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서울에가 하룻밤을 자고왔다.잠자리가 불편해 등과 허리가 영 안좋다. 몇일간 '바둑백서'에 들어갈 리포터 '한국바둑전사'를 쓰면서 틈틈 '한시목록'을 꺼내 읽는다. 나는 대학노트 열권분량의 개인노트를 만들어 놓고있다. 한시목록은 그 노트의 제목이다. 평소 읽은 한시를 모아놓은 것이니 개인책이라 하겠다.

가을비가 주적거리는 탓인지 해좌의 시가 눈에 밟힌다. 해좌는 정범조(丁範祖1723-1801)를 말한다.

산그늘과 물색이 정자안에 들어와 흐릿하니/ 세상 기묘한 광경 이와같으랴/ 저문 해를 뚫고 기러기 날아가고/ 물때를 마춘 배는 돛을 펴고 돌아온다/ 한가한 시간을 바둑으로 보내고/기우는 영고성쇠 조화속이로다/ 참으로 웃읍구나. 홍진을 좇는 사람아/ 붉던 얼굴 거울속에 늙고있음을 알기나 하나/

萬景亭

山容水色入軒微/世上寄觀似此稀/

湫暮雁穿斜日去/遂潮帆飽細風歸/

等閒光景消碁局/庶莫榮枯幹化機/

甚笑紅塵奔走客/朱顔不覺鏡中非/

만경정은 일강(옛날 용산강 서강 다음을 흐르던 한강을 일강이라 했다. 일산에서 강화도까지다.)가에 있던 정자다. 정범조는 붉었던 얼굴의 청춘을 그리워하며 말년을 바둑과 낙조를 벗하며 유유자적이다. 정범조는 다산선생이 정시환과 더불어 정씨(丁)집안의 독보적 존재라 하던 그 사람이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한편으로는 나락의 계절이기도하다. 유시유종(有始有終)이 자연의 철리인탓에 자연속의 삶은 가을이 서글픈 것일까. 정범조는 평생을 안분자족하던 사람이다. 그의 가을은 쓸쓸하다. 다른 사람의 시 한편이 보인다. 이탁오(李卓吾1527-1602)다.

한밤중 선방에 스며드는 종소리/오늘밤 어인일로 무창이 보이나/ 흐르는 물은 나의 늙음을 가련해 하나/ 까닭없이 애끓는 가을바람/ 앵부주(州)의 천년방초를 시로 읊고/ 만리장강은 경성(京城)으로 들어간다/ 대별이란 원래 분별이 없는것/ 여기에 와 더욱 마음 아파할 필요 없다/

이탁오는 중국역사상 '담사동' '이대교'와 더불어 사상을 위해 죽은 몇안되는 사람중의 한명이다. 당대의 정통이던 주자를 공박하다 이단으로 몰린것이 사단이다. 허나 원굉도같은 최고의 문인의 추앙을 받을 정도로 시원한 견해의 소유자기도 했다. 이탁오는 조옥(詔獄)의 계단에서 동맥을 잘라 자결한후 3백년동안 차디찬 섬돌위에 누워 풍상을 맞은 사람이다.

이탁오는 말했다. 판단하지마라. 작은 판단은 오히려 유치한것이다. 의지하지마라. 무엇인가를 믿는것을 스스로 경계하라.

가을이 왔다.

이가을 나는 무엇을 할것인가. 의미의 유무(有無)를 따지기전에 우선 무엇인가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