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령과 내기바둑.

퇴계 이황 (李滉 1501년 - 1570년)선생님은 조선 명종, 선조 시대의 명신으로서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퇴계선생님의 바둑은 나라에서도 인정하는 국수 급으로 바둑 좀 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기를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이었다.

이황 선생께서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나신 것은 아직 바람이 차가운 봄날이었다. 봄의 정취에 취하고 봄날의 아련한 아지랑이에 취해 산골짜기 녹아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 취해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면서 금강산의 정취를 한껏 즐기던 이황 선생의 눈앞으로 한 젊은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얼핏 떠꺼머리총각으로 보이는데 말 등에 삐딱하게 올라타고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은 퇴계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당신이 이황이라는 선생이오?”

젊은 사내가 아주 건방진 어조로 이황선생에게 물었다. 이황선생도 어이가 없는지,

“내가 이황이오만?”

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젊은이가 영 마땅찮은 얼굴로 이황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사람들이 당신을 일러 나이 많은 유학자로 바둑실력이 굉장히 뛰어나다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다짜고짜 실력이 뛰어나냐고 질문을 하자 잠시 망설이던 이황선생께서 대답하기를,

“바둑은 잘 두지 못하는 데 남들은 잘 둔다고 합디다. 뭐 그냥 돌아다니면서 남들하고 어울릴만한 바둑이라고 생각하오.”

이황선생이 말하자 말위에 있던 젊은이가 말에서 껑충 뛰어내려서 이황선생의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말했다.

“그럼 나하고 내기 한번 둡시다.”

상대방이 떠꺼머리총각에 젊긴 해도 실력을 알 수 없는지라 걱정이 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좋소. 한판 둡시다.”

말을 마친 사내가 말의 뒤편에 실려 있던 바둑판과 바둑알을 가져오는 데 보니 묵직해 보이고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때 저만치서 더벅머리 총각 하나가 유유자적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다가오다가 이 광경을 보았다. 더벅머리 총각이 말했다.

“노소의 대결이 볼만 하겠구려. 뭐 난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재미있게 두시오. 난 그저 구경이나 하다 갈렵니다.”

떠꺼머리총각이 더벅머리 총각을 슬쩍 노려보고는 바둑판을 들고 한적한 시냇가로 향했다. 그리고 냇물이 졸졸 흐르는 시냇가의 너럭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는 바둑판을 펼쳤다.

“무슨 내기를 하려오?”

이황이 떠꺼머리총각을 바라보면서 말하자 떠꺼머리총각이 대답했다.

“사실은 이 바둑판은 황금덩어리고 바둑알을 담는 통도 역시 금이란 말입니다. 가져다 팔면 엄청난 돈이 될 거라 이거지요. 나는 이것을 걸 작정입니다.”

이황이 물었다.

“그럼 나는 무엇을 걸면 좋겠소?”

떠꺼머리총각이 씨익 웃고는 천천히 말하였다.

“당신 때문에 내가 세상에서 출세를 못한단 말입니다. 출세 좀 해야지요.”

“당신이 출세를 하려면 어찌 해야 하오?”

“그거야 쉽죠. 당신이 없어져 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나의 내기는 그거요.”

이황선생은 등골이 서늘했다. 말하자면 목숨을 걸라는 이야기였다. 젊은 사내가 말했다.

“정 자신이 없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면서 이황바둑은 엉터리 바둑이오라고 외치면 지금 기권해도 뭐라고 추궁하지는 않겠습니다, 즉 안두어도 됩니다. 뭐 목숨이 아까우면 그렇게 하셔도 좋지요.”

젊은 사내가 다시 얼굴을 이황선생의 앞으로 바짝 내밀면서 놀리듯이 말했다. 이황선생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엄청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한번 둡시다. 내가 죽는 것이 하늘의 뜻이면 질 것이고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살겠지요?”

“죽는 것보다는 쪽 팔린 게 나을 수도 있는데 뭐 정 죽겠다면 마음대로 해보시구려. 원 자존심도 강하시지. 나 같으면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면서 나 이황바둑은 똥 바둑 이오. 하련만, 하하하.”

“거, 젊은 양반의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군. 한판 둡시다.”

이래서 한 판의 내기바둑이 시작되었다. 이황선생은 정신을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여 바둑을 두었지만 한수 둘 때마다 점점 불리해지면서 필패의 국면으로 가고 있었다. 구경하던 젊은이는 꾸벅꾸벅 졸고 마주앉은 젊은이는 이황이 언제 던질 것인가 지켜보다가 이황이 포기한 기색을 보이지 않자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황은 목숨이 달린 일인지라 쉽게 포기해버릴 수가 없었다. 지면 죽는데 어찌 한수 한수를 쉽게 둘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설상가상이라고 이황 선생의 대마 하나가 위기에 몰렸고 풍전등화의 국면이었다. 그때에 갑자기 반대편에서 두던 젊은이가 말했다.

“똑바로 보고 단단히 놓으시오. 한수만 삐끗하면 바둑도 끝이고 당신 목숨도 끝이란 말이오. 하하하. 내 소변보고 오리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오줌을 누러 가버렸다. 이황선생은 안절부절 했다. 이정도로 젊은 사내가 잘 둘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당황하자 평소에 잘 보이던 수도 보이지 않고 심장만 덜렁 덜렁 뛰고 있었다. 그때였다. 길게 누워서 편안히 구경하던 젊은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손가락으로 다음에 놓을 자리를 짚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누워버렸다. 이황이 가만히 들여다보니 총각이 짚어준 자리가 천하의 명당자리였다. 묘수중의 묘수로 여태까지 몰리던 대마가 살아나면서 오히려 상대방의 돌들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기이한 수였다. 마침 소변을 보고 돌아온 청년이 마주 앉았다. 이황이 어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돌을 들어 판위에 딱 놓으니 그걸 바라보던 청년의 낯 색이 갑자기 파리해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앉아서 끙끙거렸지만 그 수로 바둑은 끝이었다.

“저 놈 짓이지?”

반대편에 앉아서 바둑을 두던 젊은이가 누워서 멀뚱멀뚱 바둑을 구경하는 청년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증거 있어?”

멀뚱거리던 청년이 대뜸 반말 짓거리를 했다. 했다는 인정도 아니고 안했다는 변명도 아니었다.

“아니야, 네놈 짓이 분명해. 죽일 놈.”

“시끄러, 졌으면 얼른 바둑판 놔두고 꺼져.”

“이번 판은 내가 패배했군. 너, 두고 보자.”

다 이긴 바둑을 패배한 청년이 벌떡 일어나더니 뚜벅뚜벅 걸어서 산길로 휙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청년이 남기고간 황금바둑판과 황금바둑알통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패배를 인정하고 가버린 것이었다. 그때까지 너럭바위에 누워서 멀뚱거리던 청년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황 선생에게 말했다.

“저 젊은 사람은 태백산 산신령인데 젊은이로 가장해서 퇴계선생을 죽이러 온 거고, 나는 금강산 산신령인데 퇴계선생이 죽을까봐 살리려고 옆에 누워있었습니다. 혹시라도 퇴계 선생이 패배할까봐 왔던 것입니다. 저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퇴계선생이 무어라 감사의 말을 하려는 순간, 너럭바위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황금바둑알과 황금바둑알 통만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