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와 야수

스무살 때 한 여성을 만났다.

누가 먼저였던가?

아마도 그녀가 먼저였던것 같다.

방송실 열쇠를 경리과에 맡겨두었다고 해서 찾으러 갔다.

그 때 그녀를 만났다.

처음 나를 보고는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며 말을 더듬던 그녀...

그 뿐이었다.

그 때 경리실에서 본 그녀의 모습이 제일가까이에서 본 모습이었다.

직원식당은 학생식당과 달랐으므로 만날일이 없었다.

다만 점심먹고 돌아오는 길에 멀리서 가끔 눈에 보였을 뿐.

그렇게 일년이 지났다.

나는 이성과 사귄적이 없었고, 그 흔한 미팅조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 때 안면도 거의 없는 다른 학급에서 미팅을 가는데 나에게 참가하겠느냐고 했다.

내가 방송부였기때문에 얼굴이 조금 알려진 모양이었다.

상대는 인천공전의 여학생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경리실 아가씨에게 빼앗긴상태였으므로 갈 수 없다고 했다.

그 때 갔다온 한 친구의 말이, 자기의 파트너였던 여학생은 키도 작고, 얼굴도 가무잡잡하고 주근깨까지 박혔는데 못생긴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고 했다.

친구는 그다지 마음도 없어서 그 이후로 연락도 않았는데, 뜻밖에도 이듬해 내가 입대할때 그 여자애가 노래를 불러 주었다.

이등병때 유격훈련장의 라디오에서 들었다.

그 친구이름이 재희였나보다.

J 스치는 바람에

J 그대모습 보이면

졸업식 날이었다.

식이 끝나면 나는 부산으로 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경리과의 그녀를 보고 싶었다.

그 때 언제나 마찬가지로 멀리서 식당에서 돌아오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20-30미터는 떨어졌을까?

지나가는 동안 둘은 얼굴을 돌리지 않고 내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우리 일행과 함께였고, 그녀는 항상 같이 다니는 남자직원과 함께였다.

그렇게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10년이 지났다.

10년동안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모습만을 그리며 살았다.

어느 날 호적에 일본 여자의 이름이 올라 와 있었다.

이성 한 번 사귀지 못한채 결혼을 한 것이다.

7월의 초였다.

카즈히로의 표정이 이상했다.

출근하자마자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멋적은 미소를 띄기도 하는 등 어딘가 나사가 빠진듯이 보였다.

오전내내 그 모양이었으므로 과장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며칠전에 간단한 회식이 있었다.

NC반 다섯 명이 자리를 만들었는데 뜻밖에도 경리과에서 아가씨들이 참가하겠다고 한 것이다.

한 명은 우리 NC반 담당이었으므로 그런가고 생각했으나 나머지 둘은 의외였다.

하지만 짐작이 안가는것도 아니었다.

얼마전부터 CAD실 앞을 지나가는 아가씨하나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귀여운 얼굴의 아가씨가 지나갈때마다 창문너머로 내개 꼬박 고개를 숙이고는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차츰 그녀가 신경이 쓰이게 되고 타임카드를 보고 경리과소속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번 회식에 경리과에서 여직원 세 명이 온다는 말을 듣고 그 아가씨가 올것이라고 나름 확신했다.

카즈히로는 20대후반의 총각으로 몸이 옆으로 조금 걱정될정도로 퍼졌지만, 사교성과 가오(顔;얼굴)는 덩치와 반비례해서 제로였다.

복장이나 행동거지에 대해서도 도무지 신경쓰는 법이 없었다.

여러모로 종합해서 판단해도 돈을 덩치만큼 싸들고 다닌다면 또 모를까 이성에게 호감을 살만한 구석이라고는 눈씻고 찾을래야 찾을수 없는 그런 녀석이었다.

그 날 노리꼬는 반바지에 가슴이 볼륨있게 나온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스물 두 살의 복숭아빛 살결이 예뻤다.

세 시간정도 회식과 담화를 하고 2차로 가라오케를 하고는 끝났는데, 회식자리에서 내내 아무 말도 않고 입벌리고 웃고만 있던 이 총각이, 앞자리에 앉아있던 가슴 빵빵한 처녀에게 그만 마음을 빼앗겨버린 것이었다.

과장에게 살짝 고백을 한 카즈히로는 스스로 부끄러웠던지 온 몸에서 김을 뿜었다.

옆에 앉아 있는 내게까지 열기와 오로라가 시끈거리며 밀어 닥쳤다.

노총각의 뜨거운 열정이 누구도 감히 근접하지 못하게 베리어(barriers)를 쳤다.

자신의 감정표현이 장차 어떤일로 번질지 예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홀로사랑은 현실과 체감차이가 너무 난다.

카즈히로는 회식 다음날인 토-일요일동안 상상의 황금마차를 타고 달릴수 있는곳까지 달렸고, 반면 노리꼬의 마음에 이 퍼진 총각이 차지하는 비중은, 「해품달」의 세자가 연우의 마음을 얻고자 할 때 설명하는 내관의 그림만도 못했다.

노리꼬는 「제로%」를 명확히 했고, 회사의 청소와 뼁끼칠, 꽃밭에 물주기등 잡일만 도맡아서 하는 실질적 대빵 상무이사는 무언중에 NC반 회식금지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회사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로 민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소문은 160명 회사원 전원에게 돌았다.

누가 봐도 성사될 확률이 「영원의 제로」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회사에서 제일 귀여운 경리과 꽃과 카즈히로는 첫 상상이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 그 자체였다.

무거운 공기가 7월 내내 CAD실안에 흘렀고 카즈히로는 더욱 말이 없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  날 이후로 노리꼬는 출퇴근때 CAD실 앞을 지나지 않고 건물밖을 돌아 나갔는데, 한 달 후에 내가 보고 싶다고 하자 NC담당 아가씨의 등 뒤에 얼굴을 가리고 나타났다.

그리고 나와 노리꼬의 말없는 사랑이 시작되었다.

카즈히로는 그 이후 NC프로그램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3일에 한 번은 지각이고, 하는 일은 실수투성이였다.

덕분에 내 일이 늘어났다.

매일 잔업이었다.

노리꼬도 잔업이었다.

오후 7시에 같이 마칠때가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섯시면 퇴근을 한다.

아무도 없는 넓은 공장안에 사방의 불이 꺼지고 홀로 남은 수은등 불빛을 받으며 타임카드앞에 둘이 있는 것이다.

그럴때면 항상 오랫동안 서서 이야기를 했는데 다른 직원들은 그런 우리들을 알고 있었다.

그 해 여름부터 점심시간에는 매일 바닷가로 나갔다.

백사장을 거닐다가 휴식 끝나기 5분전에 돌아오면 노리꼬와 만날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리꼬도 점심을 사무실에서 먹지 않고 제2공장에 있는 친구와 함께 지내고는 역시 비슷한 시간에 나왔다.

멀리서 보이면 서로 손을 흔들면서 헤어졌다.

2년 후, 그녀가 결혼해서 회사를 그만둘 때 까지...

카즈히로가 먼저 회사를 그만두었다.

무거운 공기를 감당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더 이상 뿜어낼 오로라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유급휴가가 40일 이상 남아 있었으므로 출근은 안해도 카드는 남아 있었다.

한 달 분의 카드가 전부 유급휴가도장으로 채워졌다.

그렇잖아도 바쁜데 NC프로그램과 기계가공까지 나 혼자서 담당을 하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 둔 그가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노리꼬가 칼부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들렸다.

노리꼬도 쓸쓸한 모습으로 2년을 보냈다.

노리꼬와 나는 회사안에서만 만났다.

밖에서는 만나지 않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년 후 여름, 그녀는 임신6개월의 몸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그 두 달후에 퇴직을 했다.

스무살때 첫사랑의 그녀에게 말한마디 건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결혼전에는 그녀를 생각하면서 다른 이성을 사귀지 않았다.

결혼후에도 그녀를 잊지 않았다.

아내이외의 여성이라면 그녀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다른 여성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견딜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노리꼬를 생각하면서 다른 여성을 멀리할 수 있었다.

카즈히로의 사건이 없었더라면 노리꼬와 나는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었을까?

한국을 좋아하고, 김과 김치를 좋아하고, 한국에 가 보고 싶다고 하던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