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밥 먹을 땐 밥만 먹자!”

진호가 밥은 안 먹고 문제집만 보고 있는 기영을 보며 말했다.

“잠깐만, 이 문제가 너무 안 풀려서 그래.”

“뭔데? 어디 봐.”

“이거, 이 문제 말이야.”

기영이 문제집 중간 즈음에 있는 문제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씌우면 되는 거 아니야?”

진호가 문제를 보자마자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아니, 적어도 기영이 보기에는 생각도 않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기영은 이 문제가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다고 믿으며 말했다.

“아니긴! 여기 씌우면 꼼짝없이 잡혔구만.”

“그래? 이상하다. 아까 분명히 생각했었는데.”

기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상하게 답을 알고 나면 너무 간단한데 문제를 풀려고 하면 쉽지 않았다.

“야, 얼른 밥이나 먹어. 다 먹고 또 풀면 되잖아.”

진호가 기영의 손에 젓가락을 쥐어주며 말했다.

“알았어. 근데 넌 어떻게 보자마자 풀었어? 바둑 안 잊어버렸어?”

기영이 도토리묵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오며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아무리 잊어버려도 장문은 알지.”

“그래? 장문이 그렇게 쉬운 거야?”

“장문이 어려운 거면, 어떻게 바둑 시작한 지 한 달도 안된 네가 풀고 있겠어.”

“하긴 그렇네.”

“그나저나 너 바둑에 제대로 빠졌나 봐, 요즘 볼 때마다 문제 풀고 있는 것 같던데.”

“응, 재미있어. 어떻게 보면 단순한 것 같은데, 또 엄청 안 풀리는 걸 보면 복잡한 것 같기도 하고.”

“장문 풀면서 끙끙대는 걸 보니 너도 앞으로 고생이 많겠구나.”

진호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고생은 무슨! 난 걱정 없어.”

기영은 순간 혜린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의 생각에, 그는 혜린과 함께라면 바둑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두렵지 않았다. 그녀의 환한 미소와 낭랑한 목소리가 그의 곁에 머물며 그가 바둑을 잘 둘 수 있도록, 잘 배울 수 있도록 지켜줄 것만 같았다.

“알았어, 그럼 빨리 먹고 들어가서 또 풀던지.”

진호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러나 이미 혜린 생각에 푹 빠져있던 기영에게 그런 진호의 말이 들릴 리 없었다.

“안녕? 여기서 뭐해?”

다연이 한국기원 1층에서 서성이고 있던 혜린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물었다.

“어, 언니야 말로 어쩐 일이야? 오늘 시합 있어?”

“아니, 3층에 볼 일이 있어서, 책 사려고?”

다연이 매장 안을 유심히 살피는 혜린을 보며 물었다.

“응, 언니, 바둑 공부 좀 재미있게 하는 방법 없을까? 어린이들을 위한 책은 많은데, 어른들이 볼만한 책은 거의 지루하게 생겼어.”

“그래? 음……지금 딱히 떠오르는 건 없는데. 기영씨 때문에 그러는 거야?”

“응, 나도 입문부터 가르치는 건 처음이어서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어.”

“흠, 이렇게 열심인 걸 보니까 왠지 수상한 걸?”

“응? 수상하긴, 기왕 가르쳐 주기로 한 거 열심히 해야지. 안 그래? 게다가 성준오빠 친구 잖아.”

혜린이 들킨 속마음을 감추려는 듯 허둥지둥 말했다.

“너 기영씨 좋아하는구나?”

혜린을 가만히 살펴보던 다연이 웃으며 말했다.

“좋아하긴! 그냥 잘 지내고 있을 뿐이야.”

혜린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내가 널 본지가 몇 년인데, 네 얼굴에 좋아한다고 쓰여있어.”

“어?”

혜린이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다연과의 대화로 긴장했는지 얼굴이 뜨거워져 있었다.

“전에 보니까 괜찮은 것 같던데, 어때? 자상해?”

“응.”

혜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지만 쑥스러워 하는 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웃을 때 멋있어, 내가 말하면 잘 들어주고, 진지하면서도 무겁지는 않아. 가장 좋은 점은, 같이 있으면 마음이 너무 편안하다는 거야.”

“너, 이런 모습 정말 처음이야.”

다연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이러는 게 처음인 것 같아.”

혜린도 웃으며 말했다.

“참, 너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있지? 그때 집들이 하려고 하는데.”

혜린과 인사하고 3층으로 올라가던 다연이 갑자기 생각났는지 계단을 도로 내려오며 말했다.

“토요일? 안돼 안돼, 토요일은 힘들어.”

“왜? 너 토요회 빠지지 않았어?”

“토요회는 진작 그만 뒀지. 토요일마다 바둑 레슨 해야 한단 말야.”

“레슨 끝나고 오면 되지.”

“그래도 안돼, 일요일에 하면 안될까? 응?”

“곤란한데……그럼 기영씨랑 같이 오면 어때?”

“같이? 그것도 조금 그래, 나는 괜찮지만... 기영이오빠가 불편할 거 아냐.”

“역시 그런가……알았어. 그럼 나중에 봐서 연락 줘.”

“응, 최대한 가도록 해볼게.”

“오케이! 그럼 난 가볼게.”

다연이 손을 흔들며 사뿐사뿐 계단을 올라갔다.

“기영아,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비워놨지?”

진호가 한창 일하다 말고 기영의 자리로 고개를 들이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토요일? 아니, 나 그때 바쁜데?”

“야, 너 벌써 잊어버린 거야? 그때 우리 대학교 동창회잖아!”

“정말?? 그런가 보네, 까맣게 잊고 있었어.”

기영이 급히 달력을 넘기며 말했다.

“그날 무조건 와야 하는 거 알지?”

진호가 확답을 받겠다는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어쩌지? 난 못 갈 것 같은데.”

“안돼, 무조건 와.”

“나, 약속 있어.”

“연기 해, 아직 토요일 되려면 몇 일 남았잖아.”

“중요한 거야.”

“음……여자야?”

“응. 이번에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기영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는 토요일에 조금 일찍 간다고 해도 별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동창회에 가는 것보다 혜린과 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오케이, 그럼 넌 같이 와.”

“응?”

예상치 못한 진호의 반응에 기영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같이 와, 커플도 환영이야. 너 말고도 같이 오는 애들 많이 있을 거야.”

“아니, 그게……”

“쉿, 다들 일하는데 조용히 해.”

진호가 얌체 같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