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양에게

20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저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양에게는 그저 한 순간 스치고 지나간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간단히 기억에서 지워버릴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코베지진이 일어나기 전 여름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그 때 양은 양의 큰아버지 가족과 함께 일주일정도의 일본관광을 하고 있었습니다.

토쿄와 오사카를 관광하는 코스라고 여행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오사카에서의 2박3일간의 일정을 제게 맡긴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시 관광가이드경험이 많지 않았습니다.

산업통역과 일정이 짜여진 단체관광을 서너번 했을뿐, 저 자신이 일정을 기획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양의 일행과는 한 번도 연락도 없이 다만 여행사로부터 받은 짧은 메모만을 의지하고 계획을 짜야했기에 불안이 앞섰습니다.

내 마음대로 계획을 짰다가 취소가 되면 식당예약이라던지 차량의 수배등 캔슬료를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여행사에서는 K항공 오사카지점의 H차장님이 양의 큰아버지의 친구분이므로 그 분과 상담해서 계획을 짜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일주일전부터 H차장님을 만나서 제가 짠 2박3일간의 일정을 체크받았습니다.(공교롭게도 모두 H이군요. 저도 H입니다)

H차장님은 양의 큰아버지는 일본사정을 잘 아시는 분이니까 가족들을 중심으로 짜라고 했습니다.

양의 일행은 큰아버지 가족이 아들 둘, 양의 가족은 딸만 둘로 모두 여덟분이었습니다.

양은 당시 초등학교 4학년정도였고 언니는 6학년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계획을 말하면 첫 날은 오후 네 시에 신오사카역으로 가서 양의 일행을 호텔까지 안내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둘쨋날은 나라(奈良)관광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날은 오전에 간단히 오사카시내 구경을 하고 공항까지 배웅하는것으로 2박3일간의 일정이 끝납니다.

당시 가이드 일당이 25,000엔이었으므로, 2박3일간의 요금은 75,000엔입니다.

생각해 보면 첫 날과 마지막 날은 별로 안내도 없는것같이 보입니다.

특히 첫 날은 신오사카역에서 호텔까지 가는것이므로 솔직히 가이드 필요없습니다.

택시나 지하철타고 가는것이 낫습니다.

하지만 여행사에서 3일로 오더가 내려왔고, 당시의 가이드요금의 기준이 호텔픽업, 공항픽업이 전부 하루일당이었습니다.

당연히 여행사에는 3일치 수수료를 보내야 합니다.

H차장님도 그렇게 요금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첫 날부터 어긋났습니다.

오후 네 시에 신오사카역에 도착예정이었던 양의 일행이 비가 오는 바람에 두시간이나 일찍 와버린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핸드폰이 없었고 저는 오후 네 시에 맞추기 위해서 일찍 기숙사를 나와서 다른 볼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약속된 열차시각을 몇 번이나 넘겨도 도착하지 않으므로 호텔로 전화를 하니 조금전에 체크인했다고 합니다.

급히 호텔로 가서 다음 날의 일정등을 상의하니 양의 큰아버지는 나라관광은 필요없고, 그냥 간단히 오사카시내관광만 하고 마지막날은 택시를 타고 공항까지 갈테니까 가이드는 필요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차량을 수배한 것에 대해서는 요금을 지불하겠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비가 내렸지요.

미니관광버스를 타고 오전에 간단히 쇼핑만 했습니다.

점심은 우동을 같이 먹었지요.

저는 일정이 어긋난것에 대해서 사정을 말씀드리고 요금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상담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차에서 내리자 마자 호텔로 뛰어들어가면서 얼마주면 되겠어? 하고 물으시는지라 자세한 사정을 말씀드리기 곤란하다고 생각되어 이틀간의 요금인 5만엔입니다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양의 아버님이 제 멱살을 잡았습니다. 이런 도둑놈!하는 눈초리였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양이 안쓰러운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어린 소녀앞에서 참으로 부끄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양의 큰아버지는 ”됐어, 그만 둬” 하고는 5만엔을 주시면서 ”학생이 그러면 못 써!”하고 일갈했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가이드를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학생때도 어른이 되어서도 그 때 이외에 멱살을 잡혀본 기억이 없습니다.

내 행동이 멱살을 잡힐정도였던가 항상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양의 나를 바라보던 눈길과 같이...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살았습니다.

입을 다물었다는것은 하고 싶은일을 제대로 못했다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되겠습니까?

여기저기 나름 못난 생각이지만 글도 발표도 하고 싶었고, 통역이나 가이드로서의 자질도 더 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웬일인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엔진이 걸려주지 않았습니다. 마치 「영원의 제로」속의 겐타로같이...

양의 아버님께 잘못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럴수도 있는 일이겠지요.

제가 그것을 잘 처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2년전에 일본의 소설을 한 편 읽었습니다.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한국 서점에서 찾아보니 아직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6년동안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인데...

아마도 한국에서 출간되기 어려운 내용이 아닐까하는 평이었습니다.

나름 번역을 해 보았습니다. 번역을 하면서도 많이 울었습니다.

번역을 마치고 한국어로 누군가가 출간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제가 책을 내고도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서툰 번역에 웃음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올해 8월. 한국어로 책이 나왔습니다.

웬지 또 눈물이 나더군요... 제가 작가신청을 한 이유입니다.

양에게 먼저 이 말을 해야 될 것 같았습니다.

양은 아마 기억도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 기억속에 남아 있는 양의 그 안쓰러워하던 눈빛을 이젠 내려놓을려고 합니다.

이해해 주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