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오 이군이야기

7월도 중순에 들어선 어느 금요일이었다.

나와 박, 그리고 옆 동네 니시오(西尾)에 사는 이군, 이렇게 셋이서 후지산에 갔다.

내가 제일 선배이고 그 다음이 박, 이군이 제일 아래이다.

이군은 나와 세 살 차이지만 한국사람들은 군대 경험이 있기에 그래도 선배대접을 깍듯이 한다.

아니, 내가 군기를 좀 잡는 편이다.^^

후지산이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록되고 내년부터 등산하는데 유료화한다고 한다.

이전부터 등산계획만 가지고 있다가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아이치현 토요하시는 나고야에서 토쿄쪽으로 100킬로 떨어져 있다.

토요하시에서 연락하고 사는 한국남자는 일곱명이다.

니시오는 토요하시와 나고야의 중간쯤에 위치하는데 나고야한인그룹에 빼앗기지 않을려고 내가 억지로 이군을 이쪽으로 끌어 당겼다.

이군은 자칭 왕족이시다.

영친왕의 형제의 손자뻘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막은 알 도리가 없다.

박은 이군을 뻥군이라고 부른다.

입에서 나오는것은 숨쉬는것 빼고는 뻥이라는 이야기다.

그래도 조선의 마지막 황가이야기는 빠삭하게 꿰뚫고 있는것을 보면 사실같기도 하다.

이군만 생각하면 멀쩡하던 배가 아프다.

순천에서 건달같이 생활하던 넘이 일본에 와서 땡을 잡았다는것부터가 나를 배앓이를 하게 만든다.

나는 일본말도 잘하고 열심히 사는데도 이모양 이꼴인데 이군은 늦게 만난 마누라덕에 그야말로 왕족같은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 제 복이고, 조상 잘 만난 덕택이니까 내가 배아파할 이유도 없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금요일, 일을 마치고 저녁 아홉시에 토요하시를 출발했다.

후지산까지는 고속도로로 세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보통때는 등산로 입구인 5부능선까지 자동차로 갈 수 있으나, 여름 두 달은 산 아래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셔틀버스로 올라가야 한다.

셔틀버스요금이 왕복 2000엔가량이다.

주차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토요일 새벽 첫 차로 출발할려고 계획을 잡았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밤 열 두 시 반이다.

넓은 주차장이 이웃해 있는데 제1주차장은 이미 다 들어찼고 경비원들이 제2주차장으로 안내를 한다.

주차장근방의 숲에서 적당히 자리 만들어서 잘려고 비닐시트와 침낭을 준비해 왔지만 주위가 어수선해서 잘 수가 없었으므로 다시 차안으로 들어 갔다.

차안에 멀거머니 앉아 별을 세다가 조금 눈이라도 감을라치면 한밤중인데도 쉴새없이 들이닥치는 차량들의 불빛과 소음에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럭저럭 몸만 뒤척이다가 새벽 네 시에 밖으로 나와서는 주차장구석에서 가져온 삼계탕을 데워서 아침배를 든든히 채웠다.

후지산의 등산로는 몇갈래가 있지만 대표적인것으로는, 시즈오카현의 「후지노미야」에서 오르는 「후지 스카이라인」, 야마나시현의 「후지요시다」에서 오르는 「후지 스바루라인」, 그리고 카나가와현쪽의 「고템바」에서 출발하는 등산열차등이 있다.

5부능선의 등산로입구에는 매점과 주차장이 있다.

입구를 들어서서 표고 2400미터라는 간판을 지나서 위를 올려보면 후지산은 그야말로 별 볼품이 없다.

사진이나 그림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삿갓모양의 민둥산이다.

퍼석퍼석한 화산재로 된 돌덩어리만 깔려 있을뿐 나무 한 그루 없다.

가끔씩 풀이 한 두 포기 보일뿐이다.

정상까지 1500미터이지만 한달음에 다다를것 같이 보인다.

이군은 산을 오르면서도 쉴새없이 입방아를 찧었다.

밤중에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

일출을 보기 위해서다.

또는 산장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다.

이군은 그런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인사를 했다.

이 날은 외국인이 많았다.

단체로 온 것 같았다.

이군은 젊은 아가씨들에게 영어로 인사를 했다.

하긴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했으니 굼모닝정도야 할 수 있겠지.

후지산은 막상 올라보면 그 매력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등산로 도중도중에 산장이 있다.

7부까지 올랐을때 비가 내렸다.

갑자기 날이 추워졌다.

산위의 날씨는 엄청나게 변덕스럽다.

3000미터를 넘어서자 숨이 가빠왔다.

말로만 듣던 고산병이었다.

평소 운동안하던 댓가가 고스란히 나타났다.

고산병.

그것 참 뭐랄까.

몸이 평소의 내 몸이 아니었다.

열 발짝을 걷고는 주저앉아야 했다.

마치 1000미터를 힘껏 달린것처럼 숨이 차고 현기증과 함께 속이 울렁거렸다.

10분정도 쉬고는 다시 일어나서 걷지만, 마찬가지로 딱 열 발짝에서 주저 앉았다.

딱 열 발짝이라고 한 것은 현기증과 구토가 나는 것을 참고 이를 악물고 주저앉지 않고 열 발은 어떻게든 버티었다는 말이다.

생각하니 이런 자신이 한심해서 웃음이 나올것 같았지만 숨을 헉헉대고 있는 마당에 웃을수도 없었다.

두 시간 가량을 이렇게 올라가다가 8부에 있는 휴게소에서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박과 이군에게 전화를 하니 축구라면 사족을 못쓰는 박은 이미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이군을 만나 한 번 더 정상까지 갔다고 한다.

8부 휴게소에서 떨고 있는데 박이 내려왔다.

이군은 지쳐서 헤롱거리면서도 여전히 아가씨를 보면 인사를 하는등 주책을 떨고 있었으므로 성질급한 박이 먼저 내려와 버렸던 것이다.

둘이서 이군을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9부 휴게소인데 다리를 다쳐서 못내려가니 나보고 올라와 달라고 한다.

평소 신용이 뻥이라 장난치는줄 알았다.

그런데 9부의 산장주인이 전화를 바꾸더니 뼈가 부러진것 같아서 구급대를 불렀다고 한다.

9부까지는 직선거리로 200미터이다.

다시 힘을 내어 도전했으나 한 번 고산병 맛을 본 몸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5부능선의 캐터필러가 드나드는 비상로입구에서 기다리겠다고 하고는 하산을 했다.

신기하게도 한 발짝 내려올때마다 힘이 솟아났다.

고산병은 씻은듯이 사라졌다.

거짓말 안보태고 반쯤 날라 내려왔다.

해진후의 5부능선은 추웠다.

비까지 주절주절 내렸다.

스카이라인 입구에서 올라오는 길은 여름 두 달은 셔틀버스등 허가차량만 통과할 수 있다.

경찰의 허가를 받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입구를 지키는 못생긴 경비원들은 그렇게 거짓말치고 몰래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들여 보내주지 않았다.

소프트뱅크 핸드폰은 불통이었다.

한참을 기다리니 위에서 만났던 경찰이 나오면서 겨우 들어 갈수 있었다.

비상로입구에서 구급차와 같이 구조대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저녁 8시가 되어서 구조대가 이동침대를 메고 내려왔다.

구조대원은 전부 8명이었다.

사고가 난 것이 오후 두 시반 경이었으니까 구조대는 여섯시간만에 9부까지 올라갔다가 4명씩 교대로 이동침대를 메고 내려 온 것이다.

이 날 후지산에서 발생한 사고는 모두 세 건.

젊은 여자 한 사람은 발목을 삐어서 역시 들것에 실려 내려왔고, 또 다른 여성은 고산병으로 쓰러졌다가 구조대가 올라가자 즉시 회복되었다.

역시 제일 큰 사고를 낸 이군은 그 날 저녁과 다음 날 아침 뉴스에 얼굴과 이름을 빼고 시즈오카 지역방송을 탔다.

후지산은 정상까지 편도 대여섯시간정도 걸린다.

가엾은 구조대원들은 이 날만 세 번을 산을 오르내린 것이다.

후지노미야 시민병원.

밤12시에 응급처리가 실시되었다.

사고의 개요는 이렇다.

혼자 처진 이군은 내려오면서도 벨기에에서 온 아가씨와 아침인사 정도밖에 안되는 짧은 영어로 이야기를 하다가, 앞에서 내려가던 아줌마가 넘어지자 덮치지 않을려고 몸을 크게 회전시켜 피했단다.

멋지게 공중제비돌기로 폼을 잡은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옆에 가만히 있던 죄없는 바위를 걷어 차버린 것이었다.

퍼석퍼석한 화산재라고는 하나 사방에 구멍이 뻥뻥뚫려 날카로운 모서리로 무장하고 있는 놈을 걷어 찼으니 발이 무쇠가 아닌 이상 배겨 내겠는가?

왕족의 통뼈도 복합골절이라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응급처리로는 일단 발을 잡아당겨 3일정도 경과를 본 후에 본격적인 수술을 한다고 한다.

발목부근에 구멍을 뚫어 쇠심같은 것을 박고, 그 심에 추를 매달아 당긴다고 하는데 마취를 하고 10분도 안돼서 시술을 한다는것이 아닌가?

밤 12시.

아무도 없는 병원의 긴 복도에 왕족의 비명소리만이 길게 이어졌다.

아침 7시.

어젯밤, 그러니까 오늘 새벽 4시에 이군의 부인이 도착했다.

도착했다는 말만 듣고 인사도 하지 않은채 세 시간이 지났다.

모습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한 시간이 지나서야 이군의 부인을 만날수 있었다.

병원원장선생과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는사이였던 것이다.

중부지방의 명문 나고야대학출신답게 이런 저런 상위클라스의 인사들과 연을 갖고 있었다.

하긴 장인어른이 토요타자동차의 협력회사의 사장으로 직원만 100명이 넘고, 부인은 회사의 이사겸 특수고등학교의 교장선생이다.

이틀동안 한 잠도 못잔채 다시 세 시간을 달려 토요하시로 돌아왔다.

이군은 그 후, 그야말로 왕족대우를 받으며 시민병원의 원장급 의료진으로 구성된 수술진으로부터 수술을 몇차례나 받고 근 1년후에야 철심을 뽑고 완치되었다.

물론 6개월째부터 운전도 하고 골프도 쳤지만 거의 회사도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보험금과 치료비등 일년 연봉에 가까운 보상금을 받고 월급은 월급대로 또 60%를 받았다고 하니, 그 넘은 지금 작년에 산 차를 렉서스로 바꿀까 벤츠로 바꿀까 고민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