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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고등동물로 진화하면서 한 가지 특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키스’라는 이름의 행위이다. 동물들은 서로의 생식기나 항문에 코를 들이박고 냄새를 맡기도 하고 개들의 경우엔 서로의 똥까지 먹지만 그렇다고 혀를 교환하는 일은 없다. 본능적으로 상대방의 아가리 안에 혀를 밀어 넣는 일은 자살행위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키스를 하는 일은 완전한 신뢰를 의미한다. 또한 관계의 발전을 갈망하거나 발전된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바람을 지니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남성의 경우엔 상대방의 혀를 터치하면서 부드러운 느낌과 반응을 즐기려한다. 그리고 무한 반복되는 행위를 견디지 못하고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를 원한다. 그런가하면 일반적으로 여성의 경우엔 상대방의 큰 혀가 입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일을 두려워하고 조심스럽게 반응하다가 나중엔 그것을 집어 삼킬 듯 빨아 대거나 깨물거나 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무한 반복되는 행위를 끝내고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때의 신호이다.

 인간이 고등동물로 진화하면서 시작한 특이한 행동의 다른 하나는 교미에 있어서 후방위의 시대를 끝내고 전방위의 시대를 맞이한 점이다. 그 때가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류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어느 시점에서부터 전방위를 당연시하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혁명은 여성을 수치에서 구하고 최소한의 평등을 안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전방위는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아무리 힘이 센 악당이라 할지라도 마주한 상태에서 다리를 꼬고 버티는 여성을 강제로 취할 수는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세상의 무수한 성폭행 미수범들은 용서를 받아야 함이 마땅하며 성폭행범들에겐 처절한 보복을 가해야 함이 마땅하다. 다시 말해 사랑의 시대가 열린 이상 사랑 이외의 것으로 사랑을 얻으려 하는 시도는 곧 파멸에 이르고 만다. 사랑 자체는 진리가 아니지만 사랑을 거치지 않고는 누구도 영혼이 갈구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 

 더 이상의 키스는 없었다. 그러한 사실은 주리와의 섹스가 성사될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음을 의미했다. 찬돌은 그녀를 간절히 원했다. 특히 경찰청 앞에서 정복을 입고 퇴근하는 주리를 차에 태우고 그녀의 아파트로 곧장 향하는 날이면 자꾸만 아랫도리가 거추장스러워지곤 했다. 주리는 지능과 소속답게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찬돌이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어째서 참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다만 찬돌의 생활 태도가 변해가고 있으며 그와 경찰청 안에서 마주할 일이 없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찬돌은 길을 걸을 때면 언제나 주리의 손을 꼭 잡았다. 그것은 그가 그녀의 곁에 머물기를 원하며 관계가 발전되기를 주저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요즘 세상에 20대 후반의 남녀가 손을 잡고 길을 걷는 일은 흔한 축에 속하지 않았다. 주리는 자꾸만 찬돌의 손을 놓으려 하였고 찬돌은 그녀의 손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찬돌의 그러한 태도는 의외로 믿음직하게 느껴졌다. 주리는 자신이 알던 껄떡이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심리는 그녀로 하여금 앙탈과 삐침을 알게 하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주리는 자신이 천상 여자라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

 두 사람은 아파트 뒤 쪽 주차장에서 현관이 있는 반대편으로 걷고 있었다. 주리는 엄마가 떨어져 죽은 자리를 지나치면서 찬돌의 손을 꼭 쥐었다. 찬돌은 주리가 애정 표현을 하는 걸로 알고 기분이 좋아졌다. 작은 손이 큰 손을 당차게 쥔다. 큰 손은 작은 손을 다시 꼭 잡아준다. 사랑의 작용이며 사랑의 반작용이 분명했다. 비록 동상이몽에서 시작된 교감이긴 하나 서로의 손은 맞잡은 채였고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 고백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느낌이 통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다만 앞으로 싸울 일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족했다.

 찬돌이 처음 아파트 뒤편 주차장에 차를 세우던 날 주리는 엄마의 죽음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도 이제 악몽을 걷어내고 현실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찬돌이 차 문을 열 때 주리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 엄마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화단 앞을 지나칠 때 엄마의 피가 배어 있는 흔적이라도 발견하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찬돌은 주리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리는 엄마의 장례식과 발인 때에 방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던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엄마의 시신은 친척들이 수습하여 화장을 하였다고 훗날 전해 들었다. 유골이 어느 곳에 뿌려졌는지 어딘가에 묻혀 있는지 누군가에게서 들은 것도 같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리는 차 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차창 밖으로 보이는 화단을 내다보았다. 그토록 직시하기 힘들었던 그곳을 12년 만에 다시 보았는데 그저 평범한 모습이었다. 아무런 흔적도 없었고 착시나 환시도 없었다.

 찬돌은 갑자기 울고 있는 주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주리가 울음을 그치고 차에서 내린 뒤에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오히려 주리가 찬돌에게 괜찮으냐는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아서 바라보았을 때 찬돌의 표정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할 법도 한데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찬돌은 주리에게 다가와 다시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어느 때보다도 꽉 쥐고는 집으로 향하는 길을 함께 걸었다.

 주리의 아파트 거실엔 언젠가부터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열리지 않았던 베란다 창문도 열려 있었다. 아까 찬돌이 환기를 위해 열어 둔 창으로부터 꽤 차가운 냉기가 몰려들어왔으나 주리는 싫지가 않았다. 찬돌이 그녀의 삶으로 뛰어 들어온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 우선 주리가 엄마에 대한 부정적인 망상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주리는 이제 베란다에 서서 창밖을 내다볼 수 있게 되었고 거기에 빨래도 널 수 있게 되었다. 직장에선 보직 이동 신청이 수락되어 내근 주간 근무 팀으로 옮겼다. 찬돌은 그녀가 경찰이라는 사실은 자랑스럽지만 더 이상 범죄자들을 쫓아 건물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건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주리로서는 내근이든 외근이든 어느 쪽을 더 선호한다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러 차례 언급하는 찬돌의 의견을 무시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의 테두리 안에 유일하게 들어와 있는 한 남자와 함께 할 시간이 많아질 수 있다면 승진 코스에서 이탈하는 정도는 대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주리가 퇴근한 후의 나머지 시간이 온통 바둑을 두는 일로 채워진다는 것이었다. 아니 바둑을 둔다기보다 바둑을 공부해야 했기에 주리로서는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기본 정석과 기초 사활만 알면 불편할 게 없었다. 고급 정석과 사활은 실전에서 써먹을 일이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에 아예 관심에도 없었다. 그런데 찬돌은 그녀를 고수로 만들어 놓겠다는 작심이라도 한 듯 덤비고 있었다. 어느덧 주리는 실전 대국이라도 할 때면 찬돌에게 야단을 맞는 일이 잦아졌고 그럴 때마다 주리는 허리 높이의 앉은뱅이 테이블 밑에서 주먹이 쥐어지는 걸 애써 참아야 했다. 그리고 부분적인 갈등 때마다 찬돌에게 짜증을 내고 투정을 부려보기도 하면서 바둑 공부 말고도 얼마든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느냐고 설득하려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찬돌은 포괄적인 관점에서 주리를 압도하고 있었다.

“바둑은 우리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언어이자 소통의 즐거움이라 할 수 있어. 그리고 바둑은 기본적으로 수읽기 능력을 다투는 놀이야. 그런데 수읽기 능력이란 건 형태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대량 확보해 놓았을 때 증대되기 마련이지. 다시 말해서 오십 개의 정석을 알고 있는 사람과 오백 개의 정석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이 똑 같은 뇌 활용 능력을 지닌 상태에서 실전에서 만났을 때, 오백 개의 정석을 알고 있는 사람이 수읽기에서 앞설 수밖에 없는 거야. 왜냐하면 전자는 모든 상황의 변화를 즉석에서 다 수읽기 해야 하지만 후자의 경우엔 정석 외의 변화만 수읽기를 하면 되기 때문이지.”

 하지만 공부해야 할 분량이 너무 많았다. 주리가 겨울 내내 정석과 사활과 맥을 다 떼고 나니 찬돌은 이젠 기보를 공부해야 한다면서 DVD를 수십 장 내놓는 것이었다. DVD 표면에는 ‘사카다’니 ‘오청원’이니 ‘조치훈’이니 하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도 적혀 있었고, ‘이창호’와 ‘조훈현’과 ‘유창혁’과 같은 들은 적이 있는 이름도 적혀 있었다. 그러나 말이 수십 장의 DVD이지 그 안에 영화가 담겨 있는 것과 책과 같은 단순한 이미지가 담겨 있는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주리는 당연히 딱 질려버렸다. 도대체 찬돌이 자신에게 원하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심하게 반항하는 주리에게 찬돌은 다시 다음과 같은 거부할 수 없는 설득을 내어 놓고 있었다.

“난 어렸을 때 세돌이하고 진석이 형을 겪은 적이 있었어. 나를 포함한 그 두 사람은 연구생 2조 때부터 3대 천재라고 불렸지. 그 후 나는 다른 길을 걸었지만 둘은 천재성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한국 바둑을 대표하는 기사가 됐어. 내가 하려는 얘기가 뭐냐면 적어도 난 천재적 재능이란 게 뭔지는 알아. 그래서 지호의 재능을 알아 볼 수 있었던 거야. 아마 지호는 자폐적 증상만 극복하고 사회로 나갈 수만 있다면 훌륭한 프로 기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주리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우리 셋 중에서 네가 지닌 재능이 가장 뛰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많은 건 바라지 않을게. 그냥 지호가 성장하는 만큼만 한 번 따라가 봐. 그럼 우리 앞엔 재밌는 일들만 기다리게 될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