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경계선

파월장병전우회의 어느 선배가 나에게 물었다.

“이 전우, 정말 복어를 먹으면 아무 고통 없이 잘 죽을까?”
“무슨 엉뚱한 말씀이세요?”
“전번에 복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지 않았나?
“예, 그 때는 복어 먹고 살아난 간암 환자 이야기였지요.”

내가 아는 어느 분이 간암 말기였는데 아들이 있는 서울대 병원에서도 받아주지를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내려와 옥상에 큰 솥을 걸고 매일 손질도 하지 않은 복어를 삶아 드셨는데 놀랍게도 몇 개월 후에 모임에서 연설을 할 정도로 쾌차한 것을 내 눈으로 본 적이 있었다, 병문안을 갈 때마다 집안을 진동하는 생선 삶은 냄새와 너무나도 피골이 상접해버린 환자의 처참한 모습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우리가 독약으로 알고 있는 복어 국물을 들면서 하루하루 날자를 기다리는 분의 처지가 안쓰러워 문병을 자주 가는 것도 꺼려졌던 터였다. 그런 분이 연설을 하시다니..... 나중에는 하루 몇 Km씩을 걸어 다닐 정도로 좋아졌는데, 막내 자식에게 맡긴 건축 사업이 난관에 부딪치자 스스로 일선에 뛰어다니면서 술을 다시 들게 되었고, 그런 뒤 몇 개월 후에 부음을 듣게 되어버렸다.

“그래도 복어란 놈 한 마리만 먹어도 죽는다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어 대답을 하지 않고 묻는 의도를 알고자 선배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집에는 10여 년 동안 구둘 방 신새만 지는 두 분이 계시는데, 하루 이틀이지 지긋지긋할 정도가 돼서....... 이 때문에 아내와 매일 다투기도 하고..... 그래서 혹여 나도 그러면, 나 역시 얼마나 자식들에게 못할 일 시킬까 싶어, 그저 물어나 본 것이야.”

이해는 가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복어를 먹으면 죽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설령 보았다 해도 곧이곧대로 대답할 성질이 아니어서 우물쭈물 하고 말았다.

“저도 잘 모릅니다. 원체 좋아하기는 하지만...”

45세가 넘어서자 가끔 두통이 찾아왔다. 왼쪽 관자놀이를 송곳처럼 파고드는 통증이 예고도 없이 찾아오곤 하더니 해가 갈수록 횟수와 정도가 심해지고 기간도 길어져갔다. 전주며 대전이며 서울 그리고 속리산을 찾아다니며 침도 맞고 주사도 맞고 약도 지어 먹었지만 1-2개월이 지난 뒤에야 낫게 되었고  치료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처방도 다음번에는  전혀 듣지를 않았다.

55세부터는 해년마다 발병을 하였고 기간도 3개월 정도로 늘어났으며 매일 한 두 차례 그리고 매차 한 두 시간씩 왼쪽 이마에서부터 시작한 통증이 눈 코 입까지 내려와 각 기관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말이 한 두 시간이지 당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내려치는 채칙질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문을 받은 셈이니 차라리 죽음을 생각한다.      

나는 몸에 걸친 옷가지들을 모두 벗어 던지고 화장실 좌변기에 쪼그리고 앉아 단전호흡을 시작한다. 머리와 안면에 끊임없이 쪼아대는 독수리의 부리들, 맹수의 이빨들. 나는 조금이라도 방어를 한답시고 무릎까지 얼굴을 떨어뜨린다. 영락없는 “로뎅”의 고민이다.
-고통의 사자여! 너는 나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네 맘대로 공격해보아라. 나는 이미 내 머리를 버린 지 오래다.  나는 다만 호흡 줄기만 붙잡고 있으리라.

나는 들숨을 단전에 내려 호흡 줄기를 만들고 원형으로 돌린 뒤 회음혈을 거쳐 백회로 끌어올린다. 다시 양쪽 관자놀이를 돌게 하여 혈관이 유통하도록 안간힘을 쓴다. 치료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현재 소유할 수 있는 단 하나, 호흡이라는 존재를 노치지 않으려는 것뿐이다.

어느덧  나는 이마가 촉촉해짐을 느낀다. 고통 때문에 나는 것인지 단전호흡 때문에 나는 것인지 땀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통증은 갑자기 사라진다. 벗어던져 놓은 시계를 보니 족히 한 시간 하고도 사십분이 지났다. 몸은 금방 쓰러질 듯 녹초가 되었는데 정신은 말짱해졌다. 마치 스읫치를 누르자마자 어두운 방안이 밝아진 것처럼. 담배를 피워 문다. 오랫동안 나팔을 불고 난 뒤처럼 다디달다.    

편두통이 아니라고 하였다. 한 쪽만 아프니까 편두통이라고 착각하지만 증상이 틀리단다.
-통증의 강도로 봐서는 “군발성 두통”이라고 봐야 하는데..... 간혹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혈류 혈관 혈압 신경 간 맥박 모두 정상이니 그것도 아니고... .
-엑스레이, CT, MRA검사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없고요. 

TV에 간혹 나와서 의료 상담을 하고 있던 국내 최고의 두통 치료 권위자인 모 박사님의  넋두리이다. 내가 오히려 병상일지를 꼼꼼히 적어 한 달에 한 번씩 들릴 때마다  제출해주었다.  
 

편두통 치료가 된다는 보톡스를 5대나 맞아도 소용없었다. 몰핀을 맞으니 그날은 통증이 없는데 그 다음날의 통증은 훨씬 더 강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매일  맞는 것은 다른 부작용이 생길뿐만 아니라 금지가 되어 있단다. 더군다나 치료약도 아니란다. 

안산에 있는 어느 절(중국 소림사 파라고 하던가?) 스님을 찾아갔었다. 여러 사람이 대기하고 있는 방에서 머리에 대침을 수 십 번 꽂는데 무릎 밑에 깔아놓은 수건에 선혈이 낭자했다.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더니 “어? 참,  잘 참네. 한 번 더 꼽을까.”하고 몇 번을 더 찔러댔다. 주위에서 아, 아! 하고 오히려 탄식을 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은 통증이 네 시간도 넘게 공격해왔었다,   
 

시간만이 약이었다. 매일 한 주먹씩의 알약을 네 번씩이나 털어 넣어도 차도가 없다가. 2-3개월이 되면 통증의 강도가 약해져 가면서 어느 날 갑자기 무통의 날이 온다. 그러다 보면 두서너 번의 징검다리 통증일이 있다가 그 후 몇 달 동안은 잠잠해진다.  약의 효과는 아닌 것 같은데 하여튼 나은 것이다.

그러나 환갑이 지나서도 불쑥 불쑥 찾아오는 징후는 나의 정신을 피폐할 대로 피폐하게 만들어 갔다. 우선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가 나를 속박하였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젊었을 때는 참을 수 있었던 한계가 노쇠해가는 체력이나 정신력으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눈을 감으려하면 저승사자 형상의 환영이 찾아왔다. 토막잠에서 깨어나면 창밖으로 달려가 “마지막 잎새”를 확인하는 버릇도 생겨버렸다.  

각자 자랑할 만한 직장의 포지션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얘들이나  나를 대하면 언제나 안절부절 못하는 집사람에게 어처구니없는 신경질을 부리는 내 자신이 미워졌고 혹 유전이 아닌가 싶어 조상들을 탓하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졌다.
 

죽음에 대하여 골똘해졌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주검을 지켜봐왔던가? 6.25 때 반란군에게 몰매를 맞아 몇 년간 골병을 앓으시다가 합병인 간경화로 49세에  돌아가신 선친의 죽음, 그 이전 국방군인지 인민군인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집단총살 장면, 임종을 못 지켜드린 어머님의 별세. 월남 전쟁 만 4년여. 그 후 먼저 간 여러 친했던 수많은 친구들.........아, 어느 친구는 낮에 같이 술을 마시며 기분 좋게 해어졌는데 그날 밤 삶의 경계선을 넘어가 버렸지.            

그러나 이때까지 나의 죽음에 대하여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종교인들처럼 내세를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나의 죽음이 타인의 슬픔이나 미련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없었던 터였다. 죽음의 고비를 여러 차례 겪기도 했지만 삶과 죽음의 차이에 무덤덤했었다.        
 

전우회 선배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병이 들어 죽는 길까지 누군가에게 폐를 끼쳐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죽음이란 삶의 종착역이니 삶의 완성인 셈이다. 따라서 삶이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삶의 덕목을 “더불어 즐겁게”가 최상이지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 최소한도 “남에게 폐해는 주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思考해왔다면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왕 떠날 것 미리 떠나자.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별하는 슬픔은 병상에서 짐이 되는 부담감보다 훨씬 짧은 것이며 가벼운 것이다. 내세가 있다면 나는 또 하나의 미지를 사전 극복할 수 있는 경험을 갖게 되리라. 동남아 어느 곳을 생각했었다.

떠나기 전에 나는 장조카를 대신하여 명당이랍시고 여기저기 산재되어 있는 5대 조고비까지의  묘소들을 어느 한 곳으로 모아 이장을 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산 저산의 7-8부 능선에 자리 잡은 풍광 좋은 장소들이었지만  산업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후손들이 성묘만 하는 데도 2-3일 정도 걸려야 하는 장소는 일 년에 한 번 찾아오기도 힘들 것이니 이 또한 죽어서도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가족 중에서 약간의 반대도 있었지만 하늘나라의 선조들도 바라는 바일 것 같아 풍수를 수배하고 산을 구하고 석물들을 준비하여 두통이 잠잠한 어느 날 전격적으로 실행에 옮겨버렸다. 꼭 일 년 만에 성사된 셈이지만 해놓고 보니 나 아니면 누가 언제 할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후손들도 성묘 날을 쉽게 잡을 것이며 모두 함께 모여 一家라는 계념 하에 하루를 보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말레이시아라는 미지의 땅에 도착하여 치른 경험의 댓가는 생각보다 컷었다. 우선 주택매매를 주선한 한국의 D회사가 이 나라의 주택 거래 법령은커녕 상식조차도 모르고 뛰어들었다가 내가 이곳에 오기도 전에 철수를 해버린 것이었다. 도착하기 전에 끝내기로 한 내부공사는커녕 전기 전화 수도시설도 개통을 하지 않은 채였다.

다행히 처음부터 이상하기 짝이 없는 거래가격 40%의 계약금은 이 나라 건축업자의 계좌에 입금된 것이 확인되었지만 나는 40Km나 떨어진 시내의 호텔에 머물러야 했고 내부공사를 나 스스로 수배해야했다. 한국의 변호사를 선임하여 D회사를 사기죄로 고발하기 위하여 내용증명을 보내게 했고 한편으로는 D회사가 선임해두었다는 인테리어 업자(사실 그들도 D회사와 거래사실이 전연 없는 서류상의 하청업자였기 때문에 D회사로부터 선수금을 받기 전까지는 결코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를 독려하여 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얼마 후 호텔비도 만만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통도 문제가 되어 전기와 수도만 들어온 공사 중의 건물로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단지의 건물들이 30%도 입주가 되지 않아 마을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층의 한 곳에 침대를 놓고 새우잠을 자면서 침입자에 대비해야했다. 물론 경비원은 있었는데 친숙한 인상들이 아닌 그들도 믿을 수가 없었다, 밤중이나 새벽에 그들이 뒤뜰로 들어와 부엌문이나 방문을 움직여보는 행동거지도 의심스럽게 보였을 뿐이다.    

월남전 때 귀순공작을 한 적이 있었다. 먼저 귀순을 했거나 전향을 한 포로들을 교육시켜 산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의 동료들을 귀순시키는 업무였는데 가장 조심해야 할 때가 그들을 어느 지점까지 안내해주고 무기를 건네줄 때였다.

나는 저녁이 되면 창틀마다 전선을 늘어뜨려 초인종과 접선을 시켜놓았고 전등을 끄는 시간을 매일 불규칙적으로 하였다. 여권이나 지갑을 각기 다른 곳에 은닉해 놓았고 호주머니에 100링깃 정도의 잔돈을 준비해두기도 했다. 적당한 곤봉도 사서 침대 머리맡에 새워놓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나중에 알고 보니 과잉방어에 불과했다.  물론 당시 조호바루 시내에서 한국 사람이 피해를 당한 사례가 있었고 우리 마을에서도 찬이 절도를 당한 사례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피해를 당한 이면을 살펴보면 그럴만한 요소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D회사의 대리인이라고 한 사람의 정보는 결과만 부풀려 이야기 한 것이었고 그 것이 인테리어 비용을 올릴 수 있는 구실에 무게가 더 실렸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구실을 들라면 무슬림에 대하여 나쁜 쪽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탓도 있었다.                 

나 역시 외부에만 신경을 쓰느라고 캄보디아 가정부에게 경계를 등한히 하는 바람에 미화 약 4000달러를 잃어버린 사건도 있었지만  이 역시 나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화를 환전하여 은행에 예금해놓았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을 차후 외국 여행을 갈 때 미화로 다시 바꾸어 가는 번거로움과 2중으로 부담하는 수수료 때문에 집안의 어느 은밀한 장소에 숨겨놓은 게 탈이었던 것이다.

겪고 보니 말레이 무슬림들은 적대행위를 하지 않으면 결코 먼저 공격하는 성격이 아닌 것 같았고 종교법에 어긋나는 행동은 되도록 삼가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한국인들에게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이유인즉 한국인들은 말레이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중국인들은 같은 국민이라 하더라도 오랜 시대부터  지금까지도 경제권을 가지고 평화스런 말레이 사회를 뒤흔들어 놓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인근 외국인들은 범죄자가 많다고 불신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와 J의 집 대문은 언제나 열려지게 되었다. 말레이 경비원들이 중국인들 집과는 달리 문이 열려있는 우리들의 집을 보고는 차츰 마당으로 들어와  음료수를 마시고 가기도 하고 저녁에는 여려있는 대문을 닫아주고 가기도 하였다. 정문을 지나칠 때마다 특별히 거수경례를 붙인다,  

말레이시아에 들어온 지 3개월 정도 되어서 두통이 재발하였다. 아마 D회사의 사기사건(?)과 차후 찾아와 말도 안 되는 보상금을 제시하면서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으면 알아서 하라는 줄다리기 협상에 신경을 너무 많이 쓴 것이 아닌가 싶었다.

5Km 떨어진 인다프라에 있는 중국인 의원을 찾아갔다. 치료를 받으러 갔다기보다는 한국에서처럼 처방해준 약이라도 복용해야만 통증의 시간이 단축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영국에서 공부를 했다는 의사는 내가 증상과 병력을 이야기 하자 일단 처방을 해보고 경과를 보자고 하였다. 한국인임을 감안하여 또박또박 설명해주는 그의 영어발음과 대화술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3일 분 분량을 지어주었다.

증상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였는데 강도가 그리 심하지가 않았다. 전에 태국이나 필립핀에서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미약했고 시간도 짧아서 의아해하면서도 통증이 시작될 때는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좌변기에 앉아 단전호흡으로 심신을 추스렸다.

두 번째 3일분이 떨어지기도 전에 무통의 날이 왔고 그 다음 번 약을 먹을 때는 격일 통증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계속 무통.

“무슨 약인데 그렇게 효력이 좋습니까?”      
“약이 아닙니다.  제가 지어준 약은 한국 같은 의학 선진국에서는 기초 약에 불과합니다. 선생님이 한국에서 이런 처방을 받지 않았다고는 믿지 않아요. 다만 기후와 토양이 맞았다고 봐야겠지요,” 

그는 내가 음양오행에 대하여 조금은 이해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무척이나 기뻐했다. 
      

2년 후 10월 달에 한국을 갔다가 20일 쯤 체류할 때 다시 두통이 찾아왔다. 통증의 심함이 말레이시아에서 겪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부랴부랴 전의 박사님을 찾아가 처방을 받은 반면 출국을 서둘렀다. 날씨가 싸늘해져버린 여의도 대교를 지나면서 이 출국이 한국의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고약한 상념에 젖기도 했다.

월남에서 두 번째 휴가를 왔다가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느라고 김포 공항을 향할 때였었지. 차창으로 흘러가는 산굽이 굽이의 오색찬란한 단풍들, 산등성이까지 둑을 친 천수답 논배미에도 여물어 물결치는 벼이삭들. 아, 눈앞에 빠알간 돌감이 몇 개 달린 앙상한 감나무가 스쳐가고... 밤새 내린 서리에 차갑고 쌀쌀해진 침묵의 강줄기, 곧 있으면 첫눈이 내릴 터인데.......나는 혹여 신이 난 강아지처럼 눈밭을 싸돌아다니며 곧 있으면 지워질 발자국 그림이나마도 그릴 수 없게 될지 모른다는 비감에 젖어 있었지.       

말레이시아는 여러 가지가 한국과는 반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우선 차량이 좌측통행, 전기 스위치를 내려야만 불이 켜지고 올리면 꺼지는 시스템 그리고 은행 창구가 재판정보다 높이 설치되어 고객은 아래에서 위를 처다 보고 일을 보아야 할 정도였다.(요즈음은 은행 창구가 많이 바뀌어졌다).

써비스 용역이나 집수리 같은 보수공사를 할 때에도 계약서가 아닌 업자의 면책사항만 적힌 요청서를 만들어야 했고 , 무선 인터넷을 설치할 때에 보증금을 걸었는데도 월 사용료를 하루라도 연체하면 바로 써비스를 중단해버렸으며, 그 이유로 해지를 하니 2개월 사용료를 공재한 금액을 6개월이 넘어서야 반환해준다. 이 모든 것들이 처음에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발하였으나  하나씩 하나씩  경험으로 치부하고 점차적으로 적응해나가니 이력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동양 철학(?)으로 일대라고 하는 환갑을 넘기고 8여년 정도 환경과 관습이 전연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내세가 있다면 바로 그 내세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내세라는 게 별 것 있겠는가? 피안의 언덕이지. 모르니까 두려운 것뿐이야.  차츰 적응해 나가면 이 풍진 세상과 무어 다를 것 있겠는가?

“아빠는 건강히 잘 있으니 내 걱정은 말고 너희들이나 올바로 살아라. 올바른 마음은 건강한 신체를 만들고 이웃과 화목하게 되며......”        
            

내 카카오 톡은 언제나 아이들 걱정이다.           
               

어디가 이승이고 어디가저승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