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깊은 주름속의 흔적

그리움 없이 만나도 좋은 사람끼리 서로 나누어 갖는 마음 간격의 거리는

언제라도 만나고 헤어져도 부족함이 없이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그립고 서로 소유하고 싶은 사랑의 마음이 솟아난 사람끼리의 거리는

얼굴과 목소리를 함께 하지 못하면 안타까움으로 서로를 목이 쉬도록 부르게 하며

한 발자국만 떨어져도 헤어짐의 거리는 천리처럼 멀기만 하다

해인이 와의 짧은 만남이 흘려 놓아 간간히 맛보던 희열은 병구완을 위해

자식이나 피붙이가 서야할 자리에 나를 세워 놓고 양귀비 꽃 자라기를 기다리는

마약 중독자처럼 治善 노인의 병실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게 했다

딱히 꼬집어 물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해인이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가족 관계라던가

학생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해인이의 농익은 여인의 향기가 의아 했지만

짧은 만남마저도 그나마 잃게 될까봐 작은 걸림돌도 두려웠던 나는 아무것도 묻지 못한 채

여름 방학에 들었고 더 많은 시간을 治善노인과 함께 보냈다

“처음 두었던 바둑이 숙제처럼 남았을 텐데 오늘 그 숙제 한번 풀어 볼 텐가?”

입이 무겁고 낯을 가리는 사람끼리 가까워지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다

부탁 없이 저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만난 지 여러 달이 지났음에도

병실을 지켜주는 고마움의 인사치레는 고사하고 옆을 기웃 거리는

내 주변 잡사에 대해 한번은 물을 법도 한데 처음 병실에서 만난 날

아버지의 행적을 물은 일 말고는 들어서는 첫 인사를 나누면

거의 종일을 같이 보내도 등댄 사람처럼 지내던 治善 노인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노인의 곁을 맴 도는 이유가 바둑의 승부를 내지 못한 앙금 때문이 아닌지는

서로 익히 알고 있는 터지만 해인을 기다리는 지루함을 덜기에

그보다 좋은 것은 찾기 힘든 터라 부랴부랴 병실을 돌아 바둑 둘 준비를 마치고

그와 마주 앉았다

“자네 손에 책이 들려있던 시간이 있었을 것 같으니 두 점은 덜어도 될 듯하니

두 점만 붙여 놓아 보게나!”

귀신같은 늙은이다

해인이가 가득 찬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을 공부보다 바둑의 사활이나

묘수풀이가 담긴 선친의 바둑책으로 그동안 비어있던 기력의 그릇에 채운

내 힘을 정확히 가늠해오는 그가 순간 두렵게 느껴졌다

처음 두던 날과 달리 장고의 장고를 거듭한 그와의 한판은 점심 조금 넘어 시작해

긴 여름 한낮이 지나도록 끝이 나지 앉았다

처음엔 몰랐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가 두고 있는 바둑은

승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내게 길을 가르쳐주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가려고 하지 않았던 길과

패배의 상처가 남을까 두려워 늘 돌아가던 길 버릇을 버리도록

어둡고 낯선 길로 나를 끌어들여 의혹을 걷게 하며 두려움을 털어 줬고

조바심이 나 내 급해진 발걸음이 보이면 코뚜레를 채워 천천히 걷는 방법과

찬찬히 주위를 살펴 이삭이 많으면 한단의 볏단에서 털어낸 알곡 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차근차근 알려 주고 있었다

마치 어렸던 내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이끄는 손길은 다정하고 따스했다

낮부터 시작해 밤이 으슥하도록 두었던 대국의 피로함이 몰려 왔는지

계가도 내게 미뤄두고 지친 몸으로 治善 노인이 잠든 병실 바둑판 앞에서

숱한 방향에서 몰아친 감정의 회오리바람을 맞으며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아버지의 자상함이 담겨있던

한 수 한 수룰 복기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내 눈에는 나도 모르는 눈물이 흘러 나왔다

무얼 하던 분이였기에 한판의 바둑에 그 많은 것을 실어 내게 줄 수 있었는지

새롭게 피어난 궁금의 수레는 잘 굴러 주지 않아 무진 애를 쓰며 시달려야 했다

삼복더위에 들어서며 간호원들이 뛰는 발자국 소리가 잦아지게

그의 병세는 악화 되고 있었다

틈만 나면 비치는 내 얼굴은 병원 내에 어느새 아들이나 조카 정도의

피붙이로 인식되어 병원이 그에게 베푸는 의술의 한계가

완치를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작 그의 수시로 찾아오는

고통을 줄여주는 정도와 임종을 함께 기다려주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해주는 일이

따로 히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도와주었다

한 번도 술을 찾지 않는 그가 과도한 음주로 간과 폐가 녹아 있어

회생이 불가능한 환자라고 들었을 때 나는 귀를 의심했지만

그가 더 가야할 길을 가로 막은 협곡에 놓인 다리가 끊겨 다 못 마친

여행을 끝내고 죽음을 기다리는 나그네라는 것을 부인 하지는 못했다

너무 일찍이 찾아와 창을 두드려 대는 마음에 와 닿은 봄에 못 이겨

녹지 않은 얼음을 타고라도 강을 건너 경작지에 가려는 성급한 농부처럼

어쩌면 느닷없이 떠나 버릴 것 같아 해인과 治善 노인 사이를 뛰어 다녔지만

두 사람 의 사연은 더 이상 건져내지지 않았다

장마에 들었는지 전날 밤부터 억수처럼 내린 비가 멎지 않아 망설이다

집을 나서 찾아간 병실의 治善노인은 중환자의 모습은 어딘가에 깊이 감춰두었는지

무릎을 포갠 정좌의 모습으로 단아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견디기 어려울 것 이라는 의사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윽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너무도 평온해 보였고 깊고 맑았다

“앉게나!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모양 일세

마음에 담아 두고 그냥 담고 가려하다 젊음이 간과하고 만용처럼 부려댄

그 어리석음에 끌려 다녔던 내가 지나온 휘고 거친 길을

인연 닿아 내 곁에 있게 된 사람이 힘들지 않게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

오늘은 들려줄 말이있어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다네“

담담한 말투였지만 깊고 맑았던 그의 눈은 서서히 격정에 휩싸이며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멀고도 가까운 것이 인연사라 하더니 자네와 내 사이가 그러한가 보이

처음 자네를 만나 근 20년이 넘게 손에서 놓았던 바둑을 두게 됐던 건

오랜 동안 덮고 산

내 기억을 들쑤셔낸 낯익은 얼굴이 자네에게서 보였기 때문 일세"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끓어오르는 회한을 삼키며 자신의 마음을 다독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자네의 지금 모습 같이 젊은 날에

자네 부친과 나는 젊은 격정의 강을 같이 건너던 친구 같은 사이 였다네!"

                                                         -계속-