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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건물을 몇 개나 뛰어 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떤 건물은 옆 건물과의 간격이 5미터나 되었다. 찬돌과 주리가 그 곳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뛰어 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었다면 한국에도 스파이더맨이 산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리는 점점 약이 오르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총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게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빌어먹을 범죄자 놈이 ‘재수 없는 년’이라고 대뜸 욕지거리를 하고 달아나더니 방금 전에는 쓰레기통을 집어던지고 그대로 다시 튀고 있었다. 주리는 날아온 쓰레기통을 팔로 막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던 내용물까지 다 막지는 못했다. 쓰레기통 안에 다행히 고약한 오물이 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대신 사용된 휴지와 담배꽁초와 재가 가득했다.

 주리는 입안에 담뱃재가 씹히면서 역한 냄새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뚜껑이 열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라 여긴 곳에서 놈은 또다시 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번 건물은 구획의 끝 지점이었다. 따라서 건물 모퉁이는 길과 면해 있을 테고 최소한 다음 구획을 이루는 건물과의 사이는 10미터는 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주리가 쫓고 있던 녀석은 다시 난간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주리는 옥상을 가로질러 달려와서 난간에 손을 짚고 아래를 살폈다. 그녀가 이번에 쫓고 있는 놈은 정말 짜증나는 자식이었다. 녀석은 어느새 준비해둔 장갑을 손에 끼고 두 가닥이 맞붙어 있는 인터넷 통신 케이블에 의지한 채 맞은편 건물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건너편 건물은 이쪽과 같은 3층이었지만 지대가 낮은 곳에 위치한 탓에 옥상과 옥상 사이에 연결된 케이블은 20도 정도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지만 끝에 이르러서는 탄력이 줄어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자 녀석은 부지런히 팔을 움직여서 건너가는 중이었다. 그 순간 놈의 그러한 모습이 주리의 눈에는 쥐새끼처럼 보였다. 사회의 음지에 살면서 더러운 병균을 퍼뜨리는 쥐새끼. 반드시 때려잡아야 할 대상이었다. 사람의 편협한 생각은 감정에 녹아들어 전신에 퍼지고 이성을 마비시킨다. 주리는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한편 찬돌은 미친년한테 호감을 느꼈던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그것도 보통으로 미친 게 아니라 제대로 정신이 나간 꼴통이었다. 어떻게 여자가 5미터의 건물 사이를 뛰어 넘어서 끝까지 쫓아올 수 있단 말인가. 징글징글하고 악몽 같았다. 그런데 케이블을 잡고 있는 손에 출렁 하는 진동이 전해져왔다. 찬돌이 설마 하는 심정으로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까의 그 미친년이 난간을 넘어와서 줄에 매달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녀가 한 쪽 발만 난간에서 떼면 케이블에 완전히 체중을 싣게 될 순간이었다. 찬돌은 급히 소리쳤다.

“미친년아! 두 명은 못 버텨!”

사람은 가슴에 넘치는 것을 입 밖으로 토해내는 법이다. 아까는 재수 없는 년이라고 진심 어린 말투로 부르더니 이번엔 미친년이라고? 주리는 난생 처음 겪는 욕지거리 시리즈에 눈이 확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옷소매를 손끝으로 빼서 케이블에 대고는 결국 두 발을 허공으로 띄우고 말았다. 그리고 일단은 기분 좋게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생사의 갈림길은 순간적으로 찾아온다. 이번엔 죽겠구나 하는 순간을 맞이할 때의 기분은 평생을 잊지 못한다. 찬돌은 손아귀에 쥔 케이블의 팽창감이 배가되었다는 것을 감지한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한 팔만 뻗으면 손끝을 난간에 얹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불과 50 센티미터 남짓한 거리 사이에 놓인 시간이 짧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찬돌은 마치 시간의 형체를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팔을 뻗고 있었다.

 이윽고 찬돌은 단단한 벽돌의 질감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감탄하면서 난간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리를 들어 올려 난간에 걸치려는 순간 등 뒤에서 내내 두려워하였던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투두둑 하고 케이블이 튀는 소리였다. 찬돌이 돌아보았을 때 주리는 이미 균형을 잃고 추락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찬돌의 시선을 붙잡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얼굴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표정은 슬퍼 보였다. 놀라거나 공포에 질린 표정이 아닌 분명 슬퍼 보이는 표정이었다.

 찬돌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여자이기에 그 짧은 순간에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할 수가 있는 걸까.’ 딱히 위와 같은 내용의 단어들을 머릿속에 나열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찬돌이 느끼는 기분의 입자는 분명히 위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찬돌은 이상하리만큼 침착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가 긴장감으로 인한 것인지 궁금증에 대한 도전욕구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그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적절한 타이밍에 그것을 실행해 옮겼다.

“미친년아. 아래를 봐.”

나지막하니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익숙하면서도 낯 설은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리로서는 두 번째 듣는 말이었는데 이번엔 정감이 담겨 있다는 느낌이었다. 착각일까. 미친년이라고 부르는 말에 정감이라니. 감정이 배제된 채 뱉어지는 욕은 욕이 아닐 수도 있단 말인가. 아무튼 주리는 욕지거리를 듣는 따위는 더 이상 개의치 않을 수 있을 만큼 이미 다른 세계에 가 있었지만, ‘미친년’이라는 단어는 그녀가 다시 원래의 세계를 돌아볼 수 있도록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어 그녀가 인식한 말은 아래를 보라는 내용이었다. 아래라고 하면 곧 그녀가 충돌하게 될 지면을 뜻했다. 보도블록이 깔린 지면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인과였고 굳이 그곳을 보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돌아본다고? 목을 돌려 돌아볼 수 있다면 몸 전체를 돌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리는 자신이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한 듯했다. 지금 그녀는 그대로 떨어진다면 발뒤꿈치가 먼저 닿기는 하겠지만 곧 엉덩이와 등과 뒤통수가 순서대로라고 할 것도 없이 빠르게 지면에 충돌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몸을  반 바퀴만 돌리고 다리를 앞으로 당겨 벌리면 착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문제는 그대로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를 결정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케이블이 끊어지면서 낙하운동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던 슬픔은 농도가 매우 짙은 것이었다. 아파트. 텅 빈 거실. 열려 있는 베란다 창문. 창밖의 어둠. 온 집안을 급습하고 있던 낯선 바람. 그리고 아파트 주차장에 내려다보이는 흰 잠옷을 걸친 엄마의 주검. 주리가 열네 살이 되고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의 일이었다. 그랬다. 아무래도 엄마의 뒤를 따라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떠나는 일도 나쁠 것 같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엄마를 떠나보낸 뒤에 주리는 이사도 가지 않고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엔 늘 혼자였다. 이젠 베란다 창문을 열지도 못하고 창밖을 내다보지도 못하는 게 지겨웠다. 주차공간이 모자랄 때 아파트 뒤편 주차장은 가보지도 못하고 아파트단지 밖으로 나가 길가에 차를 세우는 일도 그만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면서 아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차라리 그냥 이사를 가버리고 싶었지만 실행해 옮기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고 이제는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는 일들이 싫어졌다. 주리의 슬픔은 그렇게 복합적이었고 또 그런 만큼 치명적이었다.

 주리가 사는 길을 택한 이유는 의외로 엉뚱한 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추락이 시작되었을 때만해도 죽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죽는 일 역시 만만하지만은 않다는 판단이 생긴 것이다. 문제는 3층이라는 어중간한 높이였다. 그리고 주리가 추락하는 각도도 어중간했다. 뒤꿈치, 엉덩이, 등, 뒷머리의 순서로는 즉사에 이르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히려 중환자실에서 튜브를 꽂고 누워 여생을 보내게 될 확률이  더 높아 보였다.

 주리의 허공으로 향한 시선에 찬돌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만큼은 찬돌에 대한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저 한 남자가 위에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사내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어둡기도 했지만 거리가 좀 먼 듯했다. 주리는 비로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찬돌은 주리가 몸을 뒤틀어서 다리로 착지한 뒤에 양 손바닥으로 바닥을 때리며 낙법을 구사하는 모습까지 확인하고는 자리를 떠나려고 하였다. 그런데 주리는 착지한 자세 그대로 미동도 않고 있었다. ‘어디 부러지기라도 했나?’ 하는 생각에 찬돌이 잠시 바라보자니 주리는 엎드린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곧 찬돌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까 그녀가 낙법을 위해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때릴 때 들리던 ‘짝’ 하며 골목 안을 울리던 소리. 직감은 맞았다. 지금 그녀는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을 참느라 울먹이다시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찬돌은 긴장이 완전히 풀린 듯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하하하. 징하게 아프겠다.”

주리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눈앞에서 용의자를 놓치고, 다시 미친년이란 소릴 듣고, 그 뒤에는 발바닥과 손바닥에서 불이 나고 있었으니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젠 뒤에서 놈의 비웃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게 아닌가. 그래도 녀석은 구질구질한 인간은 아니었던지 곧 웃음소리가 그치고 더 이상의 인기척은 없었다. 주리는 녀석이 유유히 달아나 버린 게 분했지만 일단은 몸을 추스르고 볼 일이었다. 그녀는 보도블록 위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아 손과 발의 통증이 누그러들기를 기다렸다. 그 때 골목길과 면해 있던 어느 대문에서 중년 여자가 나오다가 “어머!” 하는 소릴 내고는 그냥 지나쳐갔다. 주리의 손바닥은 고통이 끔찍했던 만큼 통증이 빨리 줄어들고 있었으나 발에서는 욱신거림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골절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걷기도 무리였다.

 주리는 잠시 어두운 골목길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까 위기의 순간에 들려왔던 찬돌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낮고 침착한 어조의 목소리였으며 그가 내 뱉은 말은 단 두 마디였다. 그리고 그 두 마디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가장 적절한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았다. 누구나 절망의 순간에는 어떠한 외침도 충고도 들리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아까 그는 ‘환기’와 ‘요점전달’이라는 최선의 수순을 찾아내었고 타이밍 또한 놓치지 않고 빠르게 전달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의 그의 목소리로 인해 주리는 살 수 있었다.

‘미친년아. 아래를 봐.’

주리는 찬돌이 남긴 말을 계속해서 되새김질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