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즐거움이 하나 생겼다.
작년엔 개인적인 사정으로 경황이 없어 보지 못했던 한국바둑리그 관전이 그것이다.
물론 올해라고 개인적인 사정이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비우고 나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몸부림친다고 딱히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1년을 허비한 셈이니 올해는 작년 몫까지 챙겨 한국바둑리그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관전하기로 작심을 했다.

일요일, 대형 마켓에 나가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바둑리그 관전 때 먹을 간식을 미리 사두고, 간식에 맞는 술병도 챙겨두었다.
먼지 뭍은 바둑판도 닦아 거실 중앙에 놓아두고 바둑알은 깨끗이 씻어 신문지에 말려두었다.
어차피 할 관전이면 제대로 해야겠단 생각에서였다.

바둑판에 돌을 하나 하나 놓아보며, 티비와 컴으로 하는 쌍방향관전.
나는 이것을 꿈의 관전이라 명명했다.(^^)

개막식 중계를 티비로 보면서부터 나는 벌써 환호하기 시작했다.
팀의 경중을 살펴봐도 무언가 멋진 승부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팍팍 왔기 때문이다.
어느 팀 하나 만만한 팀이 없고, 오더로 승부를 가리기에 변수 또한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리그에 참여하지 못한 프로기사들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팬들이 환호하는 무대에서 멋진 승부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기사가 어디에 있을까 싶었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 아웃사이더의 삶을 사는 나에게는 남의 일로 보이지 않는 작은 아픔이었다.
하지만 작년 리그에 참여하지 못했던 백홍석사범이 올해 1지명이 된 것을 보면 또한 절치부심의 계기도 될 것이고 우리의 바둑실력이 더욱 나아질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관전을 하면서 별 쓰잘데없는(?) 문제가 또 생겼다.
관전을 하면 관전하는 넘답게 해설로 나오는 참고도를 보거나, 바둑의 포석이나 행마, 형세분석등의 기본적인 관전 룰을 즐기면 되는데, 자꾸만 진땀을 흘리는 기사의 얼굴을 애처롭게 바라보거나 팀 대항전이다보니 이미 진 바둑을 던지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두어가는 기사를 보며 탄식을 지르다 그만 바둑판에 돌놓는 일이 중간에 자꾸 끊기는 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괜히 승자보다는 패자에게 안스런 마음이 들고, 특히 팀승리를 결정 짓는 5국을 두는 기사나 2;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패점을 봇짐처럼 지고 바둑을 두는 기사를 보면 이건 내가 바둑을 관전하고 있는 건지 드라마를 보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 생기고 만 것이다.

승리한 조혜연사범의 말마따나 개인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긴장감이 대국내내 프로기사들을 짓누르고 있을 것이고, 자신의 패점에 대한 부담감 또한 그만큼 큰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걸 마치 드라마 보듯 보고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기가찼다.

그러다 보니 슬슬 술쪽으로 눈이 가기 시작하고(^^), 결국 두 번째 대국이 끝나는 11시경이 되면 그만 축 늘어져 버리고 마는 일이 자주 생겨버렸다.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가 술쪽으로 붙으면 사고가 나기 마련이고, 한 번 땡긴 술이 어디 가며 원래 중독과 친한 게 또 술이 아닌가.

몇 주일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슬슬 설사기운에 몸살기운이 도는 게 이건 아니잖아란 생각이 들었다.
야구장에서 야구를 보며 사이다병에 넣어온 술을 마시는 것과 무어 다르리 싶었다.
멜로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찔찔 짜는 아내를 타박하던 생각도 났다.
더 이상 꿈의 관전을 알콜 향연의 장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다시는 일요일 마켓에 나가 술을 사지 않기로 굳게굳게 맹세를 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엄청난 인내력을 발휘해 나는 쇼핑카에 술을 담지 않았다.

그리고 월요일, 집안 모임이 있는 날.
동생이 엄청나게 큰 쇼핑백을 들고는 나타났다.

" 니는 뭘 그래 많이 사들고 왔노?"
"어, 형님아, 집에 하도 양주병이 많아서 형님 잠 안올 때 먹으라고 안 가져왔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