브로 들어갔다. 아는 닉네임이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오로로 향했다. 네오스톤, 타이젬, 오로, 한게임바둑, 등등 많은 사이트에 타이틀 하나씩 다 걸어놓고 왔다 갔다 하면서 바둑을 둔다. 구단들 두는 바둑을 클릭해서 한참 구경하다가 깜빡 졸 때, 누군가의 초청이 왔다. 한수 하자는 것이다. 거절할 까닭이 없다.

내가 백. 상대가 첫수를 좌상화점에 놓았다. 내가 우하화점. 다시 상대가 좌하화점. 내가 우상화점. 그리고 상대가 우하 화점으로 날일자로 걸쳐왔다. 나는 망설이다가 한 칸 높게 받아두었다. 상대가 미끄러지는 날 일자 나는 입구자로 막았다. 상대가 두 칸을 뛰었다. 나도 가볍게 한간으로 낮게 받아두었다. 거기까지는 약 30초의 시간이 경과되었다. 그리고 지루한 장고. 이윽고 놓이는 수. 아주 평범하게 다시 우상으로 날일자로 걸쳐왔다. 한참 망설이다가 바로 위로 눌러갔다. 상대가 제키고 내가 늘고 다시 빠지고 나도 빠지고 상대가 두 칸 뛰고. 상대가 워낙 신중하게 장고로 나오는지라 나도 천천히 템포를 늦추어 가면서 다시 담배를 피워 물고 생각에 잠겼다.

담배를 다 피고 주스를 서너 모금 마실 때 까지 상대는 두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내 옆자리로 다가왔다. 바라보니 스물 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젊은 아가씨였다. 청바지에 파란색 티셔츠를 입었고 단발머리에 안경을 끼고 있었다. 여드름 자국이 듬성듬성 나있었고 화장이라곤 하지 않은 맨얼굴이었다. 신선했다. 요즘 여자들치고 화장을 안 한단 말이야? 그런데

저렇게 흑야대밤에(백주대낮의 반대말)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누가 데려다 살지 참 고생문이 훤하다. 앗, 지금 내가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여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카운터에 가서 재떨이를 집어왔다. 재떨이 ash tray. 내게 영어를 가르쳐 주던 외국어대학교 출신의 형이 가르쳐준 단어. ash 뼈다귀. 재 tray. 상자 혹은 판 받침 혹은 무덤. 뼈다귀들의 무덤. 재떨이를 가져다가 놓더니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말보로였다. 나는 다시 바둑에 집중을 했다. 한 시간 동안 초읽기까지 주고받던 바둑은 결국 무승부로 끝났다. 반면 빅. 상대의 재도전 신청을 거부하고 나는 의자에 기대어 주스를 마셨다. 어느새 다 마시고 오분의 일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세시 오십분. 담배를 맛있게 피우고 잠깐 눈을 붙였다. 다른 화면에서는 돌임의 바둑이 진행되고 있었다. 밤을 새울 요량인 모양이었다.

“나는 또 이 밤을 새워야 하려나 봅니다.”

누군가의 글이 화면에 뜨자,

“벌써 날 다 샜어요.”

설핏 단잠이 들었다. 화면에서 가끔씩 들리는 딱딱 바둑알 떨어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어설픈 꿈속에 있었다.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지 않는 그 순간에 머물러있었다. 잠든 것도 깨인 것도 아닌 상태.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상태. 현실과 몽상이 어우러지는 교차점. 지난시절 나와 사랑을 나누던 여인을 생각하면서 그 부드러운 입술을 기억하면서 입가에 웃음을 남기다가 그러다가 문득 아아 나는 열세 살 소년이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를 사러갔던 봄날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봄날 아버지가 기다리는 논둑으로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가다가 한 모금 한 모금 나도 모르게 어느새 많이 마시고 아련한 취기를 견디기 힘들어 하다가 아버지 막걸리 사왔어요 논둑에다 내려놓고 그늘진 나무 밑에서 가르릉, 가르릉. 코를 골면서 잠든 그 여름방학의 나무 밑. 그런데 그놈의 꿈은 왜 이다지 긴지 이놈의 악몽은 왜 이리도 오래 계속되는지 아버지가 죽고 첫사랑이 죽고 이 일병 대가리 박아 그러다가 절에서 고시공부 하다가 만화스토리를 쓰다가 무협지도 쓰다가 배낭하나 메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아아 이놈의 지독한 악몽은 끝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내가 잠든걸 보시면서도 왜 나를 깨우지 않을까? 깨우면 난 이지독한 악몽을 잊고 다시 개울가로 달려 나가서 아이들이랑 수영도 하고 고기도 잡고 자맥질도 하면서 아아 그러나 끝나지 않는 것이었으니 이 지독한 악몽은 아 아버지 나를 깨워줘요. 깨워주기만 하면 나는 여름방학 신나는 들판에서 아아 아버지. 그러나 나를 깨운 것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야 이년아 뭘 쳐다봐 술 먹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모자를 푹 눌러쓴 청년하나가 들어오다가 내 옆에 있던 아가씨 쪽으로 휘청 넘어지면서 아가씨의 의자를 밀었고 그 바람에 아가씨는 책상사이에 심한 충격을 받으면서 부딪친 모양이었다.

“미안하다 한마디 하면 될 걸 가지고 오히려 나한테 시비를 거네. 이거 미친놈 아냐?”

여자가 일어나면서 앙칼지게 말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아 아 악몽은 여전히 이어지는 구나 그 여름 방학의 나무 밑으로 돌아가질 못했구나.

“그래 나 어제부로 전역을 명받은 제대한 군바리다. 네년이 삼년동안 전방에서 빡빡 기다온 내 심정을 알아?”

청년이 모자를 벗었다. 군대에서 제대한 듯 짧은 머리였다.

“손님 이제 그만하시죠? 저희 영업에 방해가 됩니다.”

아까 내게 터프하다는 말을 건네던 그 주인 사내였다. 나는 마음이 놓였다.

“뭐야 넌? 네가 뭐 정의의 기사라도 되는 거야?”

“전 여기 피시방주인 입니다. 좀 조용히 해주시고 나가 주시죠?”

사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너 같은 놈은 쫓겨나야 해 군대 제대했다고 다 너처럼 덱덱 거리면 대한민국이 편할 날이 있겠냐. 주인사내가 청년의 팔목을 잡고 막 나가려는 순간 청년이 팔을 뿌리쳤다. 주인이 깜짝 놀라서 쳐다 볼 때 청년의 발이 공중에서 회전을 했다. 퍽 순간적인 동작이었다. 주인사내는 눈을 감싸면서 주저앉았다. 청년의 발차기가 주인사내의 눈 옆 움푹 파인 곳을 정통으로 찬 것 이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가씨도 나도 또 바라보던 많은 사람들도 순간적으로 말이 없었다.

“내가 이래 뵈도 군대에서 태권도 겨루기대회 사단대표로 나갔던 몸이시다.”

저쪽 구석에서 누군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어려보이는 학생이었다. 청년은 학생 쪽으로 뛰어가더니 다시 몇 번의 발길질로 학생을 쓰러뜨렸다.

“이 자식들아 또 씨부렁 거려봐 다 상대해 줄 테니 까”

나는 당황했다. 어쩌나. 우선 나는 남아있던 주스를 단숨에 마셨다. 잠이 확 달아나고 있었다. 쓰려졌던 피시방주인이 일어났다. 바라보니 눈 옆이 약간 찢어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거, 보자보자 하니 까 어린놈이 겁이 없구나.”

나는 일어나면서 중얼거렸다. 쓰러진 학생을 걷어차던 청년이 돌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서 내게 왔다.

“지금 너 뭐라고 했니?”

사내가 바짝 다가섰다. 키가 훌쩍 컸다. 겨우 일 미터 칠십이 조금 넘는 나. 사내는 일 미터 팔십은 넘어보였다.

“까불지 말고 집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고 했다.”

청년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더니 한 발 자욱 뒤로 물러섰다. 키가 크면 접근 전에선 불리하다. 그는 거리를 두려고 한다. 한발자국 뒤로 물러선 청년이 발을 움찔했다. 예비동작. 예비동작이 들키면 승부는 끝이다. 청년이 오른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 나는 몸을 날리면서 정권으로 들어 올리는 오른발의 허벅지를 강타했다. 청년이 허벅지를 감싸면서 주저앉았다. 주저앉는 청년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강하게 밀었다. 꽈당 청년이 피시방의 바닥에 넘어졌다. 나는 잠시 청년을 내려다보고는 일어나서 내가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시간은 벌써 일곱 시가 넘어있었다. 으으, 넘어져있던 청년이 신음을 토하더니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한 번 더 할 텐가? 방심해서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한 번 해봐”

나는 청년을 돌아보면서 오만하게 말했다. 청년의 눈빛은 이미 죽어있었다. 청년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도 내가 앉았던 자리에 피다 남은 담배와 라이터를 챙기고 카운터에 맡겨두었던 배낭을 찾아서 멨다.

"괜찮아요?“

내 물음에 상처를 만지작거리던 주인아저씨가 말했다.

“속 시원하게 두들겨줘서 고맙소.”

내가 배낭을 메고 나갈 때 내 옆에 있던 아가씨도 부스럭거리면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빗소리가 요란했다. 아침 일곱 시 반. 계단을 내려오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참동안 멍하니 서서 장하게 내리는 비를 바라 볼 때 아가씨도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왔다.

“배낭 메고 있는 걸 보니 이 고장 분은 아니군요?”

아가씨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싱긋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비가 제법 오는데요.”

“우산도 없이 어쩌실 거죠? 붉은 여우 아저씨”

“어? 어떻게?”

“아저씨가 바둑 보다가 잠들었을 때 잠깐 아저씨 닉네임을 봤어요.”

“원래는 마녀라는 닉네임을 썼는데 여자라고 자꾸 데이트 신청하는 사람이 많아 가지고 참 그건 그렇고 시간 괜찮으면 어디 가서 해장국이나 한 그릇 합시다.”

“어? 나잇살이나 드신 분이 지금 젊은 여자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겁니까?”

“싫으면 관둬요. 나도 뭐 돈이 남아돌아서 사주겠다는 건 아니니까”

내가 한마디 던지고 빗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 아가씨가 우산을 펴들면서 황급하게 따라 나섰다.

“하하 붉은 여우님 옷 다 젖어요. 우산 같이 써요. 참 그런데 설마 아저씨가 밥값만 달랑 내주실거는 아니겠죠? 해장으로 소주 한 병 추가 그 건 어때요?”

저만이 빗속으로 강원도 감자탕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난 손가락으로 그 팻말을 가리키고는 엉거주춤 그녀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화장을 안 해도 그래도 여자는 향긋한 냄새를 간직하고 있었다. 내 코끝을 간질이면서 마음을 들뜨게 하는 향긋한 그녀의 향기. 그리고 싫지 않은 약간의 담배 냄새,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여자가 말했다.

“내숭 떠는 거 에요? 옷 다 젖으니깐 좀 바짝 달라붙어요.”

“수작 부린다고 따귀라도 맞을 까봐 그럽니다.”

“누가 꼰대 아니랄까봐. 호호호”

“뭐라고요? 너무 하네. 나 아직 꼰대소리 들을 정도는 아닙니다.”

어느새 옷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어쩔 수 없다 뭐, 나는 그녀의 우산 안으로 슬쩍 들어가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