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일밖에 모르는 남자는 싫어.’

‘취미생활 하나 없는 남자는 매력 없더라.’

‘그렇게 살면 지루하지 않아요?’

키 크고 늘씬한 여자들이 그의 곁을 지나면서 한마디씩 던졌다.

‘아냐, 이건 아냐!’

눈을 떠 보니 창 밖이 환했다.

꿈을 꾼 것이었다.

그는 예쁘고 늘씬한 여자들을 보면 넋을 잃는 그런 남자는 아니었지만 꿈 내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사실 생각해보니 그 동안 너무 취미나 여가생활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았다.

드디어 바둑을 처음 배우기로 한 날이었다.

바둑판과 알은 인터넷 구매를 통해 이미 사놓은 상태였고 준비해서 나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는 우선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생각보다 일찍 깨서 시간은 넉넉했다.

그는 옷장 문을 열어 놓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배우러 가는 거니까 정장 차림이 좋을까. 아니면 그냥 대학생 때처럼 편하게 입을까?’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결혼식 날 보았던 혜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생각하기에 혜린의 이미지는 평소에도 정장 스타일로 입을 것만 같았다.

‘그래, 첫 수업이니까 정장이 좋겠지.’

그는 출근할 때와 다름없이 잘 다려놓은 와이셔츠를 꺼내 입고, 거울을 보며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만졌다.

하지만 그의 마음엔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설렘이 있었다.

마치 첫 출근을 하던 그 날처럼 말이다.

혜린이 만나자고 한 장소는 종로의 한 작은 카페였다.

그는 근처 골목길에 대충 차를 주차시켜 놓고 바둑판과 알을 챙겨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감미롭고 진한 커피 향기가 잔잔한 클래식 음악의 선율을 따라 그의 몸 속 깊숙이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까페 안은 따뜻했으며 은은한 조명과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이 어우러져 환하면서도 낭만적이었다.

그는 잠시 둘러보다가 혜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구석 아늑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무거운 바둑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푹신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편안함과 동시에 피로가 밀려왔다.

“주문하실 때 불러주세요.”

어느 새 다가온 종업원이 물과 메뉴판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카페 안으로 혜린이 들어왔다.

그녀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에 얇은 코트와 청바지 차림으로 평범한 여대생 같은 모습이었다.

결혼식 때와는 너무도 다른 느낌이었기에 마치 처음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기영이 먼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조금 늦었네요, 죄송해요.”

혜린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금방 왔어요. 어서 앉으세요.”

기영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혜린이 자리에 앉자 아까 그 종업원이 다시 물 한 컵을 들고 다가왔다.

“주문 하시겠어요?”

“저는 아메리카노로 할게요, 여기 커피가 참 맛있어요.”

혜린이 메뉴판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도 같은 것으로 주세요.”

“네.”

종업원이 떠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혜린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사실 저, 바둑 초보는 한번도 가르쳐 본적 없어요. 그래서 일반 바둑교실에서 배우는 것과는 많이 다를지도 몰라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네. 배움의 길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혜린이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