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들이 부르는 진혼곡(鎭魂曲)

해마다 유월이면 향기도 나지 않는 국화(菊花)가

온 산을 덮고 가득 피어나는 곳이 있다.

대전 국립 현충원이다.

떠난 자와 살아있는 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유월 초엿새

현충일(顯忠日)

계룡산 줄기 한 모퉁이 그 산자락에는 국화가 그날 만발하며 피어났다.

만추(晩秋)의 국화가 가을 냄새를 진하게 품고 있다면

대전 국립 현충원을 가득 덮고 6월에 피어나는 국화에는

향기를 대신하는 눈물이 그렁그렁 잔뜩 배어 매달려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 가는 세월에 달이면 달마다 사연 없는 달이

어느 한 달이라도 있으랴마는 유독 사연이 많은 달이 6월이 아닐까 싶다.

60년이 훨씬 지났지만 6.25라는 전쟁이 남긴 상흔(傷痕) 때문이리라

허리가 잘린 조국의 분단으로 고향과 가족을 잃고

남과 북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이산가족에 의미마저

피해를 직접 겪었던 당사자들이 이승을 등지고 거의 사라진 지금

세월에 덮여 아문 상처로 퇴색되긴 했지만 그때의 통증은

아직도 그곳에 남아있었고·세월이 덧붙여 놓은 또 다른

상처의 자국들로 현충원은 신음소리를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

토해내지 못한 울음을 잔뜩 싸안고 있는 것 같은 하늘이 무겁고 어둡다

현충원 묘역에 깔려있는 잔디 뿌리 하나하나마다 아픈 사연과 눈물이

매달려 있을 그곳에 다녀온 지 한주가 지났다.

월남 참전과 부상으로 국가유공자인 매형이

현충원 장교 묘역에 안장 된지 아홉 해가 되어간다.

젊은 날에 만나 함께 백발이 되도록 부부로 한 몸을 이루고 살다.

반쪽을 잃어버린 슬픔에 어쩌면 순간 함께 묻히고 싶어보였을 만큼

처절하게 애통해하던 누님에 울음소리 옆에서

형처럼 가깝게 의지하고 존경했던 그 분을 잃고 그날 나도 소리죽여 울었다.

돌아간 분들에 모습은 기억과 그리움으로 떠나던 날에 멈추어져 있다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에 시간은 쉬지 않고 꾸역꾸역 싸여간다.

살아생전에 웃는 모습은 전혀 퇴색되지 않고 또렷이 뇌리에 남아있지만

세월 무게에 눌려 지금은 잦아든 누님의 울음소리처럼 또 다른 슬픔으로

견디기 어렵던 내 그리움도 이제는 작게 움 추려져 있다

음복을 핑계 삼아 들이 붓듯 마시던 술잔에 숫자가 줄어든 것처럼...

영정으로 쓰이는 외 조카 지갑 속 매형에 사진이 닫혀 지고

밀리는 서울 길을 염려하고 늦을세라 묘역을 떠나던 내게

1구역 정도 떨어져 잘 다니지 않던 길 건너 쪽에서

내 발길을 붙잡는 것이 있었다.

작은 묘비를 가리고 서있는 생화로 장식된 대형 화환 이었다.

묘역 옆에는 같은 크기에 화병이 장교 사병 구분 없이 일률적으로

오와 열을 맞춰 부착 되어있고 꼽히는 화환은 보통 여러 종류의 꽃으로

이루어지긴 하지만 꽃송이 30~50여개가 달린 한 묶음 또는 두 묶음에

조화가 거의 대부분 꼽혀있기 마련이어서 생화로 장식된 대형 화환은

눈길을 끌고 발길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처음 다가서며 얼핏 보였던 것은 사랑하는 가족 일동이라는

리본 좌측에 매달린 글귀였다.

가까이 다가가 우측에 쓰여 진 글을 읽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말았다.

영원히 너를 기억 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또 한 번 가슴이 시려왔다.

-아빠가- 라고 끝에 매달린 글 때문 이었다.

묘비 뒷면을 읽어 본다.

계급은 대위였으며 3사관학교 30기였고 2002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아들은 30세 전후에 사망했고 아버지는 대략 60세 전후로 추정되었다.

내 아들과 비슷한 나이에 떠난 것 같고 아버지의 나이도 나와 엇비슷할 것 같다.

직접 당하지 않은 일이지만 공감되는 아픔이 싸하게 온 몸으로 전해져왔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괜시리 무거워진 발걸음을 돌리다 먼 길이라고 늘 바쁘게 돌아가느라

해마다 다녀가면서도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사진들이 푯말에 꽂혀

언덕에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357 무궁화 언덕”이라 명명된 곳이 있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 추모회가 2005년 6월 6일, 무궁화 잔치를 개최하고 있는

홍천에서 여섯 그루를 가져와 장사병 제2묘역 뒷길 경사진 부분에 심었다니

꽤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을 텐데 왜 눈에 뜨이지 않았었는지 모를 일이다.

푯말에는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대한민국 해군

참수리 357정 용사들의 영웅적인 희생정신을 영원히 기리려고

무궁화를 기념식수한 곳입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렸지만 연평해전 전사자 명단을 올려

10년 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산화한 그들의 호국정신을 다시 한 번 기려본다.

故 윤 영하 소령: 당시 대위 충무무공훈장 추서 (1973.11.24生)

故 한 상국 중사::당시 하사 화랑 무공훈장 추서 (1975.1·31生)

故 조 천형 중사:::당시 하사 화랑 무공훈장 추서 (1976.4.16生)

故 황 도현 중사: 당시 하사 화랑 무공훈장 추서 (1980.2.27生)

故 서 후원 중사: 당시 하사 화랑 무공훈장 추서 (1980.11.28生)

故 박 동혁 병장: 당시 상병 화랑 무공훈장 추서 (1981.7.25生)

한때는 서해교전으로 불렸고 사망자는 전사자가 아닌 공무 중 사망자에 불과했던

시절의 오류가 있었지만 2008년 승전개념인 ‘연평해전’으로 명칭을 바꾸고

평택 2함 사령부 행사에서 정부 공식 추모행사가 열리면서 그들은

무궁화 꽃잎을 피우며 호국의 영령으로 이 언덕에서 다시 피어났다.

무궁화나무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호국의 언덕에 피어난

제2연평해전 여섯 전사자의 현신이라 생각하니 비장함으로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돌아 서면서 다시 까닭모를 슬픔이 밀려왔다.

역사의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게 될것 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흐름의 잘잘못을 따져가며 분노하고 뒤바꾸기에는 내 힘은 너무 미약하고

역사의 흐름은 너무도 거대한 것이기에 지켜 볼 수밖에 없음을 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당시 그들의 나이가 다 피지도 못한 꽃처럼

2~30대에 젊은이들이었다는 것이고 그들을 잃고 이 묘역을 찾아와

한숨으로 눈물을 말리는 아버지들에 뼈가 깍겨 나갔을 아픔을

조금이나마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전 어른들 말씀에 이런 말이 있었다.

“부모를 잃으면 앞 남산이 보이지만 자식을 잃으면 앞 남산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살아가며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일들은 많다.

이런저런 일들로 아픈 가슴을 싸안고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이별만큼 아픈 것은 없다.

팔순 혹은 구순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도 비통해하며

찢어진 가슴을 수습하기 어려운데

더더욱 생때같은 자식을 잃어버린 애비들에 아픔이야 말해 무엇 하랴

가늠하기조차 죄스럽고 어렵기만 하다.

대전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차안에는

세월에 무게로 아무리 누르고 눌러도 가시지 않을 슬픔에 목이 메어서도

한 서린 아들을 달래고 또 달래며 눈물을 삼키고 부르는

아버지들의 슬픈 노래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늘도 현충원 묘역엔 아버지들이 부르는 뼈저린 진혼곡(鎭魂曲)이

밤을 새워 흐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