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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촌동은 한강대교를 중심으로 강북 강변의 왼쪽 편은 서부이촌동으로 오른 편은 동부이촌동으로 불리고 있었다. 정식 명칭이 이촌 2동인 서부이촌동은 규모가 작고 조용한데 반해 정식 명칭이 이촌 1동인 동부이촌동은 제법 도시 분위기가 났다. 그리고 두 이촌동은 같은 이름을 공유하고 있었으나 왕래가 쉽지 않았다. 동부와 서부 이촌동 사람들은 불과 몇 백 미터밖에 되지 않은 거리에 도달하기 위해 두 개의 고가도로를 건너야 했다. 하나는 교통량이 많은 21번 국도의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해 설치된 고가였고 다른 하나는 서울역으로부터 전국 각지로 뻗어나가는 철길을 지나기 위해 설치된 고가였다.

 찬돌이 동부이촌동에 사는 주리의 집을 찾아가기 위해선 부천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용산 역에 내려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그리고 주리의 집에서 지호네 집을 찾아가기 위해선 다시 버스를 타고 2 개의 고가 도로를 넘어 시범 아파트 앞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지호네 집은 시범 아파트 단지 안쪽에 있었다. 찬돌은 저녁 시간에 주리와 동행하지 않고 혼자서 지호네 집을 방문하려니 전보다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가게에 들러서 음료수라도 사서 들고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호와 찬돌은 사제지간이었기 때문에 매번 격식을 차리는 것도 어색한 일이었다.

아파트 상가의 슈퍼마켓 앞에 서서 머뭇거리던 찬돌의 머릿속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평소 지호의 바둑 지도는 인터넷 전화를 연결한 뒤에 바둑 사이트에 함께 접속하여 기보 연구와 지도 대국을 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주말에는 지호가 주리네 집을 방문해서 세 사람이 함께 바둑공부를 하곤 했다. 그런데 수요일인 오늘은 약속 시간이 지나도록 지호가 전화를 받지 않더니 갑자기 지호 아버지에게서 휴대 전화가 걸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지호 아버지는 상의할 일이 있다면서 찬돌이 와주었으면 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이상했다. 지호의 부모는 경우가 밝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긴한 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으면 찬돌이 있는 근처로 찾아와서 기다렸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의 수업이 중단되면서까지 따로 의논해야 할 만한 일이란 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혹시 지호가 바둑을 배우지 않겠다고 선언이라도 한 걸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 또한 개연성이 적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지호는 오청원의 신포석과 10번기 기보를 복기하는 데에 있어서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최근 아마 강자들과의 연습 경기에서 연승을 한 뒤에 부쩍 기분이 좋아졌는지 말수가 늘었고 목소리는 밝았다. 그렇다면 지호의 통신 수업이 중단되고 찬돌이 그 시간에 지호네 집을 찾아가야 할 일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찬돌은 너무도 궁금한 나머지 다시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지호네 집에 도착하기까지는 5분 정도 더 걸어야 했지만 생각은 그보다 빠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겨울의 강바람이 아무리 정신이 번쩍 들도록 얼굴을 때리고 지나가도 답은 생각나지 않았다. 찬돌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한 번 흔들고는 지호네 집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호네는 아파트 2층에 살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탈 필요가 없었다. 찬돌은 계단을 다 올라와 복도식 아파트의 통로로 접어드는 순간 지호네 집에 심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호네 집은 203호였고 복도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지호네 집에서 들리는 언성 높은 다툼은 이웃집에서도 들릴 만큼 크게 번져 나왔다. 언쟁의 한가운데에는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있었고 간간이 지호 아버지의 방어적인 높은 언성이 섞여 있었다. 찬돌은 지호네 집 앞에 다 도착했으나 벨을 누르기보다 잠시 다투는 내용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대충 갈등의 내용을 알 것 같았다.

 내용인 즉 지호는 이번 NS 오픈 세계 바둑 대회에 문제의 사내와 한 팀으로 참석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내는 지호가 알려준 계좌번호로 계약금 명목으로 2백 만원을 송금했으니 당연히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지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잘 모르고 한 일이니 너무 원칙만 따지지 말라고 타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계속해서 같은 말만 반복하며 억지춘향 격으로 지호의 진로를 원하는 방향으로 꿰어 맞추려 하자 점점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지호의 아버지는 자신의 신분이 경찰이라는 사실은 끝내 밝히지 않았고 집 밖에서 듣고 있던 찬돌은 그 점에 대해 놀라워하고 있었다. 사실 불청객이라 할 수 있는 낯선 사내는 스스로도 억지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 듯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따라서 지호 아버지가 경찰이라는 신분을 밝히기만 하면 곧바로 꼬리를 내리게 될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지호 아버지는 공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한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듯 시종일관 일반 사람의 화법으로 문제 사안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찬돌은 자신이 근래 알게 된 두 명의 경찰에게서 흔히 듣게 되는 세속적인 경찰의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리고 확률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집안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 이거 정말 경찰을 부르든지 해야지 원. 도무지 말이 안 통하네.”

찬돌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런데 방금 사내가 처음 낮은 톤으로 말한 목소리를 듣게 되자 어디서 들어본듯한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에 있는 사내는 위협이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엔 설득조로 떠들기 시작했다.

“이것 보세요. 지호 아버님. 지호가 나이 어린 학생이란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바둑 세계에선 나이로 성패가 결정되지도 않고요.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대회에 참가해서 성인들과 당당히 겨룰 수 있는 게 바둑 계통입니다. 물론 당사자가 어릴 경우엔 부모님이 매니저 역할을 하셔야겠죠.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습니까. 저는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지호를 팀원으로 뽑기 위해 다른 유력한 실력자 하나를 제외시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버님께서 도의적인 책임을 인정하신다면 지호가 내친걸음을 허락해 주시고 저희 팀에 참가해서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 주시면 되는 겁니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 왜 지호 바둑 선생 얘기가 나오는지 전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돈 받고 바둑을 지도해줬으면 됐지 그 사람이 아드님 진로까지 관여할 이유는 없잖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찬돌의 입가에선 쓴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문제의 사내가 내뱉은 말의 내용에 대한 반응은 아니었다. 어차피 사내는 지호네와 주리의 관계 그리고 주리와 찬돌로 이어져 다시 찬돌과 지호로 이어지고, 지호의 자폐증까지 보듬어가며 무보수로 스승이 되어 주고 있는 찬돌에 대한 신뢰 같은 부분은 전혀 모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맘껏 지껄여 댄다 해도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다만 찬돌이 쓴 미소에 이어 이를 악물며 인상을 찌푸리게 한 이유는 사내의 목소리 자체에 있었다.

 찬돌은 백주임을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게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지만 짜증이 났다. 백주임은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이 변해 있었다. 마지막에 찬돌과 헤어질 때 백주임이 실수한 일은 불가항력적인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본래 지닌 유하고 사람 좋은 성격에 반한 결과로 이어졌을 때 찬돌은 마음의 상처를 떨쳐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지호네 집 안에서 억지를 부리며 교활하게 상대방의 빈틈을 찾아 뱀처럼 속삭이는 백주임은 예전에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거액의 상금을 쟁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작정을 한 듯 했다. 그리고 거기엔 그의 인성도 포함되어 있는 듯 했다.

 사실 백주임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호의 존재는 NS 오픈 세계 바둑 대회의 우승을 위한 실낱같은 희망을 구체화 할 수 있는 키워드로 여겨질 만도 하였다. 바둑 사이트에서 만난 쓸만한 상대가 올해 열두 살이 된 소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백주임은 쾌재를 불렀을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다른 아마 강자들의 경우엔 대회를 준비하며 앞으로 남은 10 개월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할지라도 프로를 능가할 만한 예리함을 갖추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호와 같은 영재들이라면 단기간 안에 프로에 입단할 만큼 실력이 부쩍 느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리고 이번 대회는 세 사람이 팀을 이루어 경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된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서 팀원 중에 최소한 프로 초단 정도 되는 실력자가 속해 있다면 행운을 기대해 볼만 하다는 게 백주임의 생각이었을 것이었다.

 찬돌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창을 열었다. 그리고 애써 기억해 낸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어 신호음이 가는 소리가 들렸고 지호네 집안에선 누군가의 휴대전화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찬돌이 복도를 되돌아가 계단이 있는 통로에 이르렀을 때 백주임이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형. 나야.”
“어? 박 사장 목소리네? 맞지? 박 사장 맞지?”

백주임은 예전에 없던 반가운 목소리로 찬돌을 반기고 있었다. 찬돌은 실소를 참기 힘들었지만 일단 차분하게 용건을 전했다.

“지금 나올 수 있어? 의논할 게 있는데.”

“지금?”

“응. 가급적 빨리 봤으면 하는데. 될까?”

“......”

백주임이 양손에 쥔 떡을 견주는 데에는 일 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는 아무래도 지호보다는 찬돌 쪽이 낫겠다 싶었는지 곧 흔쾌히 대답하는 목소리를 가장하며 어디로 가면 되느냐고 물었다.

“응. 한강대교 근처인데. 형은 어디야?”

“그래? 나도 가까운 데 있어. 어디서 만날까?”

“일단 전화 끊고 밖에 나와서 전화해. 나 배터리 좀 갈아 끼울 게.”

“그래. 다시 통화 해. 3분 정도 후에 이 번호로 전화 하면 되지?”

찬돌은 아파트 밖으로 나와서 아파트를 등진 채 서 있었다. 그리고 30초도 못 되어 위에서 육중한 체구의 사내가 서둘러 아파트 복도를 지나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찬돌은 백주임이 자신의 옆을 지나쳐 근처에 있는 차 있는 곳으로 향할 때까지 모른 체 했다. 그리고 백 주임이 전자키를 이용해서 차의 잠금장치를 해제한 뒤 차 문을 여는 순간 입을 뗐다.

“차 뽑았네? 중고는 아닌 것 같고. 요즘 잘 나가나봐.”

백주임은 차에 오르려다 말고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찬돌의 목소리를 기억해 내고 얼굴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이 지난 뒤에 백주임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는 모습으로 변해 갔다. 찬돌은 백주임이 입을 벌린 채 쳐다보는 것을 아랑곳 않고 차의 조수석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조수석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거두고는 걸음을 몇 발자국 더 옮긴 뒤에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찬돌은 뒷좌석에 오르면서 나지막하니 말했다.

“뭐해? 어디 조용한 데로 이동하자고.”

 강변 둔치에 차를 세우고 한강을 바라보고 있자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원 구석에 쪼그려 앉아 사기도박을 모의했던 찬돌과 백주임은 무언가 머쓱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겨울의 강가는 전혀 조용하지가 않았다. 연신 불어오는 강바람은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고 펄럭이는 옷자락을 진정시키기 위해 두 사람 모두 팔짱을 끼고 어깨를 잔뜩 웅크려야 했다. 그러나 둘의 대화 내용은 보기보다는 심각했다.

“지호는 그만 신경 끄지 그래.”

“니가 지호 걔 사범이란 말이지? 그렇다고 솔직히 그런 식으로 말할 권리 있냐?”

“지난번에 나한테 빚진 것도 있잖아.”

“글쎄다. 미안한 감은 있지만 빚이랄 것까지야 없지 않나?”

찬돌은 백주임이 후안무치한 인간이 되기에는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순간 잘못된 판단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고 있었다.

“괜히 힘 빼지 말고 포기하는 게 좋아. 지호 아버지 종로 경찰서 소속 경사님이셔.”

이번엔 좀 셌던 게 틀림없는 듯 백주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백주임은 용감무쌍하게 다시 혀를 놀리고 있었다.

“니기미. 경찰이면 뭐 자식 일에 다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란 법 있냐? 어차피 위고로에 대회 참가 신청한 것도 지호고 우리 팀에서 같이 뛰겠다고 약속한 것도 지호야. 뭐가 문젠데? 다 생각하기 나름 아니야? 이렇게 된 거 너랑 나랑 지호랑 셋이서 팀을 만드는 게 어때? 원한다면 네가 팀장을 해도 좋아. 젠장. 정 내가 꼴보기 싫으면 지호만이라도 보내든가.”

탐욕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이 인간을 이렇게까지 바뀌게 할 수 있겠는가. 백주임은 충분히 집요했고 충분히 무모했다. 과연 130 억 원이라는 거액의 위력은 대단했다. 찬돌은 슬픈 눈으로 백주임을 돌아보았다. 백주임은 고집스런 눈으로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백주임처럼 일확천금을 맹목적으로 쫓는 사람들이 또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찬돌은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래도 별 수 없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소더버그를 이용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탐욕과 집착이 가득한 세상에 어린 지호를 무방비 상태로 내보낼 순 없는 일이었다. 찬돌은 지호의 아버지가 결코 취하지 않았던 쉬운 방식을 취하기로 작정했다. 그러자 백주임은 찬돌이 의도한 분량만큼의 충분한 절망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사실 난 개인적으로 소더버그 회장을 알고 있어. 우리 아버지가 전에 NS사 한국 지사장으로 근무했었거든. 아무튼 얼마 전에 회장님이 연락을 해 오셔서 오랜만에 뵈었는데 그 때 오메가와 친선 경기도 했었지.”

“그럼...... 얼마 전에...... 콜드 스톤이라는 아이디가 혹시......”

“그래. 내 이름은 찬돌이고 콜드 스톤이 내 아이디야.”

백주임은 고개를 떨구고 더 이상 입도 벙끗하지도 못했다.

“혹시 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서구식 사고방식이란 게 과격한 편이야. 적아에 대한 구별이 우리 쪽 정서하곤 많이 달라. 그리고 소더버그 회장님이라면 날 피곤하게 하는 사람의 아이디 하나쯤은 눈도 깜빡 안 하고 날려버릴 걸.”

여기까지 말했을 때 찬돌은 뺨과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대회에 참가해서 기회를 잡고 싶거든 지호는 그냥 내버려두는 게 좋을 거야.”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은 뒤 찬돌은 백주임을 흘끗 곁눈질 해 보았다. 백주임은 고개를 떨군 채 절망감을 추스르느라 애쓰고 있었다. 그는 양손에 쥐었다고 생각한 떡을 모두 잃었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한 눈치였다. 이제 찬돌은 백주임의 항복 선언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에 백주임은 말없이 돌아서서 찬돌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 차에 올라 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차를 몰더니 한강 둔치를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찬돌은 백주임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절망과 분노라는 게 결국 130억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로부터 환산된 형태임을 알았기에 가슴에서 이는 안쓰러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문제는 찬돌 자신이었다. 탐욕이 인간을 어떻게 망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찬돌은 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순간 강바람은 무어라 경고라도 하는 듯 윙윙거리며 불어대고 있었다. 찬돌은 고개를 왼 쪽으로 돌려 동부 이촌동 쪽을 바라보았다. 한강대교와 강변도로의 야경 너머로 아파트들이 이루는 불빛이 검푸른 하늘 아래로 보였다. 그리고 그곳 중간에 사랑하는 여자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듯 낯설게 느껴졌다.

 찬돌은 고개를 오른 쪽으로 돌려 서부 이촌동 쪽을 바라보았다. 한강철교와 강변도로의 야경 너머로 지호가 사는 시범 아파트 단지가 이루는 불빛이 보였다. 지호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완전한 타인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찬돌은 다시 강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절묘하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보니 지금 그가 바라보는 방향은 부천 방향이었다. 부천에서 지하철을 타고 서울 쪽으로 오다가 한강 철교를 건넌 뒤에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강변에서 서성이다보면 대충 지금 서 있는 근처에 이를 수 있겠다 싶었다. 찬돌은 시야가 넓어지는 게 느껴지면서 그의 삶이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이 한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검푸른 하늘과 강은 어린 시절 태평양 상공에서 비행기의 창밖으로 내다보던 광경을 기억나게 하였다. 그러고 보니 같은 허공과 같은 물결과 같은 바람소리가 여전히 그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 여겨졌다. 운명은 자연과 함께 거하며 인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탐욕과 애증이 빚어내는 삶의 굴곡과 그래프는 대대로 이어질지언정 모든 인생을 거뜬히 품는 대지와 바다와 하늘은 한결 같았다.

 찬돌은 윙윙 거리는 바람 소리를 강변에 남겨둔 채 걸음을 옮겨 도시가 빚어낸 길 위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행로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마음껏 품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여인이 있었다. 오늘은 울적한 마음에 그녀에게 기대며 동침을 요구하기에 좋은 날이었다. 사랑한다고 거짓말하기에 좋은 날이었다. 다른 사람은 절대로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거짓말하기에 좋은 날이었다. 사랑이 식어도 떠나지 않겠다고 거짓말하기에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