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에 잡탕바둑이 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그 무엇도 아닌 바둑이 잡탕바둑이다.
갈팡질팡, 오락가락은 기본이고 추구방향 또한 애매하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두는 바둑이 잡탕바둑인 것이다.

그렇다고 잡탕바둑이 하수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해설을 듣다보면 프로들도 한번씩 왔다갔다하는 모양이니 비록 고급잡탕이긴 해도 하여간 잡탕은 잡탕인 것이다.

나는 바둑을 배울 때 모질고 독한(?) 사부를 만나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바둑"을 배웠다.
기세를 중시하는 사부를 만난 것이다.
지도대국을 두고 복기를 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깡다구가 없다"였고 "싸나이가.."란 말이었다.
두 집내고 살면서 듣던 이야기였고 삼삼을 파이면서 듣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다른 말은 다 참을 수 있는데, "싸나이가"란 말은 정말 듣기 싫었다.
"아, 싸나이가 여기서 죽을 때 죽더라도 이렇게 깡다구있게 둬야지 도대체 이게 무슨 수야?"란 말을 들으면 속에서 천불이 났고 그러다 보니 바둑스타일이 나도 모르게 깡패바둑 비슷하게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특히 죽을 때 죽더라도란 말이 문제였다.
뻔히 죽는 줄 알면서도 손을 빼 버리는가 하면, 쌈지를 뜰 요량이면 차라리 죽여버리고 마니 머 바둑에 이길 일이 별로 없었다.
또 그렇게 바둑을 지고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게 싸나이라 생각했으니 이길려고 바둑을 두는지 싸나이 소리나 들을려고 바둑을 두는지 스스로도 헷갈리기도 했다.

특히 기원에서는 그 폐해가 정말 심했다.
맞수나 하수에게는 그나마 깡패바둑, 싸나이 바둑이 어느 정도 통해 승률이 좋은데 상수하고만 두면 누가 도대체 깡팬지 도무지 판 맛을 볼 수가 없었다.
세상에 허구헌날 줘 터지는 깡패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줘 터지며 아무리 나 싸나이라 외쳐봐도 알아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다보니 내기에서 줘 터지는 것은 그렇다해도 도무지 바둑 급수가 오르질 않았다.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좋은 점도 있었다.
맞수나 하수들을 줘 패는 기쁨이었다.
대개 기원에서는 1급사범이 치수를 정하는데 내 치수가 실력보다 낮게 평가된 탓이었다.
상수에게 맞짱 뜨자고 달려드니 상수들이 보기엔 아주 형편없는 바둑인데, 막상 맞수라고 붙혀준 사람은 맨날 나에게 줘 터지니 그나마 완전히 죽지않고(?)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나의 이런 바둑 스타일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생겼다.
프로기사에게 지도대국을 받게된 것이다.
바둑이 끝나고 복기가 시작되었는데, 프로기사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물 흐르듯이"와 "아생연후 살타"란 말이었다.
이 세상에 깡다구있게 흐르는 물이 어디 있는가?
또 아생연후 살타가 무언가.
바로 죽을 때 죽더라도와 반대말이 아닌가.
그러면 그동안 모진 바둑사부가 했던 말과 지도대국을 둬 준 프로기사의 말이 서로 정반대이니 내가 배워도 정말 잘못 배웠구나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고 골목에서 놀다 4차선도로로 나온 느낌이 팍팍 들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나의 바둑스타일이 변했다.
아마추어 강자보다는 그래도 프로기사의 말을 듣는 게 맞지 않겠는가.
정말 물 흐르듯 조심조심, 일단 두집을 내더라도 살고나서 공격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바둑을 두니 승률도 좋아지고 한점 정도는 바둑이 는 것 같았다.
체면이 밥먹여주나 소리가 자주 내 입에서 나왔고 집 많은 넘이 이기는 게 바둑이야 소리도 자주 나왔다.
두 집 내고 사는 일도 잦아졌다.

그런데 얼마전 평소 존경하는 오로 왕별사범(흐흐, 비밀)에게 지도대국을 요청했더니 혼쾌히 수락해 줘서 바둑을 한 판 둔 적이 있었다.
먼저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 드린다.
그런데 바둑이 끝나고 이 왕별사범께서 복기를 해 주시는데 난 그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왕별사범: 굴초님, 죽을 때 죽더라도 이렇게 두시면 안되고 이렇게 두셔야죠..."
굴초: ??????????
왕별사범: 바둑에 기세, 즉 깡다구가 없어요, 그럼 바둑이 안 늘죠..ㅎㅎㅎㅎ
굴초: ??????????

그담부터 내 바둑, 깡패도 아닌 것이 물도 아닌 것이 그만 잡탕이 되고 말았다.  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