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 몇이 모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근처 동산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들은 분명 동산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를 보면서 그리는데, 정작 화선지 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중국의 남쪽 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물소의 형상이었다.

“선비님 . 어찌하여 우리 소가 점점 물소의 형상으로 변하는 것입니까?”

곁에서 먹을 갈아주던 기녀가 말했다.

“중국의 남종화법에 따르면 뿔은 활처럼 둥글게 하고 다리는 이렇게 통통하면서도 되도록 짧게 그리도록 되어 있느니라.”

“그럼 , 남종화법을 따른다고 우리 소가 물소로 둔갑되는 것이란 말이 옵니까?”

“지각 있는 선비들은 다 이렇게 그리느니라”

기녀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아무리 남종 화법이 훌륭하다 해도 우리 소를 물소로 그린건, 억지 같사옵니다. 중국의 남종화법이 그런 건 그쪽 지방의 사물들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 아니 옵니까?”

기녀의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선비가 나섰다. 기녀를 한심한 듯 쳐다보며 말했다.

“야! 이년아, 네 년이 남종화법에 대해 무얼 안다고 함부로 지끌이느냐! 네년이 지금 까탈을 잡는 이 남종화법은 바로 대국에서 나온 것이니라. 우리 조선보다 문물이 앞서 있는 대국에서 나온 것이니라. 그런 대국이 네 년보다 못해 그렇게 만들었겠느냐. 그기에는 나름대로 다 뜻이 있을 것이니, 여러 소리 하지 말고 먹이나 열심히 갈거라”

한바탕 기녀를 꾸짖은 선비들은 계속해서 우리 소를 물소의 형상으로 그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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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당시의 조선 선비들은 그렇게 그렸다. 우리의 실경보다 중국의 화법에 따라 그림을 왜곡시켜 그렸다. 의심스러우면 그 당시의 선비들이 그려 놓은 소의 그림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당시 조선 선비들의 지식수준이 낮아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식 정도만을 가지고 따진다면 중국인들 보다 우월하면 우월 했지 모자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선비들이 몇 백 년 동안 우리 소를 물소로 그린 이유는 대체 무엇 때문일까?

물론 그 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이념 즉, 성리학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이념이 부재한 사회는 그 구성원들의 지식수준이 아무리 높다 해도 절대 정체성을 찾지 못한다.

또한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지 못하면 가치관 또한 상실되어 사물들을 바로 보지 못하고 반드시 본질을 왜곡 시킨다.

그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바로 이 때문에 조선의 선비들이 우리소를 물소로 왜곡 시켰던 것이다.

만약, 율곡 이이가 나타나 조선 성리학의 이념을 바로 정립해 주지 않았다면 선비들은 계속해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그랬다면, 겸제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 같은 걸출한 화가들도 배출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의 진경산수 또한 꽃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았지만 이념이란 이처럼 중요하다. 이념이 정립되지 않으면 반드시 본질은 왜곡되고 한낱 지엽적인 것이 주제보다 우위에 올라 온통 사회를 오도 속으로 빠트리게 된다. 그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외는 없다. 이념이 부재한 사회에서는 그 같은 현상이 꼭 일어난다.

지난 날의 경우처럼 우리나라에 창조적인 예술인과 학자들이 극히 더물었고, 어느 곳 하나 안 곪아 터진 곳 하나 없이 끊임없이 분란이 발생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시대의 이념이 부재해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들인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이념의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는 기성 종교들이 변질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체성을 잃은 것이며 가치관을 왜곡 시켜 진실을 망각했던 것이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유교 문화 때문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무신론자들이나 불교, 기독교인들에게 면죄부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이미 자신들이 믿는 종교인들이기 이전에 먼저 유교 인이기 때문에 뭉뚱그려 말했을 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유교 인이란 우리 민족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 초기부터 우리의 모던 사고를 지배한 유교의 그림자는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은 유교 인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세계관과 생활 방식은 유교적인 가치 질서에 기반하고 인간관계에서는 유교적인 신념 체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껍데기만 포장 했을 뿐 그 내용물은 여전히 똑같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자신이 불교인 이라면 그기에 오만이 가해져 있고, 자신이 기독교인 이라면 독선이 첨가되어 그 질이 더 더럽게 변질 되었다는 것뿐이다.

나는 이를 신유교 인이라 부르고 싶다.

국가 이념의 기준을 제시하는 종교들, 특히 근대의 신유교가 허구였기 때문에 지난 백 년 동안 그 같은 현상들이 나타났던 거였다. 뿌리가 썩었기 때문에 잎이 마른 이치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신유교의 문화가 제시하는 것이 도덕으로 포장되었기 때문에 쉽게 눈치를 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유린되고 세뇌되어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조적 위선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 문화에 흠뻑 젖은 우리가 보호하고 있었던 거였다.

만약
앞으로도 이러한 신유교의 해악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저 우연으로 치부 하거나 정치적 책임만을 묻는다면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답답함의 실체를 찾아 내지 못할 것이다.

결국 조선의 선비들처럼 우리 소를 물소로 왜곡 시킬 것이며, 스스로 쪼다 짓을 계속해서 저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