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음악을 가져다 준 친구

고등학교 2학년때의 겨울이었다고 생각된다.

동복을 입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1학년, 2학년때는 그다지 친분이 없었던 것 같은데 3학년이 되고서 조금씩 가까워진 친구가 있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직접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선물하는 것은 전부터 듣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한 개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자기 집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토요일 오후였던가?

당시 부산 시청앞에 있는 동광동의 어떤 백화점으로 들어갔는데, 백화점 윗층에 십 몇층의 맨션이 있는것도 처음 알았고 맨션건물 안에 분수대였는지 풀장이었는지 있는 것도 처음 보았다.

친구는 나를 자기 방으로 소매를 끌었다.

지금 생각하니 친구방이 아니고 음악감상실이었던것 같다.

집이 집인지라 당시 인기였던 4단짜리 분리형 콤퍼넌트를 상상했는데 방안에는 턴테이블과 카세트덱키 그리고 라디오가 일체형인 전축이 한 대 놓여져 있었다.

왼쪽 아래에 AKAI라고 적혀 있었다.

스피커가 50센티도 더 되는 큰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처음, AKAI라는 영문자를 보았을때는 이것이 전축의 모델명인지 제조회사의 이름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몰랐다.

아카이(赤井)전기.

1950년도 초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테이프 레코더를 개발하고 이후 40여년동안 카세트덱키분야에서 또 하나 일본의 명기 나카미치와 함께 독보적인 선두를 달렸던 기업이다.

카세트덱키의 헤드가 찰칵 소리를 내면서 회전하는 오토 리버스기능도 이 회사의 발명품이다.

1990년 세계가 디지털로 향해 갈 때, 나카미치와 함께 시대의 조류를 타지 못하고 몰락해간 회사이지만 나는 이 이름만 들어도 애수를 느낀다.

이후 아이와, 소니의 워크맨에 매료된 일본의 젊은이들은 아카이와 나카미치의 이름을 잊어 갔지만 나카미치의 카세트덱키는 지금도 세계에서 최고급품으로 거래되고 있다.

친구는 나름의 녹음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음반위에 바늘을 내릴때 곡이 시작하기 5초쯤 전에 정확히 내려 놓았으며, 녹음 레벨을 조정하고 헤드폰으로 듣고 있다가 음악이 시작하기 직전 솨아하는 소리가 들리면 포즈버튼을 능숙하게 눌러 해제시켰다.

음악이 종료되면 즉시 녹음레벨을 제로로 돌려서 곡과 곡 사이의 지직거리는 잡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그대로 계속해서 녹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되돌려서 음악이 끝나는 부분을 찾아서 3초가량 간격을 두고는 다시 포즈를 걸어서 녹음 대기.

이 일련의 수순을 할때의 친구의 손은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는것 같았다.

녹음볼륨 제로,포즈,플레이+녹음+스톱,리턴+스톱,플레이,포즈해제,(플레이+스톱,리턴+스톱,플레이,플레이+스톱,리턴+스톱,플레이),포즈,플레이+스톱,플레이+녹음,녹음볼륨조정,

한 곡이 끝날때마다 위와 같은 수순을 반복했다.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읽어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아는 사람은 친구가 얼마나 기기를 소중하게 다루었는지를 느낄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위의 일련의 수순을 행할때 걸리는 시간은 7초에서 8초정도이다.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할때까지 3초가량 간격을 둔다고 했으므로 실제 조작 시간은 5초도 걸리지 않는다.

처음 녹음볼륨 제로는 곡이 끝나고 레코드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잡음을 없애기 위한것이고, 포즈로 녹음 스톱, 그리고 스톱버턴만 눌러서 플레이/녹음버턴을 탈칵소리가 나게 해제하지 않고, 플레이/녹음/스톱을 동시에 눌러서 충격이 가지 않게 해제를 시키는 것이다.

원래 고급기기이므로 재생이나 녹음시에 스톱버턴만으로 해제시켜도 탈칵소리가 나지 않고 가볍게 딸깍하고는 스프링작동이 아닌 유압이 작동하듯이 해제되었지만 친구는 한층 더 조심스럽게 조작버턴을 다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되돌려서 곡의 마지막까지 듣고는 3초간의 공간.

괄호내의 수순은 곡의 마지막부분을 찾을때까지 몇 번이나 반복하는 부분인데 친구는 대부분 한 번 만에 찾았다.

카세트덱키는 녹음레벨을 제로로 하면 어떤 테이프라도 깨끗이 지워졌다.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녹음테이프는 사치를 했다.

선경 SK테이프를 선호했는데 음이 부드럽고 좋았다.

클래식용으로 더 비싼 크롬테이프가 있었지만 내게는 조금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친구가 녹음해 준 테이프는 열 개가 넘는다.

아마 반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제일 많이 받았을 것이다.

싸구려기기로만 듣다가 제대후 취직하여 스테레오를 사서 처음 들었을때의 감동.

헤드폰을 끼면 음악이 귀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 한 가운데에서 울렸다.

그 때 부터 볼륨을 크게 해서 듣는 버릇이 생겼다.

볼륨을 올리면 카세트의 헤드가 녹음테이프의 바닥을 달리면서 흠집 하나하나까지 돋보기로 샅샅이 훑는 광경이 그대로 전해졌다.

동시에 친구가 한 곡 한 곡에 얼마나 정성을 드렸는지도 전해졌다.

곡과 곡사이의 짧은 공간.

아직 사용하지 않은 새테이프를 재생시켰을때처럼 칠흑같은 어둠속을 달리다가

그러다가 갑자기 눈앞이 확 밝아지듯 솨아하는 잡음아닌 잡음과 함께 음악이 시작될 때 AKAI의 테이프기술력이 어느정도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친구는 집에 데리고 간 사람들을 돌아갈때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검사를 하곤 했다.

집안의 책장이나 가구등에 작은 소품따위가 놓여져 있었는데 몰래 호주머니에 넣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손을 쑤셔넣는지라 엉겁결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친구는 이런식으로 합격한 사람들만을 다시 집으로 데리고 갔다.

열 개의 테이프는 대부분 팝송이었는데 나는 그 때 까지 팝송의 지식이 없었다.

친구는 테이프의 길이를 계산해서는 되도록이면 곡수를 정확히 맞출려고 했다.

테이프가 남더라도 곡이 중간에 끊어지는 녹음은 하지 않았다.

30년이 지난 지금, 제도용 잉크로 문자판을 대고 쓴 곡명은 아직도 예쁘게 남아 있지만, 듣고 듣고 또 들은 테이프는 늘어지고 때론 곰팡이도 피어서 이미 카세트로 듣기에는 무리일지 모른다.

그래도 버리지 않고 보물상자속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와 함께...

친구의 음악은 내 개성(개같은 성질)과 지성(지랄같은 성질)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군대에서 훈련이 끝나고 잠자리에 들면 나는 상상속에서 테이프를 틀었다.

열 개가 넘는 테이프의 곡명과 순서는 물론 틈새의 감각까지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으므로 연주시간까지 똑같이 재생되었다.

대개 선택한 테이프의 두번째 곡이 끝나기 전에 잠이 들었지만 말이다.

일본식의 고집스런 장인정신은 일본을 기술대국으로 발전시켰다.

2차대전때 일본은 제로센이라는 놀라운 성능의 전투기를 만들었다.

또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伊402 잠수모함」은 폭격기를 적재할수 있는 상상조차 못한 잠수함이었다.

미국은 전쟁이 끝나자 아직 남아 있던 20여기의 伊402 잠수모함을 모두 나가사키의 앞바다에 침몰시키고 70년동안 극비에 붙였다.

잠수함기술이 소련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나서 미국은 몰래 설계도를 빼돌려 이후 원자력잠수함을 만들때 참고했다.

전쟁이 끝나고 그런 기술은 음향기기와 산업분야로 이어졌다.

일본인은 지독한 실험정신으로 미국이 50여회 실험하다가 포기한 액정화면의 재료 브렌딩을 600번이나 하면서 성공시켰고, 샤워식 변기를 개발할때도 회사의 여직원들을 상대로 항문에서 그 곳까지의 길이를 재어달라고 공문을 내었다는 해괴망측한 민족이기도 하다.

그런 엉뚱한 발상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노벨상을 많이 받는 나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현재 내 수준에서 가능한한 음향기기는 고급을 쓴다.

그래봤자 진공관앰프는 엄두도 못내고 대형스피커를 울릴수 있는 onkyo앰프도 아파트생활에 과분해서 포기하고 결국 정착지는 소니의 워크맨이다.

귀에 꼭 끼는 헤드폰과 디지털 워크맨의 멋진 음향은 큰 부담없이 최고급 스테레오를 내게 선물해 주었다.

그 워크맨도 소니에서 최고의 기술력을 동원해서 속을 전부 금으로 만드는지 한 대에 13만엔짜리가 나온다고 하니 이거야 원... 죽기전에 반드시 사야 될 물품리스트에 일단 등록을 시켜 놓았다.

복권이 걸리기를 진심으로 바랄뿐이다.

친구와는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다.

군대 제대하고 내가 세상을 등진것같은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30여년이 지난 어느 날, 페이스 북에서 친구를 만났다.

나름 성공해서 잘 살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 모두가 나보다 잘되게 해 달라고 기원한 보람이 있었다.

이젠 나도 잘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