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전화가 왔다.
동문 바둑대회가 있으니 기 대표로 좀 참석해 달라는 전화였다.
우리 기수를 대표해 단골로 참석하던 친구 중 하나가 외국 출장중이라 참석이 어려워 부탁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번 동문바둑대회는 개인전에서 입상을 할 경우 바둑티비 고교동문전에 학교 대표로 선발된다는 이야기도 덧붙혔다.

동문바둑대회는 단체전과 개인전으로 나뉘어 진행이 된단다.
원래 동문바둑대회의 성격상 단체전이 더 중요한 면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개인전에 입상을 하면 바둑티비 대표로 선발이 되니 개인전 쪽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여지껏 한 번도 참석해 보지 못한 동문바둑대회가 어떤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고 호승심도 솟구쳤다..

그래서 참석하겠다는 승낙을 해버렸는데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자칫 망신살이 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할 수 없이 며칠 바둑 공부를 했다.
주로 최근 유행포석에 대한 부분이었다.
초반 정석과정에서 못 보던 수를 당해 망해버릴 수도 있고 그러면 망신이란 생각에서였다.

동문바둑대회는 생각보다는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동문중에 선배분이 운영하는 기원에서였다.
개인전 오더가 제출되고 대진표가 나왔다.
처음 참석한 나에겐 모든 것이 신기했지만 동문들간의 끈끈한 우애가 느껴졌다.

대회 진행상 단체전이 먼저 벌어졌는데 우리 기수는 그만 초반 탈락을 해버리고 말았다.
물론 나를 포함해 2명이 패한 결과였다.
괜히 마음이 움추려 들었다.
한 판이라도 이기고 싶었는데 상대가 너무 강해 처음부터 밀려 패한 바둑이어서 더욱 그랬다.

이제, 총호선으로 시작된 개인전.
서로의 기력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두는 맞바둑이었다.
당연히 초반에 강자를 만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시합 전 참석한 동기 친구들이 누가누가 강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괜히 선입견을 갖고 바둑을 두어봐야 이득이 될 게 없겠다는 생각에서 의식적으로 그 말을 흘려들었다.

긴장이 되는 첫 판.
선배와의 대국이었다.
조심조심 그야말로 그 동안 모든 나의 기력을 총동원하여 바둑을 두었다.
의외로 상대가 좀 약한 듯한 느낌이 들었고 중반이 되자 결국 선배가 견디지 못하고 돌을 거두었다.
태어나서 바둑대회란 곳에 처음 참석을 하고 처음 거둔 승리였다.
없던 자신감도 생기고 한 번 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게 보통 뿌듯한 느낌이 아니었다.

16강까지만 오르면 대성공이라는 애초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8강까지 올랐다.
내가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는 성적이었다.
여기 참석한 사람은 각 기수에서 그래도 내노라하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동기들은 16강전에서 모두 탈락해 버렸다.
그들은 평소 자기들 보다 약하다고 생각되던 내가 8강까지 오르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니가, 어쩐 일이고, 발에 땀 났냐?"
"대진운이 좋아서겠지, 머 , 사실 나도 믿어지지 않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으론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이제 한 판만 더 이기면 학교대표로 바둑티비에 나갈 수 있겠다 생각하니 가슴이 떨려왔다.

단체전 준결승과 개인전 8강전부터는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치러지는 모양이었다.
모두들 예약해둔 식당으로 몰려갔다.
동기들과 함께 식당에 도착하니 이미 식당안은 화기애애한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탈락한 선후배들이 먼저 술상을 차고앉은 것이다.
그런데 갈비탕을 시켜 먹을려고 하는데 갑자기 누가 어깨를 툭 쳤다.
"이게 누고, 얼마만이고! "
처음엔 나도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는데 자세히 보니 대학시절 선배였다.
반가운 마음에 내가 그의 손을 덥썩 잡자 그가 나의 손을 끌었다.

그와의 기억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밀려오던 농구대, 자욱한 최류탄 가스, 경찰서 감방, 골방같은 자취방에서 라면을 끓여먹던 기억, 그리고 함께 두던 바둑, 내기로 먹던 찐만두와 순대국밥.
헤어보니 벌써 30년 전의 아득한 일이지만 그의 얼굴을 보니 어제의 일같이 느껴졌다.
주름진 그의 얼굴을 보니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그에게 술을 한잔 따르고 그가 부어 주는 술을 마시며 그의 근황을 물었다.
" 우리 나이에 IMF 탄 놈치고 멀쩡한 놈이 어디 있노? "
정답이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이후, 재기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그도 그 덫을 벗어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니 괜찮겠나?"
동기들이 붉어진 나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잖아도 몇 잔 마셨더니 얼떨떨한게 영 그랬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여기까지 올라 온 것만 해도 그게 어디고?"
대학시절 동고동락하던 선배를 만나고 술을 한 잔 먹었더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고 대범해지는 듯했다.

바둑티비를 시청했다.
나를 8강전에서 이긴 동문의 얼굴이 화면에 등장했다.
그를 보자 8강전 바둑을 두고 나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라 쓴웃음이 났다.

"야, 니 이 바둑으로 어떻게 8강까지 올라 왔노, 신기하다 신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