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년식

아침 일곱시 십분 전 아침 운동을 나가려고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낸다. 그리고 흐트러진 신발 끈을 매려고 허리를 굽힌다. 그런데 갑자기 허리가 끊어질 듯 한 통증이 등을 타고 목까지 올라왔다. 호흡마저 막혀버릴 것 같았다, 간신히 몸을 신발장에 기대고 우선 호흡을 가다듬은 뒤 허리를 펴보려고 하니 쉽게 되지를 않았다, 기다시피 다시 집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몸을 눕혔다.

십 여 분 동안 복식호흡을 시도하니 답답증이 한결 갈아 앉았고 몸도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려하니 등허리 쪽은 그냥 결린다. 다시 맥없이 몸을 눕힌다. 누어만 있으니 아픔은 없었지만 비 맞은 옷 그대로 입은 것처럼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천정에는 항시 ‘약한 바람’으로 켜져 있는 선풍기가 돌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무거운 것을 들다가 그런 것도 아니고 허리에 무슨 힘을 가한 것도 아닌, 그저 신발 끈 고쳐 매려고 등 굽힌 순간에 근육의 뒤틀림이 생기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매일 준비운동으로 ‘엎드려뻗쳐‘는 아니지만 다른 체조와 더불어 ‘등 굽혀 펴기’를 여덟 번 씩은 하여왔는데.... 이게 소위 말하는 “연(년)식” 탓인가?

“허리 한번 삐끗했더니 연식이 있다 보니 오래가던데......” 오래 전에 중고차 딜러를 하던 친구로부터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였지만(사실은 개그에서나 나올 법한, 쉽게 알아듣지 못할 표현이었다) 남의 일이려니 했다.

일시 귀국할 것이란 이야기를 가족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게 얼마나 잘한 일인가? 어젯저녁 싱가폴에 있는 항공사 대리점에 항공표 알아본게 허사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취소를 해야겠지? 그래 취소를 하자. 가족들에게 아픈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여기에 혼자 떨어져 지내는데, 그리고 엄청 좋아졌다고 계속 희소식을 보내고 있었는데, 다시 아픈 몸을 끌고 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어쩌면 금년엔 가지 말라는 계시처럼 생각되기도 하였다,

탁자 위를 더듬거려 TV 리모콘을 찾았다. 그러나 전원 스윗치를 눌러도 TV에 불이 켜지지 않는다. ‘참, 이건 고장난 것이었지’ 베터리가 다 닳아진 줄 알고 갈아 끼워 봤어도 소용이 없었다. 쿠알라룸푸에 있는 LG 대리점에서 가져왔었는데 고장이 나면 이 나라 마케팅 실정을 보아서 그냥 버릴 수 밖에 없음을 걱정해왔었다. 다행이 리모컨의 고장이라 이층에 있는 다른 한 대의 리모컨을 사용할 수 있는 점이 위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TV를 켜려고 이층에 올라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리모컨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졸음이 찾아왔다.

한 달 전인가, 였다. 세 뼘 넓이 밖에 안 되는 담장 밑의 공간에서 사람 키 두 배 정도의 높이로 자란 빠빠야 나무가 쓰러졌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천둥소리와 함께 담장 위의 철제 조형물이 무슨 폭탄이라도 맞은 듯 한 굉음을 울려 신발도 안 신고 뛰쳐나가보았더니 바로 여인네 허리둘레의 나무기둥이 담장에 걸쳐져있었다. 우산을 들고 와 나무를 살펴보았더니 왼쪽 외줄로 뻗어나간 원뿌리에서 나무 밑둥이 끈어져 오른쪽으로 넘어져 있었다, 다행히 무 자르듯이 끊어진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는 이어져 있었고 오른쪽 곁뿌리와의 연결은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마 담장이 아니었으면 뿌리 채 뽑혀나갈 뻔 한 것이다.

“오호 통재라! ” 씨앗을 받아다가 모종을 만들고 담장에 이종한지 2 년 만에 다섯 나무를 키웠는데 유독 무성하게 자랐고 지난 삼년동안 끊임없이 탐스런 과실을 생산하였던 나무였다. 나뿐만이 아닌 이웃들 방문객들 모두 시장에서 산 것보다 훨씬 달고 맛있는 과육 때문에 사랑하고 아껴주었던 나무였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조금씩 시들해져가기 시작한 것이 이상하여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통상 빠빠야 나무의 수명이 5년 정도라고 하였다. 그래도 비료 섞은 토양을 수시로 뿌려주었고 나무는 그에 보답하듯 비록 잎사귀들이 전 같지 않게 힘이 없었어도 똑같은 크기와 똑같이 맛있는 과실을 맺어주지 않았던가? 오호 애재라!

비가 갠 뒤 이웃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뿌리 쪽에 몇 개의 부목을 대어 보다 안전하게 담장에 몸을 의지할 수 있도록 하여주었다. 그리고 식물원에 가서 영양제를 사다가 몇 번에 걸쳐 뿌려주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살아있기는 하지만 잎사귀 끄트머리가 햇볓을 견디지 못하고 타들어가는 폼이라든지 지금도 달려있는 몇 개의 열매들이 더 이상 크지를 못하고 그 밑의 이파리들만 처져가는 폼이 영 안쓰럽기만 한다. 이웃들이 아예 베어버리라고 하여 , 몰에 가서 톱을 하나 사오긴 하였지만 아직 톱집에서 날도 꺼내보지 못하였다.

늙은이의 집엔 무엇이 그리도 못 쓰는 물건들이 많은 것인가? 어느 스님은 나이 먹어갈수록 버리는 것이 많다고 그랬는데 나한테는 오히려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이 너무도 많이 쌓여있다. 센서가 날아간 전기밥솥, 날이 돌지 않는 분말기 그리고 심지어 서예와 한국화를 연습한 습작품들이 한 마대 정도는 쌓여있다. (언젠가는 다시 고쳐 쓸 것 같고 한지의 경우 풀을 쑤어서 지점토처럼 만들어 조각 같은 걸 해볼 요량으로.)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인도네시아 가정부가 투덜거리면서 문을 따는 소리에 눈을 떳다.

출근을 시켜주기로 한 계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인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것인지 잔뜩 부운 얼굴로 집안으로 들어서다가 전과 다르게 소파에 누어 있는 나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등허리를 가리키자 물수건과 근육통 겔을 준비하면서 또다시 투덜거렸다.

“ 맨날 컴퓨터, 감발(그림)로 허리를 굽히고 있으니 허리가 고장 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오랑 뚜아(노인)는 낫지도 않는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