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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야화>기원의 아름다운 여인

2007-06-20 오전 8:18 조회 12356추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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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에서 여인을 보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부산 여성기우회가 있었던 서면의 88기원은 그렇다해도 일반 기원에서는 정말 드문 일이었다.
자욱한 담배연기에 듣기 힘든 남자들의 질퍽한 입담이 여성들의 기원출입을 어렵게 하는 탓이었다.

부산의 양정로타리에 있는 모 기원.
그리 큰 편은 아니어도 손님이 많았던 이 기원에 아름다운 30대중반정도로 보이는 한 여성 기우가 어느날 모습을 나타냈다.
현숙미가 느껴지는 이 여성은 대략 5급정도의 기력이었는데, 낮시간에만 와서 잠시 몇 판 바둑을 두고 가곤했다.

인근 빌딩에 사무실이 있던 나는 무료한 점심식사시간이 끝나면 잠시 이 기원을 들리곤 했는데, 어느날 원장의 소개로 이 여성과 바둑을 둔 적이 있었다.
그리 강한 5급은 아니었지만 바둑을 진지하게 두는 스타일이었다.
기원에서 여성이 그것도 아름다운 여성이 바둑을 두는 모습이 무척 신기해서 나는 다른 사람과 바둑을 두다가도 나도 모르게 이 여인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볼수록 품위가 느껴지는 그런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바둑도 주로 동급들보다는 고수들과 2점에서 넉점을 놓는 접바둑을 주로 두곤했는데, 한 눈에도 바둑을 배우려는 진지함이 엿보였다.
게다가 한 사람과 여러 판을 두는 법이 없었고 한 판이 끝나면 간단한 복기를 한 다음 상대를 바꾸어 바둑을 두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며칠 뒤 이 기원에 들렀더니 예의 이 여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이제는 이 기원에 출입하는 사람들과 안면을 익혀서인지 바둑두는 모습도 자연스러웠고, 가끔 남자들의 짖궃은 농담도 그런대로 받아넘기는게 기원 분위기에 완전히 적응한 모습이었다.
기원문을 들어서는 나를 보자 여인이 가벼운 눈인사를 했다.
괜히 마음이 울렁거렸다.

오늘도 여느날처럼 경마가 시작되었다.
기원에서 내기바둑을 자주하던 맴버들이 기원 한 켠에 쭈욱 일렬로 앉았다.
그런데 막 경마를 시작하려는데 이 여인이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자기도 참여하면 안되겠냐는 거였다.
놀라운 일이었지만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뭉디같은 머스마들끼리 바둑을 두는 것보다야 여성이 끼여 있으면 그 재미가 더욱 나는 법이기에 설령 경마에 돈을 걸지 않아도 참여시키고 싶은 것이 모두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막상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약삭 빠른넘 한넘이 우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양 여인에게 아첨을 하고 나왔다.
공짜로 참여시켜 주겠다는 거였다.
선수를 뺏긴 우리는 모두 속으론 아차했지만 겉으론 박수까지 치며 여인의 무임승차를 허용했다.

그렇게 여인까지 포함, 이 기원 단골들의 왕창 경마가 시작되었다.
문제는 여인이 포함된 탓에 사람 수가 홀수가 되어버린 거였다.
그러자 또 한넘이 잽싸게 여인의 1회전 부전승을 선언했다.
하여간 가관이었다.
모두가 이 여인에게 잘 보이려 기를 쓰고 있었다.
부전승한 여인은 아쉽게도 첫 판에서 탈락을 해 버렸고 나는 승승장구 결승에 진출했다.
여인이 보고 있으니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우승을 하고 싶은 마음도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승상대는 약1급의 기력인데 끝까지 강3급을 자처하는 망치란 넘이었다.
얼마나 치수를 깐깐하게 놓는지 한 판 이기기가 정말 쉽잖은 넘이었다.
정선인 상대를 두점을 놓고 두니 꽤 머리를 굴려야 이길 수 있는 그런 상대였다.

포석에서부터 어려운 길을 갔다.
쉽게 쉽게 가다가는 이넘을 이길 수 없어서였다.
갈갈이 판을 찢어 놓아야지 모양바둑따위로는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장고에 들어간 사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또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또다시 가슴이 진탕되어왔다.
여인은 관전을 하며 옆사람과 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망치는 예상대로 깐깐하게 버텨왔다.
하지만 상금이 걸린 큰 바둑에서 하수가 상수를 이기기는 힘든 법.
중반 착각으로 대마를 잡힌 망치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돌을 던져버렸다.
나는 우승이 확정되자 상금을 그냥 주머니에 넣기가 뭣하여 기원원장을 불렀다.
그리고 멋진 포즈로 나의 기료와 여인의 기료까지 내어주고는 미안한 마음에 경마참여자 모두에게 커피를 한잔씩 시켜주었다.
하지만 경마에서 이긴 것 보다 오히려 여인의 기료를 내 준 게 더욱 기분이 좋았다.

경마한 사람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다가 또다시 여인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뜻밖에 여인이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그리곤 봉투 하나를 슬며시 내밀더니 나중에 기원밖에서 보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놀랍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해서 사무실로 돌아오자말자 봉투를 열어보았다.

그런데 뜻밖에 봉투속에는 전단지 한장이 들어 있었다.
그 전단지를 보는 순간 나는 그만 웃음이 피식 나오고 말았다.
" 모모기원 개원 안내"란 문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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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公^^移山

｜ 2007-06-20 오전 8:36:00 [동감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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