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이 되니 인터넷이 고장이 나버렸다. 전기가 다시 개통이 된 후 유선망으로 공급받는 인터넷이 전화는 되는데 고장이 난 게 이상하여 신고를 하였더니 24시간 이내에 수리업자를 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24시간이 무엇인가? 정전은 수요일 날 있었고 수리요청은 목요일 오전에 하였는데 금요일이 지나가도 누구하나 나타난 사람은 없었다.

토요일 아침 100번에 전화를 하였더니 수리에 관한 상담은 일과시간에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할 수없이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매일 일과처럼 찾아갔던 “오로바둑”을 접할 수 없으니 무료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럴 때는 그림그리기도 싫어진다. 논산훈련소에서 고된 훈련 와중에 일기를 썼으면서도 시간이 남아도는 고참 땐 쓰기가 싫어졌던 심보와 같은 것이리라.

금요일 저녁 한바탕 두통 처리를 하고 TV를 틀어보니 골프 체널에서 LPGA 에비앙 마스터즈 대회 2라운드를 중계하고 있었다. 정전이 되고 인터넷이 안 되는 뜻하지 않는 상황에 당황하여 얼마 전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던 중계일정을 깜박했었나 보다.

내가 에비앙 대회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던 이유는 한동안 미국 세에 밀려 주춤했던 한국여자골프의 중흥이 이 미림, 박 인비. 유 소영에 이어 마지막 메이저 대회라는 에비앙 대회에서 꽃을 피울 것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다행히 정전만 되면 말썽을 부렸던 말레이시아 독점 무선방송인 아스트로는 전기가 들어온 직후에 재개가 되었었다. 나 더러 에비앙 대회의 예감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확인해보라는 하늘의 배려인지도 모른다. 사실 아스트로가 너무 말썽을 부려 한때는 끊어버리려고 몇 번이나 마음먹었었고 또한 여러 차례 “언제까지 수리를 못해준다면 그만 보겠다”고 계약 취소 으름장을 놓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들은 고장이 잘 나지 않는 새 레코드를 구입하라고 하였었고 그 것을 거절하자 슬그머니 아이템을   늘리고 그에 따른 이용료를 조금씩 인상시켜 청구하여 오고 있다. 싸우기 귀찮고 KBS World는 보아야겠기에 그냥 넘어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따질 요량이다.

스포츠 아이템은 이래서 시청하게 된 것 중의 하나인데 유럽 축구가 대부분인 채널 중에서 골프 채널이 들어가 있고 LPGA를 중계해준 것에 대해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LPGA-내가 아스트로를 통해 KBS World를 빼고 유일하게 시청하는 프로이다. 골프를 좋아하기는 하기는 하지만 PGA 프로도 보지 않는 내가 이 프로를 빠지지 않고 보려는 이유는 한국선수들의 이름 때문이다. 어느 스포츠 채널에 이만큼 한국선수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가? 그것도 항상 상위 랭커로.  비록 브라운 관에서이지만 눈물나도록 반갑기만 한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전국 300개도  되지 않은 골프장 숫자도 문제지만 이용료가 아마 세계에서 가장 비싼데다가 겨울에는 연습도 못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세계를 주름잡는 선수들이 이렇게 즐비할 수 있단 말인가? 특히 LPGA는 박세리 김미현 한희원 등의 세대를 거쳐 신지애 시대에 접어들자 본산지 미국에서 텃세를 부리고 아우성을 칠 정도로 한국 선수들의 활약이 극성에 달하고있으니..

싱가포르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한국, 이상한 나라이지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자동차가 쏟아져 나오고, 남북으로 분단되어  한 때 통신의 자유가 제한받은 환경에서 인터넷 산업이 세계 제 1위를 달리는가, 하면  실제로는 만져보지도 못했던 양궁을 전통무예처럼 만들어버리니 한국은 아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비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까지 칭찬을 해주니 점심 한 끼 안 살 수 없었다.

LPGA에서 천재로 꼽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은 미국 내에서도 화제가 된 미셀 위요 또 한사람은 뉴질랜드 국적의 리디아 고라고 하는데 두 사람 모두 한국인이어서  LPGA에서도 이제는 한국여자골퍼들의 천부성을 인정하였으며 그 배경을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8월24일 시작한 카나디안 페시픽 우먼스 참피언 대회에서는 아예 1-2-3-4 라운드 전 과정에서 유 소영 최 나연 박 인비 등의 한국선수들이 다른 나라 선수들이 낄 틈도 주지 않고 우승의 각축을 벌린 것도 이젠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선수들이 우승을 다투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3주 연속 한국선수들의 우승. 그동안 뜸했던 우승의 봇물이 추석을 한 달 앞두고 터져버린 것이다.

그 다음 주 8월 31일 시작한 포클렌드 클라식 역시 김 인경 허 미정이 카를로스 시간다(스페인)를 사이에 두고 선두에서 앞  서거니 뒷 서거니 하다가 결국 두 사람 다 고배를 마신 일은 4연속 우승 기록을 못 세운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나에게 떠오른 이상한 예감 - 9월 11일 벌어질 에비앙 대회에서는 분명히 한국 선수가 우승할 것이라는 예감은 날자가 가까워질수록 믿음과 확신으로 변해갔다. 한국 선수들을 위해 추석 기간을 쉬게 하고 그 다음 주로 날자를 잡은 주최 측의 배려도 한국선수의 우승을 미리 예감하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에비앙 대회 2라운드에서는 박 세리 크리스티나 킴 등 왕년의 선수들도 얼굴을 비추었다. 그러나 선두를 달리고 있는 생소한 이름의 김 효주나 톱 10 중간쯤의 허 미정의 얼굴보다 폴라 크리머, 스테이시 루이스 등의 미국 선수들 모습이 훨씬 더 화면을 차지하고 있어 하마터면 내 예감에 틈이 생길 뻔하기도 했다.

3라운드 경기도 김 효주의 선두를 깜짝 선두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지만 그들이 희망하고 있는 미국선수들이나 호주의 캐리 웹처럼 나도 김 효주 허 미정 외에 최 나영 박 인비 김 인경 등의 선전을 믿고 있었다. 분명히 한국의 누군가는 우승할 것이야.  또 한사람의 기대주, 장 하나도 톱 10에 들어가 있지 않은가?  (3 라운드  화면에서는 얼굴을 볼 수가 없었지만)

그리고 마지막 라운드, 나의 믿음은 브라운관에서 그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경쟁자로 생각된 캐리 웹이 1번 홀 버디 후에 2번 홀에서 더블 보기를 하여 2번 홀 버디를 잡은 김 효주와의 타차가 3타차로 벌어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최 나연의 1, 2, 4, 5번 홀의 버디로 -8타, 장 하나의 1번 홀 위기 탈출 후 이글로 -6타,  리더 보드 네 칸이 아예 한국선수들로 채워져 내 믿음은 더욱 확고해졌고 더불어 카나디안 오픈을 방불케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중계 두 시간 후 그러니까 한국시간으로 하오 10시경(이곳 시간 9시경) 스코어 보드는  김 -9, 최-8, 허 -7, 장 -6...... 이건 누가 보아도 한국의 우승이 확실시 되는 것이었다. 마치 마라톤 경기에서 꼴인 지점을 눈앞에 놔두고 네 명의 한국 선수가 선두로 달리고 있는 형상이 아닌가?     
     

“잘한다, 한국! 오, 대한 미인국!”

여러 경쟁자들이 제풀에 넘어져갔다. 콜롬비아의 만자야 우리배가 2위 그룹을 따라오는가 싶더니  러프 샷 보기를 하면서 뒤로 처지기 시작했고, 루이스나 크리머 역시 3위 그룹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전년도 우승자 수잔 페터르센도  보기와 버디를 들쑥 날쑥하면서 오만상을 찌프리고 자신에게 짜증을 내고 았을 정도였고.... 반면 우리의 선두 그룹은 화색이 만면한 가운데 2위 그룹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이것이 웬 일인가? 호주의 여걸 캐리 웹이 9번 홀 10번 홀 11번 홀에서 3 연속 버디를 잡으며 치고 올라오지 않는가? 어느덧 그녀는 선두그룹에 합류하고 말았다.어허, 저러면 안 되는데.... 그러나 우리의 호프, 19세 두 달 짜리 밖에 안 된  한국의 잔다르크 김 효주는 9번 홀, 11번 홀, 12번 홀에서 버디를 잡으며 다시 12언더파로 달아나니 감탄이 절로 절로 나온다. 더군다나 그녀의 천진난만한 미소는 캐리 웹의 늠름하면서도 위엄이 있는 노장의 표정을 무시해버리는 것 같아 더욱 믿음이 갔다.

마지막 라운드 티 박스에서 한 타 차이인 김 효주와 캐리 웹이 한 조로 마지막 출발을 할 때 나의 믿음이 없었다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19년 경력의 노련미를 메이저  대회에 처음 출전한 김 효주가 어떻게 맞설 것인가? 그러나 김 효주의 뚝심은 대단했다. 승부와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하면서도 한 타 한 타 앞질러가는 그녀의 경기 모습을 보면서 걱정은 기우였음을 느끼게 하였던 것이다.

중계 3시간 후의 결과 : 김 -12 최 -9 장 -9 웹 -9 허 -7
중계 3,5hrs 결과  : 김 -12 최 -10 장 -10 웹 -9 허 -9
     

그러나 이때부터 우리나라 선수끼리의 우승 다툼이 시작된다. 자중지란을 벌리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가던 최 나연부터 공격적인 샷이 시작된다. 버디와 보기는 백지 한 장의 차이. 마지막 버디를 위해 보기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략지를 공격해간다. 그러나 기대대로 되지를 않는 것이 안타깝다. 오히려 14번 홀에서 보기를 하더니 17번에서도 보기, 결국 -8로 내려앉고 말았다. 거기에 장하나 역시 한 타를 잃어 -9가 되었고,,,
 

문제는 캐리 웹의 침착한 플레이였다. 14번 홀에서 김 효주가 첫 번째 보기를 범한 사이에  그녀는 착실히 버디를 낚아 결국 한 타 차로 좁혀 들어온 것이다. 그러더니 이내 15번 홀에서도 버디, 김 효주와 동타를 만들었고,  설상가상으로 16번 홀에서 김 효주의 두 번째 보기가 나오니 18번 홀에 캐리 웹과 김 효주의 마지막 조가 남았을 때의 스코어는 암담하기 짝이 없게 되어버렸다.

웹 -11 김 -10  장 -9 허 -9 최 -8
   

불과 30분 사이에 벌어진 대란에 아나운서도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Korean- Where we are now? 그들은 모두 캐리 웹의 노련미- 39세의 나이로 프로경력 20년차 그리고 LPGA 경력 19년차의 침착성과 노련한 경기운영을 입에 거품이 일어나도록 칭찬하면서 그녀의 우승을 기정 사실화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비록 수만리 떨어진 말레이시아의 안방에서 TV로 경기를 보고 있지만 한 홀이 남아 있는 한 아직 지지는 않았음을 자위하고 있었고 정말이지,  뜬구름 잡는 식으로 김 효주가 이길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캐리 웹의 18번 홀 두 번째 샷이 핀으로부터 20m정도 거리가 있는 그린 왼쪽의 에이프런에 떨어졌다. 화면상으로는 내리막 경사의 그린 엣지에 걸려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리고 다음 김 효주의 두 번째 샷이 핀으로부터 2-3m 정도 앞쪽에 떨어졌다.(나중에 들어보니 4,5라고 했지만 처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럼, 그렇지! 마지막 기적의불씨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흔들의자를 브라운 관 쪽으로 더욱 잡아 당겼다.

그린 앞에 몰려있는 관중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어떤 이들은 일어나서 손을 흔들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박수를 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플레이오프를  기대하는 관중들의 약자에 대한 동정의 응원인지도 모른다.

아나운서가 정리를 하려는 참이었다. “-몇 가지를 상정해 볼 수 있겠는데, 김이 버디를 잡고 웹이 파를 한다면...... ”  말도 다하기 전에 케리 웹의 칩 삿이 공 밑을 파고 들었고 하얀 공은 핀을 넘어 2m  이상  밀려나가고 말았다.

그래, 그래.... 캐리 웹이 긴장하고 있는 거야.

이쯤 되니 아나운서뿐만 아니라 관중들도 머리 속에 간단한 도식 몇 개는 순식간에 그려졌을 것이다.

두 사람 다 원 퍼팅= 프레이 오프
둘 중의 한 사람 투 퍼팅= 패자
두 사람 다 투 퍼팅 =  프레이 오프     
 

문제는 김 효주의 볼은 홀 컵으로부터  4,5m 거리이지만, 캐리 웹의 공은 2m 정도밖에  떨어져있지 않다는 것이다.

내 생전에 이렇게 긴장된 시간은 없었나 보다. 황 영조의 마라톤 우승 경기, 박 종환 감독이 이끌었던 청소년 축구팀의 맥시코와의 대전 그리고 레너드와 헌즈의 복싱 경기도 이렇게 숨 막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입이 바짝 바짝 타들어갔지만 캐리 웹의 투 퍼팅과 김 효주의 버디 퍼팅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누구도 이 도식은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천하의 케리 웹 - 박 세리도 못하고 박 인비도 금년엔 틀려버린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였으며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그녀가 LPGA 회원도 아닌 김 효주의 거리보다 훨씬 짧은 퍼팅을 놓칠 리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조건 프레이 오프아니면 캐리 웹의 승리를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어쩌랴. 김 효주의 공이 완만한 S자를 그리며 홀 컵으로 홀 컵으로 전진하더니 컵 앞에서 잠시 빙글거린 척 하다가 (브라운 관에 바싹 붙인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땡그랑!

반면 캐리 웹의 공은 홀 컵을 스치며 위쪽으로 지나가는...... 오, 무심한 108mm 홀 컵이여! 

하늘님! 두통으로 밤낮없이 머리 싸맨 이 중늙은이의 염원을 들어주셔서 감사,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얼토당토한 제 믿음이 맞아떨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관중들이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폼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 에비앙 대첩을 하염없이 음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글은 9월 14일 자정쯤 경기가 끝난 즉시 라운드 전반의 기억을 반추해가며 15일 새벽에 쓴 글이라 얼마간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음을 말씀드리오니 양해바랍니다.
그러나 지난 몇 개월 동안 세월호에 발목잡힌 대한민국에 이렇게 기쁜 경사가 일어나다니 누군가와 더불어 이 기쁨을 나누고 싶어 사라지려는 기억의 꼬리까지도 끄집어내려고 안간힘을 썻씁니다.

5시간의 시청 그리고 3시간의 독수리 타법.

덕분에 저는 일주일 동안  목과 허리를  운신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근육이 뭉쳐저버렸고...오늘에야 좀 가벼워진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