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은 손으로 보고 머리로 둬야하는 게야..."

철학자는 오늘도 관전을 하며 얼토당토않은 듯한 난해한 말을 툭 뱉는다.
바둑을 두던 사람들도 관전하는 사람들도 잠시 눈가를 찌푸리고는 다시 바둑판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마10강에 든 적이 있는 이름난 고수와 이 기원 최강자 칼치의 한 판 승부.
칼치란 별명은 워낙 물어뜯는 이빨이 앙칼지고 끈질기다하여 붙혀진 별명이었다.
모두가 조용히 관전을 하는데 철학자만 계속 난해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칼치야 한 두 번 겪는 일이 아니어서 그렇지만 상대는 괜히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그냥 두기가 뭣하다며 잔돈푼이라도 걸고 두는 바둑이었다.
훈수야 아니라지만 누가 무슨 소리를 하면 당연히 신경이 쓰이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이들이 누군가.
명색이 하늘같은 1급들이 아닌가.
기원에서 고수들의 바둑에 입을 대는 건 예의에도 어긋난 일이었다.
보다 못한 기원원장이 한마디한다.

" 그 참, 철학은 좀 있다하라니까...."

우리 모두는 그를 철학자라 불렀다.
워낙 어려운 말을 많이 해서도 그랬지만 어떻게 들으면 정말 심오한 그 무엇이 있는 듯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 또한 철학자 같았다.
항상 턱수염에 국방색으로 물들인 쟈켓을 걸치고 다녔고 내심을 짐작하기 어려운 외모도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기원 사람 모두가 그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기원에 와서 바둑을 두는 것도 아니고 왔다갔다 관전만 하며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를 지껄이니 그럴 법도 했다.
그가 무슨 죄를 짓고 도망 다니는 사람일 거란 이야기도 들렸다.
지난번 기원에 불심검문이 있었는데 그가 슬며시 비상계단쪽으로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둑은 두지 않고 관전만 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벌려놓은 사업이 있어 자주 기원에 들리지 못하다보니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를 꺼려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의 말도 잘 받아주고 가끔 맞장구도 쳐주니 나에게 호감이라도 가졌는지 내가 바둑을 두면 그는 꼭 내 옆에 붙어 앉아 관전을 했다.

오늘 점심시간쯤 해서 원장의 전화가 왔었다.
전국구 강자 한 분이 기원에 오기로 했으니 꼭 들러서 한 수 할 수 있으면 하라는 전화였다.
하던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기원엘 도착하니 칼치와 그가 이미 두 번째 판을 두고 있었다.
첫 판에서 패한 모양인지 칼치는 더욱 신중한 모습으로 판을 짜 나갔다.
흑을 잡고 대모양작전을 펼친 상대는 가볍게 날아온 칼치의 삭감에 맹공을 퍼붓고 있었고, 칼치는 타개의 맥점을 짚으며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프로의 바둑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형태지만 달리 답이 있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 워크라인을 넘었어,,,, 워크라인..."

철학자의 한마디가 또다시 툭 튀어 나왔다.
그는 바둑은 두지 않고 관전만 했다.
해서 그의 정확한 기력을 알 수 없지만 3급쯤 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7-8급쯤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지금의 판세를 가지고 저 이야기를 했다면 그는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백의 삭감이 한칸정도 깊어 보인다는 생각을 막 하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도 나의 얼굴을 쳐다보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날리고는 반상으로 얼굴을 휙 돌려버렸다.
바둑은 칼치의 완패로 끝났다.

원장의 제의로 이번엔 나와의 바둑이 시작되었다.
마음속으로 실리위주보다는 판을 두텁게 짜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워낙 대세에 밝고 전투가 강해 두텁게 두어야 기회가 오리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실리부족으로 맥없이 질 수도 있겠지만 고수들과의 대국에서는 어쨌든 두텁게 두어야 승률이 더 높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철학자는 언제 그랬는지 내 옆에 바싹 붙어 바둑을 관전하고 있었다.
자리를 이동하는 경황중에  잽싸게 내 옆자리를 차고앉은 모양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역시 상대는 강했다.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반상에서 끝없이 나를 괴롭혔다.

" 완전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구만...."

철학자의 한마디가 불쑥 튀어 나왔다.
반상이 급박하게 돌아 가다보니 흘려들었지만 상대가 수읽기하는 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의 형세를 두고 하는 말인 듯도 했다.
두텁게 둔다는 것이 상대에게 실리를 너무 많이 허용하고 있었고, 상대의 발빠른 쨉에 속수무책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힐끔 쳐다보니 그가 이번엔 심각한 표정으로 반상 한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노려보는 곳은 좌상귀 한 수 늘어진 패가 있는 곳이었다.
물론 결행시기를 언제 할 것인가 고심하는 곳이기도 했다.

상대가 가일수를 하면 그만인 곳이지만 내가 패를 쉽게 걸어갈 곳도 아니었다.
반상엔 그곳 말고도 급하고 큰 곳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패를 걸어 그 곳 말을 잡을 동안 상대는 세수를 둘 수 있기에 수지타산이 맞지 않다 생각하고 있었다.
나에겐 팻감도 그리 많지 않았다.

" 꽃놀이 판이야, 꽃놀이판...."

이번엔 큰 소리가 아니고 혼자말같은 작은 소리였다.
상대는 패가 나는 곳을 연신 곁눈질하는 철학자를 힐끗 쳐다보며 검미를 찌푸렸다.
그리곤 장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한참을 생각에 몰두하던 그가 의외로 좌상귀 패나는 곳을 가일수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 그곳을 두는 그를 보며 그렇다면 이 바둑은 내가 지기 어려운 바둑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기가 아니었고 반상엔 급한 곳들이 많다 여겼기 때문이다.
갑자기 손을 빼는 바람에 그의 다른 쪽 말들이 곤마로 몰리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 아까 했던 말들, 무슨 뜻이 있어서 한 말이에요?"
바둑이 끝나고 내가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 이 사람아, 뜻 없는 말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
" 그럼 무슨 뜻으로 한 말이에요? "
" 내가 뜻이 있다고 해도 듣는 사람이 없다면 또 없는 게지 뭐..."
"..............."
" 아, 그건 그렇고 바둑 이겼으니 저녁이나 사....."

기원을 나서는 나의 뒤를 졸졸 따라 나서는 그를 데리고 근처 이름난 청국장집으로 갔다.
" 바둑 두시는 것 한번도 못 봤는데 정말 기력이 어떻게 되세요? "
청국장 특유의 향이 베어나는 호박을 한 입 베어 물며 내가 물었다.
" 못 둬...."
" 그런데 아까 보니 좀 두시는 것 같던데요? 좌상귀를 쳐다보시는 게..."
" 좌상귀?" 모르겠어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거길 쳐다본 거야,,,,"
" 그런데, 그가 그 때 하필 그곳을 가일수하는 바람에 제가 이긴 건 아세요?"
" 몰라..... 그랬어? "
기가 찼다.
그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내가 우스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여간 덕분에 바둑도 이기고 평소 먹고 싶던 청국장을 먹었다는 생각에 마음은 즐거워졌다.

식사를 마치고 전철을 타야하는 나는 지하보도 앞에서 그와 헤어지기 위해 그를 쳐다보았다.
" 지하철 타려는구먼 "
" 아, ...예..."
" 오늘 정말, 저녁 잘 먹었어, 그런데 그 친구 그거 참, 귀도 얇고 눈도 얇더구만...........잘 가게..."
"............."

ps:<IMF가 전국을 강타하던 시절, 기원은 불심검문의 중점대상지역이 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 여럿 연행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본 적이 있다.
분명 바둑의 고수이었을 반상의 철학자,
하루종일 바둑도 두지 않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이후로 그를 만나지 못했으니, 그의 기력 또한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