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음식-신토불이

라마단 금식 기간이 끝나고 하리라야(명절) 기간이 찾아왔다. 말레이시아 달력에는 7월 28일과 29일 이틀만 공휴일로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의 설 연휴와 마찬가지로 일주일 정도를 쉬는 모양이다. 전에는 한 달을 쉬었다고 한다.

남자들이 바주 말라유(말레이 전통 남자의상)을 입고 송꼭(전통 남자 모자)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니 평소 직장 유니폼을 입었을 때 보다 훨씬 의젓하다. 여자들 또한 바주 꾸룽을 입고 뚜둥을 쓰고 있는 모습은 훨씬 우아하게 보였다. 언제나 느끼지만 이때는 영화 속의 인도차이나 반도에 온 실감을 갖게 한다.  

하루를 쉰 가정부 리아가 크뚜팟이라고 불리는 야자수 잎으로 각이 지게 싼 찹쌀밥 덩어리와 소 간으로 만든 런당 그리고 빵 과자 등을 한 봉투 들고 왔다. 한 끼 음식으로 충분하지만 아무래도 된장국이 있어야 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과자나 빵을 카리(카레)에 버물러 먹으면서 한 끼로 생각하지만 나는 아직도 점심이나 저녁은 밥과 국을 조금이라도 먹어야 한다.
 

인도네시아 자바가 고향인 리아는 얼마 전 딸이 세상을 떠난 뒤로 부쩍 말이 없어진 대신 훨씬 부지런해졌다. 하루를 더 쉬어도 된다고 말했는데도 쉬면 뭐 하느냐며 핸드폰에서 나오는 아단(EZAN)을 들으며 여기저기 청소를 한다. 냄비나 그릇도 닦고 장식품들도 재배치한다. 고향에 못가는 한풀이를 일로 때우려는 것처럼. 저녁에는 친구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하리라야를 보낸다고 한다. 

작년 이만 때 전의 가정부 수미가 인도네시아에 가야하니까 열흘 휴가를 달라고 해서  5일만 하자고 했더니 그만두어버린 것에 비하면 나에게는 퍽이나 고마운 종업원인 셈이다.      

골프장 경기과장격인 함발리가 집에 소주가 있느냐고 물었다. 사떼(양고기나 닭고기 코치) 를 사가지고 갈 테니까 소주를 준비하란다. 이 친구, 금식은 지키면서 알콜 금지규정은 지키지 않는다.

“당신, 무슬림 맞어?”

“쉿, 나는 사이비.”

술을 금하는 조항은 없단다. 단지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마시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친구 소주 반병만 마시면 횡설수설하다가 우리 집 마당의 장의자에 들어 누어버린 적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오후 네 시경 전화가 왔다. 사떼 파는 가게가 전부 문을 닫아버려 살 수가 없단다. 내일 보자고 한다.

“하리라야 때 문을 연 사때 포장마차가 어디  있다고.....?”

말레이인들의 약속은 믿을 바가 못 된다. 우선 시간이 없다. 오늘 아니면 내일이지 몇 시. 몇 시가 없다. 가끔 내가 짜증을 내면서 “몇 시?” 하면 “낮” 또는 “밤” 이렇게 시간을 잡는다. 그리고 그 시간도 우리하고는 틀리다. 아침은 오전 12시까지이고 낮은 해 지기 전까지이다. 밤은 해 진 후부터 12시까지인 모양이다.

나는 마침 소주가 없어 “준비가 될지 모르겠다. 한국 식당에서 빌려 볼 게.”하고 엉클 장을 찾아가 두 병을 빌려서 준비를 해놓았는데 그는 하리라야 기간인 이때에 사떼를 살 수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아보지 않고 약속을 정하였으니........ 그래도 함발리는 나에게 하도 여러번 충고를 들어서 전화라도 해주니 그 중 양반인 셈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연락도 없다. 이튿날 만나도 약속을 지키지 못함에 대한 미안한 말 한마디 없는 것이 상례다.

힐린을 하면 대들 듯이 말도 안 된 이유룰 댄자. 

“비가 왔지 않았나?”

“교통이 없어서......”

“신의 뜻에 의하여.......”      

함발리가 전화가 온 지 10분도 안 되어서 전화가 울렸다.

“형님, 접니다. 지금 조호에 도착했는데 저녁은 집으로 오세요. 생굴을 얼음에 채워가지고 가는 중이니까.”

한 동내에 살고 있는 J가 돌아온 것이다. 그는 3개월씩 한국과 말레이시아를 드나든다. 6 년 전 거의 같은 시기에 우리 동내에 집을 구입한 육십 두 살의 유일한 한국인 이웃이다. 공교롭게도 그의 집과 우리 집은 집 번호가 연번(連番)인데도 그의 집은 뒷 라인의 맨 끝집이고 우리 집은 앞 라인의 맨 처음 집이다, 그래서 거리가 300m는 떨어진다, 그가 이곳에 없는 때는 나는 출입을 할 때마다 그의 집을 둘러보느라고 동내를 한 바퀴 돌아다닌다.

J의 집 앞 정자가 있는 쉼터입니다


하늘이 빨갖게 물든 석양이 집 앞 가로수에 걸릴 때 J의 집 마당은 야외 식탁이 펼쳐졌고 그 위에는 푸짐한 음식들이 차려졌다.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생굴과 과메기 그리고 신선한 김치이다.

우유빛으로 영롱한 생굴의 알알들이 쟁반 가득히 쌓여 처마 밑을 찾아온 석양에 반사된 반짝거림은 가히 침 넘어가는 음식이라기보다 한 폭의 정물이다.

소주를 들이킨다. 입 안을 싸아^하게 하는 씁쓰름한 독기를 털어 넣은 뒤 초장을 듬뿍 묻힌 생굴을 오물거리면 아- 어머니 내음.  김에 싼 과메기의 향기는 사시사철 풍광을 달리하는 한국의 바닷가 내음 그리고 온갖 양념에 버물려 삭힌 김치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주옥 같은 문구들.....

“오!  대 한 민국.”

중국인 라오와 딴도 따라 부르면서 소주 반잔에 연신 김치만 집어 먹는다. 계속 입을 호호 불면서...... 그들은 생물엔 전혀 젓가락질을 하지 않는다.

“오 호...  따 하안 미인구어!”  
                

바로 앞의 도로와 정자 쪽에서 갑자기 폭음을 내며 불꽃들이 올라간다. 어느새 찾아온 어둠의 하늘에 찬란하게 피워오른 형형색색의 꽃무늬들. 동내 말레이 어린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하리라야를 축하하는 것이다.

한국의 첫 서리 오는 날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